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진.
조을영
밤새 불을 켰다 껐다, 들락날락 하던 수다쟁이들은 새벽녘에야 겨우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역시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룸은 여럿이 와서 떠드는 장소일 뿐 잠을 자기 위한 곳은 못되는 듯했다. 다들 끼리끼리는 일행인 듯 한데 낯선 데 오자마자 이웃한 이들과도 친해져서 또 다른 무리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하여간 어려서 좋은 점은 아무하고나 막 트고 지낼 수 있는 여유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었다.
1층 주방에서 쥬스, 토스트, 버터, 반숙계란 후라이로 조식을 차려 먹고 나자, 바닷바람을 옷깃에 잔뜩 품은 외국인들이 들어섰다. 묵직한 배낭과 지도를 펼쳐든 그들이 어제의 나처럼 삶의 여백을 비집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해운대의 아침을 뚫고 새 목적지를 향해간다.
여행이란 삶의 과정과도 비슷하다고나 할까? 가는 동안에는 여정도 수없이 바뀌고 감흥도 식었다 타올랐다 변화무쌍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러나 다음 목적지를 향해가려면 그 과정도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측면에서 인생과 여행은 별반 다르지 않다. 때로 지치기도 하지만 그저 묵묵히 가다보면 결국은 도착하는 것, 꾀도 게으름도 통용되지 않는 것. 그것이 여행과 인생의 닮은 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지나 도착한 주문진. 바람 한 점 없는 여름의 항구에는 유달리 갈매기들이 낮게 날고 있었다. 적당히 삶에 때 묻히고 적당한 우울과 체념으로 열망에 대해 눈감아버린 육십 줄의 늙은이처럼 항구는 그렇게 앉아있었다. 낮게 나는 갈매기들만이 오후의 바다 위를 배회하는 것이, 어쩐지 여행자의 모습과도 닮아있었다. 무료한 여름이 퍽이나 지겨워 죽겠단 듯이 하품을 하던 회집 여자는 때 아니게 들어선 점심 손님에 희희낙락해진다.
이윽고 탁자 위로 실낱같이 가늘게 채 썬 오징어 회와 양념장과 채소과 차려졌다. 혀끝에서 야들하게 녹아내리며 여름날의 새큼한 과실 향 같은 게 스치는 우럭회는 운치로 먹는다 해야겠고, 봄 내내 쑥국을 끓여보리라 결심만 하게 만들었던 도다리회는 뭉큰하고 쫄깃한 식감이 퍽이나 만족스러웠다. 뒤쪽 테이블에선 서울 말씨의 살집 두툼한 여자 일행이 남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징어회가 너무 맛있다며 대포 같은 웃음을 와르르 쏟아냈다. 거나하게 낮술이 들어가서인지 우람한 목소리는 주문진 항구위로 쏟아내는 생선들의 힘찬 몸짓과도 닮아있었다.
그것과 흡사하게 강원도의 여름은 싱싱한 진초록의 나뭇잎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로수 아래로 '감자떡, 옥수수, 메밀묵'이란 글씨가 빼뚜름이 써진 간판들이 졸졸이 달린 가게들에는 시커먼 얼굴을 한 여자들이 연신 부채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어쩌다 '감자떡이나 어디 한번' 하고 다가서면 손님이 도망갈세라 솥뚜껑을 열어젖히며 방금 찐 것이란 말에 유독 힘을 준다. 뜨끈한 것을 한 입 베물고 고랭지 배추가 잔뜩 푸른빛을 뿜어내는 언덕을 돌고 돌아 양양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