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이 어우러진

[추풍령에서 도담삼봉까지, 충북을 걷다 ③] 영동군 황간면

등록 2012.07.07 13:55수정 2012.07.0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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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리 산꼭대기에 있는 가학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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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루 ⓒ 이상기


향교로 오르는 계단길을 이곳 사람들은 가학로(駕鶴路)라 부른다. 그것은 산꼭대기 평평한 단애 위에 가학루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산 위에 이렇게 넓은 평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는 먼저 가학루에 올라 선비들의 풍류를 느끼고 향교를 살펴보려고 한다. 가학루는 향교 앞에 세워진 누정으로 1403년(태종 3년) 황간현감 하담(河澹)이 세웠다.


경상도 관찰사 남재(南在)가 학을 타고 나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가학루라 이름 지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첨(李詹)이 쓴 '가학루기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가학루는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광해군 때인 1622년 현감 손번(孫蕃)이 다시 세웠다. 그 후 퇴락하고 헐어진 것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1929년 군수 전석영(全錫泳)에 의해 다섯 번째 중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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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루의 시문 ⓒ 이상기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형 누각으로, 1층을 난간형식으로 만들어 그 위용은 덜한 편이다. 가학루에는 기문 외에 수많은 시문이 걸려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다. 그는 맑고 경치 좋은 황간땅 가학루에 올라 굴원의 부(賦) <원유>편을 노래한다.

황간은 참으로 맑은 경치 뛰어나       黃州儘淸絶
가려다가 다시 더 머무른다네.          欲往更遲留
학은 갔으나 누각은 남아                 鶴去樓仍在
산은 높고 물은 절로 흐르는구나.      山高水自流
나는 새의 등을 굽어보면서              俯看飛鳥背
곧장 큰 자라 머리 위로 오르니         直上巨鼇頭
높은 데 오른 흥취 그지없어             袞袞登臨興
굴원의 원유편을 한참동안 읊조린다. 長歌賦遠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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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루에서 바라 본 황간면 소재지 ⓒ 이상기


이곳 가학루에서는 지나온 추풍령 쪽으로의 조망이 시원하고, 앞으로 갈 황간 쪽으로의 조망도 좋은 편이다. 추풍령 쪽 너른 들판과 우뚝우뚝한 산은 호연지기를 길러주고, 황간 쪽 면소재지의 오밀조밀한 건물들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정을 느끼게 해준다. 황간은 예로부터 추풍령 너머 첫 고을로 경상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리고 높은 산 맑은 물 사이 농토가 비교적 넓어 인심이 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황간 향교는 또 어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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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 향교 명륜당 ⓒ 이상기


가학루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교로 향하게 된다. 밭을 사이에 두고 언덕 위에 향교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황간 향교는 다른 향교와 마찬가지로 전학후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언덕 형태의 지형을 따라 아랫부분에 명륜당이 있고, 윗부분에 대성전이 있다. 명륜당은 5칸의 팔작지붕 건물이고, 대성전은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황간 향교는 조선시대 처음 만들어졌다. 1394년(태조 3년)에 황간현의 뒷산에 지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66년(현종 7년) 서쪽의 토성 안으로 옮겨 다시 지어졌다. 그 후 1752년(영조 28년)과 대한제국 시기인 1901년 크게 중수하였다. 현재의 향교는 1978년부터 1981년 사이 다시 중수한 것이다. 일부 주춧돌에 연꽃무늬 장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절에서 가지고 온 돌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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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향교 대성전 ⓒ 이상기


현재 향교는 교육기능은 사라지고 오로지 제사기능만 수행하고 있다. 봄가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더욱이 황간현이 면으로 격하되면서 위상도 추락하고 인구도 줄어들어 향교를 찾는 사람도 줄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나마 황간 향교에는 고직사가 있어 관리를 하기 때문에 현상유지는 되고 있다. 고직사 관리인은 향교 주변에 있는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노근리로 가는 길은 4번 국도를 따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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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면 소재지 풍경 ⓒ 이상기


향교를 내려오면 길은 다시 초강천 북쪽을 따라 서쪽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황간초등학교를 지나 다리를 건너 황간면 소재지로 들어선다. 길은 다시 4번 국도와 만난다. 이 국도는 황간면 소재지를 동서로 관통하며 영동황간로라 불린다. 우리는 서쪽 노근리 방향으로 계속 걸어간다. 옥포 삼거리에서 49번 지방도가 남북으로 갈리고, 길은 황간 나들목 방향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황간역과 황간우체국을 지나 계속 서쪽으로 나간다. 우리는 이제 마산리에 도착한다. 마산리에는 싱크대를 생산하는 에넥스 공장이 있다. 마산 삼거리에서 4번 국도를 계속 따라가면 노근리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초강천변의 월류봉과 월류정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우리의 목적지 노근리까지는 2.5㎞쯤 된다. 그리고 월류정까지도 2.5㎞쯤 된다.

저녁식사 덕에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월류봉과 월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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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류봉과 월류정 ⓒ 이상기


우리는 월류정을 보지 못하고 노근리로 갔지만, 다행히 월류정 앞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해서 월류봉과 월류정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우리를 저녁에 이곳으로 안내한 사람은 손문규 도의원이다. 그는 현재 황간면을 포함한 영동군 제2지구를 지역구로 하고 있다. 월류봉 가는 길은 초강천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다. 원촌리 마을회관쯤에 이르니 월류봉의 장관과 월류정의 고고함이 전면에 펼쳐진다.

월류봉(月留峰)은 추풍령쪽에서 바라볼 때 사형제봉으로 보이던 그 산이다. 월류봉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소나무와 활엽수가 이불처럼 덮여 있다. 그래서 웅장함과 수려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월류봉은 말 그대로 달이 머물러가는 봉우리다. 봉우리를 이루는 층암절벽을 초강천이 휘감아 돌면서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월류봉은 한천팔경(寒泉八景) 중 제1경이다. 한천이라는 말은 이곳의 물이 차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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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류봉 ⓒ 이상기


해마다 가을이면 월류봉 달빛 한마당 행사가 원촌리에서 열린다. 지난 10월 4회째 행사를 치뤘다. 월류봉을 읊은 시로는 조선 후기의 선비 일석 박유동(朴惟東)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그는 이 시에서 월류봉에 살았던 선계의 학(仙禽)과 한천에 사는 신룡(神龍)을 노래했다. 박유동은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중봉 조헌의 생질이다. 그는 충주 박씨로 이곳 황간에 태어났으며 참봉을 지냈다.      

월류봉은 끊어진 듯 다시 이어지고               月留峰形斷復連
화헌악 아래 흐르는 물 반석을 휘감았네.       花軒水勢更盤旋
푸른 산양벽은 마치 비혈처럼 보이는데         山羊綠壁如飛穴
고을 원님은 묏부리 올라 두견새 되려하네.    縣主登岑學化鵑
옛터에 암자는 사라져 법만 남았고               菴廢法存餘古址
옛사람의 글과 글씨는 한천을 생각나게 하네. 書編思錄憶寒泉
선학은 날아갔으나 오히려 구름은 남고         仙禽一去雲猶在
어찌된 일인지 신룡은 못 속에 잠겨있네.       何事神龍久蟄淵

한천정사에는 우암 송시열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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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정사 ⓒ 이상기


1672년 3월에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월류봉의 한천에 잠시 머문 적이 있다. 그 후 우암의 제사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한천서원(寒泉書院)이 세워졌으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그 서원은 철거되었다. 그러다가 이곳의 유림들이 1910년 한천정사를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천정사는 건축양식에서 조선 후기의 기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이곳 한천정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우암 송선생 유허비가 있다.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잠시 머무른 것을 기념하여 정조 3년(1779)에 세워졌다. 우암 선생은 한천팔경의 하나인 이곳에 초당을 짓고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유허비를 보고 나오니 월류봉에 어둠이 깔렸다. 서쪽 하늘에는 초엿새 초승달이 높이 솟아올라 있다.
#황간면 #가학루 #향교 #월류봉 #한천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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