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엑스트라들이 배식받은 점심을 먹고 있다. 밥 먹을 장소도 없어 나무둥지에서 불편하게 식사를 한다.
고재연
아무리 화려한 의상을 입어도 엑스트라는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주연 배우들이 시원한 정자에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정자 밑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더위를 피했다. 35도의 무더운 날씨에도 의상은 3~4겹이 기본이었다. 겹겹이 둘러싸인 치마폭 사이로 땀이 말 그대로 줄줄 흘렀다. '상궁' 역을 했던 보조출연자는 20여 분 동안 임금 뒤에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도 포개었던 손 사이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반팔에 반바지, 에어컨 바람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그늘에 앉아 있으면 불어오는 바람 한줄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자정에 집합해 버스에서 새우잠을 잔 것이 전부인 터라 보조출연자들은 시간만 나면 졸기 시작했다. 백성, 귀족 할 것 없이 초가집에 기대어 입을 벌리고 잠들기 일쑤였고, 반장님 눈을 피해 곳간에 숨어들어가 대(大)자로 누워 자는 사람도 있었다.
나 역시 쉴 틈만 나면 창피한 것도 모르고 치마를 걷어 올리고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돈 버는 일이 이렇게 힘들구나, 그리고 노동 후의 '꿀잠'은 이런 느낌이구나 라는 깨달음의 시간이기도 했다. "백성들 집합하세요!" 이제는 백성의 '백'자만 들어도 짜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언제 집에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없이 지루하고 긴 시간이었다.
대기시간이 있었던 나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화랑이 된 여자 출연자들은 더욱 불쌍했다. 4시간 동안 뙤약볕에 춘추와 함께 무릎 꿇고 앉아있느라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게다가 저녁 촬영은 춘추와 유신이 격돌하는 장면이었는데, 춘추의 화랑들이 유신의 군대로부터 두들겨 맞는 장면을 10번 넘게 찍었다. 친구들끼리 서로 두들겨 패는 것이 웃겼는지 병사들이나 화랑들이나 웃음이 터지기 일쑤였다. "이빨 보이면 무조건 다시 찍는다"를 외치는 감독님의 목소리에 화랑들은 햇빛에 빨갛게 익은 얼굴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두들겨 맞아야 했다. 여자라고 예외는 없었다.
"오늘은 양반이죠, 어제 햇볕에 화상입은 사람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