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 있는 교사보다 옷 잘 입는 교사가 더 인기?

[학생부장 일기 21] 아이들의 명품 선호, 이대로 괜찮을까

등록 2012.07.24 12:10수정 2012.08.24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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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학생부라기보다 '분실물 신고 센터'라 해야 할 것 같다. 웬걸, 하루가 멀다고 물건을 잃어버렸다며 하소연하는 아이들로 교무실은 늘 북새통인데, 스스로 간수를 못한 탓이라며 자책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누군가 몰래 훔쳐간 것이라면서 도둑을 잡아달라고 떼쓰기 일쑤다.

솔직히 교사로서 짜증은 나지만 물건을 잃어버려 속상해 하는 아이 앞에서 표현할 수는 없는 노릇, 우선은 하소연을 들어주어야 한다. 신고를 해봐야 열에 하나 꼴이 안 될 만큼 되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잃어버린 물건의 이름과 시간, 장소 등을 꼼꼼히 받아 적는 건 속상해 하는 마음을 달래주려는 뜻이다.

옛날이야 참고서와 노트 같은 게 고작이었지만, 시대가 변한 탓인지 요즘엔 단연 스마트폰과 지갑, 가방 등이 주류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아이들에게 굳이 필요할까 싶은 물건들도 있고, 필수품이라고 해도 몇 십만 원을 호가하는 값비싼 것들이 제법 많다. 얼마 전까지 고가의 스마트폰 소유 경쟁이 불 붙더니 이젠 '명품'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수십만 원짜리 가방과 지갑... '명품'에 목매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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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 입은 학생들의 모습. 시트콥 <스탠바이>의 한 장면. ⓒ MBC


돌체앤가바나, 엠시엠, 페라가모, 키플링, 루이까또즈, 메트로시티… 요즘 들어 신고접수대장에 부쩍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들이다. 워낙 낯선 외국어 이름들이라 처음엔 받아 적기조차 어려웠는데, 가격이 얼마인지 듣고 나니 절대 잊히지 않는 이름이 됐다. 아이들은 학급마다 '명품족'이 몇 명인지 대개 알고 있었다.

하나 같이 지갑과 가방들이다. 등하교 때 쓸 교통카드와 지폐 몇 장이 고작일 텐데, 그렇게 값비싼 지갑을 지니려는 이유가 뭘까. 또 교실마다 개인 사물함이 구비돼 있어 가방이 별 쓸모가 없다고 말할 지경인데, 아이들이 명품 가방에 목맨 까닭을 당최 이해할 수 없다. 어떻든 아이들의 '명품 사랑'은 이미 기성세대 못지않다.

자기 물건을 잃어버려도 명품이 아니면 신고조차 잘 하지 않을뿐더러, 찾으러 오는 아이들도 거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교내 분실물 보관함에는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물건들로 가득하다. 어디 하나 헤진 구석이 없는 운동화와 가방이, 충전만 하면 곧장 사용 가능한 흠집 하나 없는 2G폰이 수개월째 버려져 있다. 새 걸 구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잃어버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기실 도난 사건은 녹화된 CCTV 영상을 살펴보고, 의심되는 아이들의 소지품을 샅샅이 뒤져 범인을 색출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인권 침해 등 조사 단계의 위험 부담은 그만두고라도, 설령 일벌백계한다고 줄어들 것 같지도 않다. 아이들의 왜곡된 브랜드 선호 현상을 돌려세우지 않는 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수밖에 없다.

"선생님, 요즘 구세대와 신세대를 구분하는 새로운 기준을 알려드릴까요? 바로 명품 이름을 얼마나 줄줄 꿰고 있느냐에요. 아이들 사이에 요즘 뜨는 명품을 모르시는 선생님은, 인정하기 싫으시겠지만, 어느새 구세대가 된 거죠."

갓 마흔을 넘긴 처지에 명품 이름 모른다는 이유로 아이들로부터 졸지에 구세대로 낙인 찍혔지만, 이러한 분위기를 학교 홀로 막아내기란 역부족이다. 거칠게 말해서, 학교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도 사회는 물론, 가정조차도 나 몰라라 하거나 되레 아이들의 브랜드 선호 현상을 부추기고 있는 탓이다.

TV나 인터넷에선 광고의 홍수 속에 끊임없이 명품 소비를 부추기고, 자녀의 기를 살려주겠다며 무리를 해서라도 갖고 싶다는 걸 사주는 학부모들이 있는 한 학교는 도난 사건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곳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 간에 위화감 조성을 막기 위한 교복조차 가격대별로 서열화된 현실에서 더 말해 무엇할까.

"선생님, 애들이 좋아하는 명품 모르면 구세대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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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가득한 명품 구두들. 영화 <돈의 맛> 중 한 장면. ⓒ 휠므빠말


도난 사건이 너무 잦다 싶어 한 번은 수업시간에 '물신주의'를 주제로 아이들 간 토론을 시켜봤다. TV 광고를 문제 삼아, 기성세대의 명품 선호 현상을 짚어보고 빈번한 도난 사건을 함께 성찰해보자는 취지였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아무 말 없이 고급 승용차의 키(key)를 보여주었다"는 그 유명한 광고.

놀랍게도 대개의 아이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숫제 '그게 뭐 어때서'라는 표정이다. 잘 지내느냐는 질문에 요즘 고급 차 타고 다닐 만큼 '나 잘 나가'라는 답변일 뿐인데 뭐가 문제냐며 되레 반문했다. 그런 아이들 앞에서 페티시즘이 어떻고, 자본주의가 어떻고 하는 얘기들은 스스로 '꼰대'임을 자처하는 짓일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브랜드 선호 현상을 두둔하는 아이도 있었다. 명품을 입고, 신고, 지니고 다니면 나름 인정을 받고, 친구들 사이에서 젠 체할 수 있으니 학교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성형수술을 하는 이유에 빗대, 비록 비싸긴 해도 그것을 통해 자신감을 얻을 수 있으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놀랍게도 기성세대의 인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특히 10대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집단적 소속감과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원만한 학교생활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동기다. 마치 기성세대가 넓은 평수의 분양 아파트 주민들이 좁은 임대 아파트 주민들을 소 닭 보듯 하듯이, 아이들 역시 같은 브랜드끼리 뭉치고, 적어도 비슷한 가격대의 레벨끼리 어울리는 것이다.

갓 부임한 젊은 교사들조차 무덤덤하긴 마찬가지였다. 굳이 필요하지 않아도 고급 승용차를 굴리듯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명품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것이 세태라면서. 그들 중 몇몇은 명품을 구입하는 건 투자의 일종이라면서 두둔하기까지 했다. 잘 쓰다 싫증 날 때쯤 중고 시장에 내놓아도 명품은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굳이 아이들이 기성세대에 견줘 다른 점이 있다면 명품 선호 현상이 도난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는 명품이 '종교'다. 가진 자의 권위를 상징하고 서열을 높여주며, 나아가 실존을 대체하게 됐다. 학교도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학교 교육이 자존감을 키워주기는커녕 물신에 종속된 맹목적인 인간을 양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 아이들, 선생님들의 수업 내용보다도 옷차림과 브랜드에 더 관심 있어요. 실력 있는 교사보다 옷 잘 입는 교사가 더 인기 있다는 것, 모르세요? 좋든 싫든 요즘 세태가 그래요."

최근 명품에 눈 떴다는 동료 교사가 건넨 말이다.
#명품 선호 현상 #학교 내 도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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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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