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시 임피면 읍내리 채만식 생가.(2008년 12월 촬영)
조종안
채만식(蔡萬植)은 1902년 7월 21일(양력) 전북 옥구군(지금의 군산시) 임피면 취산리에서 아버지 채규섭과 어머니 조우섭 사이에서 6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9남매였으나 누나 둘과 동생 하나는 어렸을 때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중앙고보 3학년 재학(1920) 중 급히 다녀가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와 부모가 정해놓은 한 살 연상의 규수 은선홍을 아내로 맞이한다. 채만식의 순탄치 않은 인생은 운명적인 결혼과 함께 시작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처지가 소설 <탁류>의 주인공 초봉이와 비슷하다.
"그럼 절더러 물어보아서 제(초봉이)가 싫다면 이 혼인을 작파하실려우?" 유 씨는 그저 지날말 같이 웃음엣 말같이 한 말이지만, 은연중에 남편(정주사)을 꼬집는 속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변 유 씨가 자기 자신한테도 일반으로 마음 결리는 데가 없지 못해서 말이다. "제가 무얼 알아서 싫구 말구 할게 있나?···· 에비 애미가 조옴 알아서 다아 제 배필을 골랐으리라구" (공종구의 <탁류> 196~197쪽)1920년대는 식민지 조선에 '문화', '연애', '개조' 등의 신조어가 유행했던 시기로 채만식은 여성의 외모를 무척 중요시했으며 신여성과의 자유연애를 꿈꾸었다 한다. 그럼에도 창졸간에 혼인해서 2남 1녀를 두었으나 부인과 금실은 소원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훗날 주변 사람들에게 "이게 어디 아버지가 며느리를 본 것이지, 아들이 장가를 간 것이냐,"고 털어놓는 대목에서도 가부장적 부모에 대한 불만이 잘 나타난다.
공 교수는 "채만식 문학은 '전통 가부장적 가정'과 '그릇된 자본주의 의식'을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비판하고 있다"며 "소설 <탁류>에서 채만식의 작가 의식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인물로 초봉이 혼인 소식을 듣고 분노를 터뜨렸던 남승재와 계봉이, 그리고 미두장"을 꼽았다.
이어 공 교수는 "일제가 문화통치를 시작하던 1920년대는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는 말이 있듯 돈 중심 사회로 전환하던 시기로 채만식의 소설도 대부분 돈 때문에 딸을 팔거나 인간성을 파괴하는 군상들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채만식이 마지막 선보인 작품도 고전을 윤색한 <심청전>이었다는 것.
"채만식도 친일작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그러나..."공 교수는 "일제 식민지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일제의 부당한 식민통치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고발하고, 증언했어야 했다"며 "스스로 일제에 편입한 부류도 있었으나,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가혹한 폭력과 검열로 적잖은 작가가 그렇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채만식이 본격적인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로 선언하고, 마지막 직장인 <조선일보>를 퇴사한 뒤 거주지를 가족과 함께 개성으로 옮긴 1936년은 만주사변(1931)을 시작으로 15년 전쟁이 파국으로 치닫는 변곡점을 형성한 중일전쟁(1937)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공 교수는 "1936년은 황국식민화론(내선일체)과 대동아공영권, 전쟁동원령을 축으로 천황제 파시즘의 집단적 광기가 정점을 향해 치달으며, 시국에 적극적인 협력을 강요하는 창작 지침이 구체적인 수준으로 하달되던 시기로 상당수 작가가 친일로 들어서게 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