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에 가거든 '뒷간'에 가봐야 하는 까닭

[포토에세이] 순천 선암사 해우소로 말하자면...

등록 2012.07.22 21:23수정 2012.07.22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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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 ⓒ 김당


"사돈집과 뒷간은 멀어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돈 간에는 말이 나돌기 쉽고 뒷간은 고약한 냄새가 나므로 멀수록 좋다는 선조의 지혜가 담긴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 형편은 어디 그렇습니까? 오히려 "뒷간과 사돈집은 가까워야 한다"로 바뀌어야 할 정도입니다.

왜냐고요? 예전에는 대가족 시절에 친인척이 많다보니 '사돈네 팔촌' 쯤으로 사돈네를 멀리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집집마다 자녀를 한두 명밖에 두지 않기 때문에 고모나 이모네 사촌은커녕 사돈네 식구 말고는 인척을 찾기도 힘든 실정입니다. 그러니 가까이할 수밖에요.

뒷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리적 현상을 남몰래 처리하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욕실 문화가 발달하고 가족 간에도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중요해짐에 따라 이름부터 화장실(化粧室)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볼일'만 보던 변소(便所)에서 화장을 하는 예쁜 방으로 둔갑한 뒷간은 수세식 양변기를 앞세워 집안으로 들어오더니, 이제는 엎드리면 코가 닿을 작은 평수 아파트에도 안방에 딸린 부부용과 손님용으로 2개가 달려야 정상입니다.

선암사 뒷간에 대한 '전설적인 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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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 뒷간의 편액. ⓒ 김당


바로 그 냄새나는 뒷간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는 전라도 사람들은 '뻥'이 셉니다. 전라도에서는 고장마다의 특색을 강조하면서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여수에 가서는 돈 자랑하지 말고, 순천에 가서는 인물 자랑하지 말고, 벌교(보성)에 가서는 주먹 자랑하지 말라."

그밖의 지역 특색을 가리키는 말도 많이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뻥'은 "광양 사람들은 고춧가루 서 말을 메고 물길 30리를 간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광양 사람들의 끈기와 오기가 세다는 얘기입니다. 오래 전에 월간 <신동아>에서 지리지를 연재하면서 행정구역 군(郡) 단위에서 5급 공무원 이상 공직자가 가장 많이 배출된 곳은 광양군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온 적이 있는데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뻥'으로 말하자면, 면벽수도 하는 절집 사람들도 여간이 아닙니다. 하긴 스님들도 사람인데 동안거(冬安居)니 하안거(夏安居)니 하면서 두문불출하고 묵언수행 하려면 얼마니 좀이 좀 쑤시겠습니까. 그러니 안거에서 해방되면 오랫동안 눌러서 참았던 방귀가 터지듯, '초'를 듬뿍 친 방언이 쏟아지는 것이 절집의 인지상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뻥'도 다음과 같은 '전설적인 뻥'에 비하면 족탈불급(足脫不及)일 것입니다.

"정월 초하룻날 똥을 싸면 그 떨어지는 소리가 섣달 그믐날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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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뒷간. ⓒ 문화재청


그만큼 순천 선암사(仙巖寺) 뒷간은 태평양의 마리아나 해구(海溝)처럼 하염없이 깊다는 얘기입니다. 이 뒷간은 문화재청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4호 순천 선암사 측간(厠間)'으로 등록돼 있습니다. 이 뒷간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1920년 이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또 전남 지방에서 평면구성을 하고 있는 측간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선암사 뒷간보다 오래된 '영월 보덕사 해우소'

문화재청 해설자료에 따르면, 이 건물은 앞면 6칸, 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바람을 막을 수 있는 풍판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정(丁)자 모양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이 건물은 북쪽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남자(왼쪽)와 여자(오른쪽)가 사용하는 칸이 양옆으로 분리되어 있어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보기 드문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또 출입구에 설치된 풍판(風板, 비바람을 막으려고 길이로 잇댄 널판지)은 이 건물의 특징으로, 풍판 아래 부분의 가운데와 양 끝을 약간 들린 곡선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이렇게 곡선으로 처리된 입구의 모습은 아름다운 곡선미를 보여주는 한편, 드나드는 사람의 머리높이를 생각해 배려한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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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에 오는 객승이나 신도들이 묵는 객사인 해천당(海川堂). ⓒ 김당


범종루와 절에 오는 객승이나 신도들이 묵는 객사인 해천당(海川堂) 사이의 지형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해 상부층과 하부층으로 지혜롭게 분리하여 이 건물을 지었답니다. 건물의 짜임새도 튼튼하고 옛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그 보존 상태 또한 비교적 좋은 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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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영월 보덕사 해우소 전경, 내부, 내부 칸막이, 변기 모습. ⓒ 문화재청


선암사 측간처럼 문화재자료로 등록된 절집 측간으로는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월 보덕사 해우소'가 있습니다. 전통적 형식을 지닌 보덕사 해우소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2층 누각식 건물입니다. 앞뒤 2열로 나누어 각각 6칸씩의 대변소를 배치하여 남녀의 사용을 구분하면서 12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건물인데 요사채에서 달랑 떨어져 있어 선암사 뒷간 같은 운치감은 떨어집니다.

'환원과 비움'의 철학으로 세계를 매료시킨 선암사 뒷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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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 뒷간. ⓒ 김당


고향 집에서 가까워 송광사와 선암사를 가끔 가는 편인데, 2009년 5월 초파일을 앞두고 카메라를 메고 선암사에 갔을 때는 뒷간이 하필 수리 중이었습니다. 편액에는 'ㅺㅏㄴ뒤'로 표기되어 있지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합니다. 사이시옷이 '간'의 ㄱ자 앞에 쓰인 것은 조선시대의 사이시옷 표기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오래된 절집 뒷간을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남녀의 공간만 유별할 뿐, 개인의 공간은 막힘이 없는 '앞트임' 방식이어서 여간 꺼림칙한 것이 아닙니다. 칸막이가 되어 있기는 하나 아이들이라면 몰라도 어른들이 들어서면 볼일 보는 사람과 눈이 딱 마주칠 정도로 그 높이가 낮기 때문입니다.

또 이른바 '푸세식 측간'을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가장 큰 두려움은 근심을 해소하려고 해우소(解憂所)에 갔는데 정작 볼 일을 보다가 똥물이 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그런데 선암사 뒷간은 전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월 초하룻날 똥을 싸면 그 떨어지는 소리가 섣달 그믐날 들린다는데, 혹시 1년 뒤에 다시 가면 모를까,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또 2층으로 돼 있는 선암사 뒷간은 자연 순환을 위해 아래층에 재와 볏짚을 깔아두었기 때문에 위로 튈 일도 없답니다. 예로부터 부지런한 농사꾼은 이웃집에 갔다가도 볼 일이 생기면 일부러 자기집으로 와서 볼 일을 봤다고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먹고 싸기 마련인데 그것이 다시 거름이 되어 음식으로 돌아오는 자연의 순환고리로 보면 당연한 처리법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선암사 뒷간은 세계를 매료시킨 바 있습니다. 180년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 첼시 플라워쇼는 지난해에 선암사의 전통화장실을 소재로 한 작품에 최고상이라는 영예를 안겼습니다. 설치미술가 황지해 작가가 출품한 '해우소 가는 길'이 한국 전통화장실이 지닌 '생명의 환원'과 '비움'이라는 철학적인 소재를 한국의 토종 식재를 이용해 정원 디자인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평가받은 것이 그것입니다.

해우소에서 주의할 점 - 힘쓰는 소리를 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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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의 선승들이 지켜야할 모든 것을 담은 <선원청규>. ⓒ 김당


그러나 근심을 푸는 곳인 해우소에서도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머리를 숙여 아래를 보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낙서하거나 침을 뱉지 말아야 하며, 힘 쓰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외우고자 하는 게송이 있다면 외웁니다. 넷째, 용변을 마친 뒤에는 반드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나옵니다. 다섯째, 손을 씻기 전에는 다른 물건을 만지지 말아야 합니다.

선암사는 조계종이 아닌 태고종림 소속입니다만, 지난 2010년 11월 대한불교 조계종은 선승들이 지켜야할 모든 것을 담은 <선원청규>를 발간한 바 있습니다. 거기에는 선원 식당작법과 요사수칙, 법당수칙, 삭발ㆍ목욕수칙 등 선원일상 속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규율이 낱낱이 정해져 있는데, 이렇게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해우소수칙도 있답니다.

▲힘쓰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칸막이나 문 너머로 다른 사람과 말하며 웃지 말아야 한다 ▲해우소 안에 사람이 있는데 헛기침을 하거나 자주 노크를 해서 빨리 나오도록 재촉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런 해우소 수칙을 지키지 않는 스님들이 있나봅니다. 선암사 뒷간을 소재로 한 텔레비전 광고에서는 큰스님이 '큰일'을 보는데 동자승이 뒷물로 쓸 대야를 들고 있다가 큰스님의 '끙' 하는 소리와 함께 풒잎의 이슬이 떨어지면서 동자승이 달려가는 모습이거든요.

다행히(?) 해우소에서 울지 말라는 수칙은 없네요. 정호승 시인은 눈물이 나면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고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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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의 등 굽은 소나무. ⓒ 김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 앞/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정호승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혹여 올 여름 휴가에 여수 엑스포에 가시거든 가까운 선암사에도 들르십시오. 선암사에 가시거든 꼭 뒷간을 찾아 엉덩이 까고 쭈그려 앉아 문 틈새 사이로 목어(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바람소리와, '끙' 하는 소리에 등 굽은 소나무에 앉은 동박새가 놀라 우짖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여수 엑스포 #순천 선암사 #해우소 #뒷간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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