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길이 채소밭으로 쓰이고, 한 젊은이는 여장 위에 올라 더위를 식힙니다. 아, 성곽길 곁에 산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절감하는 순간, 여행자들 한마디씩 뱉습니다. “이런데도 있네.”
최방식
남산서 흘러내린 도성 개울물을 빼내던 이간수문(二間水門)을 거쳐 평화시장. 섬유·봉제인들의 일터와 주변을 꿰찬 재벌·대기업들의 '첨탑건물'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가지각색의 동대문표 의류 속에 살아난 전태일을 잠시 보다, 청계천 다리 위 세워놓은 추모동상에 잠시 입맞춤을 해봅니다.
평화시장 한쪽에는 고서점들이 늘어섰습니다. 늘 새 것만을 찾는 세태를 되돌아보게 하죠. 낯선 도시를 적잖게 여행한 편인데, 새 도시를 갈 때마다 벼룩시장을 들릅니다. 뉴욕·파리, 그리고 서울에서도 풍물시장이 늘 붐비는 걸 보면, 건 기자만의 취향은 아닌 모양입니다.
맘이 편해지고, 그 도시 문화역사 향기를 느낄 수 있어서 그럴까요? 낡은 건 버릴 게 아니라 간직하고 활용하는 지혜를 가르쳐주니까요. 아버지가 입던 옷, 이웃이 쓰던 물건을 건네받을 때면 "뭐, 이런 꼬질꼬질 한 걸 다... 버리라"고 했던 기억뿐인데 '헌 것 향기' 운운하는 걸 보니 나이가 드는 모양입니다. 늦게 철이 들었거나?
걷기를 멈추고 잠시 허기진 배를 채우기로 했습니다. 동대문의 유명한 닭칼국수로 의견일치. 식당 하나를 골라 들어서는데, 웬 카메라맨(무비)이 다가옵니다. 케이블채널이라며 취재를 하겠답니다. 프랑스인이 있어 흥미로웠던 모양. "닭이 맛있다, 칼국수는 더 맛있다"고 사실과는 좀 거리가 있는 찬사를 남발하며 1시간여를 먹고 놀았습니다.
막 일어서는데 프랑스인 다비드가 커피에 초콜릿을 배낭에서 꺼냅니다. 진한 맛이 스페인의 어느 시골 카페에서 느꼈던 그 에스프레소 맛입니다. 초콜릿까지 즐기며 그에게 "복 받을 겨"를 외치고 다시 걷기를 10분. 흥인지문입니다. 안내소를 찾으니 성곽길지도와 순례인증이 있습니다. "참 잘했어요" 도장처럼 생겼는데, 문구는 없고 잘생긴 선비 그림.
다비드 커피에 에스프레소, "복 받을 겨"동서남북의 음향오행과 풍수를 봤습니다. 해가 떠오르는 동, 어둠이 찾아오는 서, 햇볕이 드는 남, 차가운 기운의 북. 인의예지(신)를 따 좌청룡-흥인(지)문, 우백호-돈의문, 남주작-숭례문, 북현무-숙정문(넘어 홍지문)도 탄생했다죠. 인왕산(338미터)에 비해 낙산(125미터)이 낮아 비보(裨補, 기를 보강)를 한 게 첨자(갈지, 之). 옹성(성문 둘레로 작은 울타리성)도 그래서 쌓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