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이 절터요, 절터가 밭이라

[폐사지 답사1번지 ①] 흥법사지

등록 2012.07.20 09:59수정 2012.07.2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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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답사 1번지는 누구나 알테고, 그럼 폐사지 답사 1번지는 어딜까? 두메산골에 있어 폐사지 다운 폐사지로는 선림원터가 1번지요, 유물과 사격(寺格)으로 치면 합천 영암사터가 제일이다. 그리고 최고의 번영기를 맞다가 철저히 파괴되는 드라마틱한 역사를 가진 폐사지로는 양주의 회암사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남한강변에 흩어져 있는 폐사지는 제일은 아니더라도 이 모두를 갖추고 있어 과연 폐사지 1번지라 불러도 탓할 사람이 없다.

남한강변 폐사지는 여주 고달사터에서 시작하여 섬강 가에 있는 흥법사터, 남한강변의 법천사터와 거돈사터를 거쳐 충주의 청룡사터로 이어진다. 거돈사터는 지금은 선림원터보다 더 접근하기 어렵고 유물로 치자면 법천사터에 있는 지광국사 부도비를 따를 유물이 없으며 각 절마다 흥망성쇠의 드라마틱한 역사를 갖고 있으니 과연 폐사지 답사의 1번지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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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답사1번지 여주 고달사터에서 시작하여 충주 청룡사터로 이어지는 남한강변에 흩어져 있는 폐사지들은 폐사지답사1번지라 불릴만하다 ⓒ 김정봉


부지런을 떨면 하루에 다섯 군데 폐사지를 다 돌아볼 수 있지만 좀 게으름을 피다보면 여주와 충주에 있는 곳을 포기해야 한다. 남한강변에 있는 세군데 폐사지는 느긋하게 하루에 갔다 올 수 있다. 이번 답사에는 섬강과 남한강변에 있는 흥법사터, 법천사터, 거돈사터를 중심으로 하였다.

밭이 절터요, 절터가 밭인 흥법사터

흥법사터는 섬강을 곁에 두고 있다. 강릉행 버스창가로 아스라이 보이는 섬강은 얼마나 살가운지 바로 차에서 내려 백사장을 거닐고 싶어진다. 듬성듬성 자란 수초며,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모래, 실바람에 살랑거리는 물결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흥법사는 이런 섬강을 내려다보고 1000년 세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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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법사터 정경 눈은 섬강을 거쳐 희미한 산봉우리를 타고 치악에 닿는다 ⓒ 김정봉


산줄기가 강물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곳, 야트막한 언덕에 둥지를 튼 흥법사터,  뒤로는 이름부터 영험하게 들리는 영봉산이 둘러쳐있고 앞에는 섬강이 흐르니 명당 중에 명당이다. 멀리는 치악산까지 보이니 전망 또한 더할 나위 없다. 절터 위에 농가 한 채가 절 요사(寮舍)처럼 있다. 밭과 절터가 서로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어 밭 울타리 따라 절터는 나뉘어 있다. 밭이 절터요, 절터가 밭이다. 그 사이에서 옥수수만 무심히 영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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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법사터 정경 예전엔 모두 절터였던 밭이 이제는 절터의 주인이 되었다. 밭에는 주인행세하며 옥수수가 무심히 영글고 있다 ⓒ 김정봉


원래 이 절은 삼층석탑 앞에서 영봉산 자락까지 뻗어 있는 큰 절이었다. 지금도 영봉산 자락에 축대가 남아 있고 삼층석탑 앞에 긴 축대가 확연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언덕 위 농가주변에 석축의 흔적이 있어 흥법사는 영봉산 자락 따라 몇 단의 축대를 쌓아 만든 거대한 산사(山寺)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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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법사터 축대 영봉산자락에서 이 축대가 있는 곳까지 모두 절터였다. 축대 위에 삼층석탑이 있는데 옥수숫대가 가리고 있다 ⓒ 김정봉


절터는 쪼그라들고 남아 있는 유물이라고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뿐이다. 절의 창건연대는 확실치가 않으나 진공대사의 부도비로 통일신라말기로 추정한다. 진공대사는 경문왕9년(869년)에 태어나, 당나라에 유학한 후 왕건이 고려를 세운 918년에 귀국했다. 태조는 진공대사를 왕사로 임명하고 흥법사를 중건해주었다.

태조는 선종승려의 폭넓은 지지로 후삼국을 통일했고 건국 이후에도 왕권강화를 위해 여러 곳에 선문사원(禪門寺院)을 건립하거나 중건해주었으니 흥법사도 그 중 하나였다. 진공대사가 입적하였을 때 비문을 지어주고 당태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부도비를 만들어주는 등 대사에 대한 태조의 정은 각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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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대사부도비의 귀부와 이수 진공대사에 대한 고려 태조의 정은 각별했다 ⓒ 김정봉


진공대사와 여주에 있는 고달사터의 원종대사는 공통점이 많다. 같은 해에 태어났고 모두 당나라에 유학했으며 원종대사가 3년 늦게 귀국하여 귀국한 시점도 비슷하다. 원종대사가  고달사터에 돌아온 해는 대략 924년 이후로 추정되는데 이때는 진공대사가 흥법사에 주재한 것으로 짐작되어 두 분의 인연은 깊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고달사지와 흥법사터는 20km 정도 떨어져 있으니 반나절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고달사는 구산선문중 봉림산파의 선사(禪寺)이면서 원종대사 때에 전국 제일의 선원(禪院)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진공대사 또한 봉림산파에 소속된 스님으로서 두 분 모두 선종으로 같은 종파였다. 그 당시 여주에는 고달선원, 원주에는 흥법선원의 양대 선종사찰이 존재했다.

더 깊은 인연은 학자에게 남기고 이 정도 추정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석물만 덩그러니 남겨있는 폐사지는 흰 도화지와 같다. 여기에 추가로 그림을 그려 넣고 채색하는 것은 답사객의 몫이다. 이것이 폐사지가 주는 즐거움 중에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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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대사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 흥법사터의 것과 닮았다 ⓒ 김정봉


폐사지에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는 얼핏 보면 거의 비슷하게 보인다. 자세히 봐야 차이점이 드러나는데 귀부의 꼬리는 어떻게 말렸는지, 발은 웅크리고 있는지 폈는지, 용의 머리는 다물었는지, 거북등의 무늬는 어떤지, 운룡(雲龍)의 조각 깊이와 솜씨는 어떤지, 보존 상태는 어떤지 등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보면 거북등무늬와 발과 귀 모양이 약간 다를 뿐, 원종대사의 귀부와 이수가 진공대사의 것과 많이 닮아 있다. 이 또한 두 분의 연을 짐작할 수 있는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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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대사부도비의 귀부와 이수 고달사터의 것과 닮았다 ⓒ 김정봉


진공대사 부도비 이수 정면에는 '진공대사(眞空大師)'라는 '이름표'(전액篆額)를 달고 있다. 이수의 운룡은 6마리로 보이는 용들이 겨울잠을 끝내고 용트림하듯 서로 꼬여 엉켜있다. 귀부의 발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듯 앞을 꾹 누르고 있고 꼬리는 성난 꼬리는 아니어서 옆으로 처져있다. 입은 살짝 벌려 여의주를 물고 있고 코에서는 콧김이 나올 듯하다. 휘둥그레 뜨고 있는 눈은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 나올 듯하다.

그래도 삼층석탑이 있어 이수를 짊어지고 있는 돌거북은 외롭지 않다. 석탑의 기단일부가 깨지고 지붕돌은 뭉개져있으며 우주와 면석은 새것으로 교체돼있어 볼품없지만 가까이 섬강에서 멀리는 치악산을 품에 안고 뒷산 영봉산을 가르고 있으니 당당함과 도도함은 나무랄 데 없다. 옹색한 터에 홀로 무심히 서 있는 탑과 탑이 향하고 있는 풍광을 하염없이 바라다보고 있으면 이 탑은 볼품없는 석물이 아니라 보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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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법사터 삼층석탑 깨지고 뭉개졌어도 당당하고 도도하다 ⓒ 김정봉


답사는 서울로 이어진다. 용산 중앙박물관 뜰에 진공대사의 부도와 돌함 그리고 염거화상탑이 보존되어있다. 염거화상탑은 흥법사에 있었다고 전하여지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래서 이름도 '전(傳)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이라 한다. 고유섭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쓴 고려의 부도미술편에 "흥법사의 염거부도는 부도 형식의 시초를 낸 것이요"라고 쓰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염거화상부도는 흥법사에 있었던 것이 사실일지 모른다. 이 부분은 전문가에 의해 빨리 밝혀져야 할 부분이고 우리가 그림을 그리고 채색할 부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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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거화상탑 ‘전(傳)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연구에 의해 빨리 ‘전(傳)’자가 빠졌으면 한다 ⓒ 김정봉


진공대사의 부도는 태조의 각별한 정이 담겨 있는 듯 운룡의 조각은 깊고 섬세하다. 깊고 섬세한 것이 현지에 있는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의 조각 스타일과 통한다. 같이 쌍을 이루지 못하고 떨어져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부도 옆에는 뚜껑이 온전한 돌함이 있는데 매우 희귀한 예이다. 과천 보광사 삼층석탑 옆에 돌함이 있는 예가 있고 장례문화로 뼈단지를 담는 돌함의 예가 있어 석관(stone coffin)으로 볼 수도 있고 경문이나 유물 등 소중한 것을 담는 함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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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대사 부도와 돌함 부도와 돌함이 같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 김정봉


아무리 훌륭한 미술품이라 해도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10점 만점에 5점이다. 깨지고 해지더라도 유물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 풍해로 인한 손상은 사람이 만들어낸 재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1000년을 견뎌온 석물이다. 정치적 이유든 전쟁이든, 인위적인 훼손만 없다면 앞으로 1000년, 2000년 오래 보존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폐사지 #흥법사터 #법천사터 #거돈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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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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