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나 김남배씨를 찾습니다!"

1975년 미국으로 입양된 최미련씨

등록 2012.08.15 18:00수정 2012.08.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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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련씨가 3살때 고아원에서 찍은 사진 ⓒ 최미련


최미련씨는 1970년 6월 16일 전북 익산 출생으로 추정된다. 기자는 최미련씨를 지난 13일 '뿌리의집'에서 만났다. 기록에 의하면 생후 약 두 달 후인 1970년 8월 6일 김남배라는 여성이 그녀를 익산농고 앞에서 발견해 그해 11월 12일까지 돌봐주었다. 그 후 미련씨는 이리 기독영아원에서 지내다가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5살 때인 1975년 6월 27일 미국 위스콘신주 알바니로 입양 보내졌다.

미련씨는 몸에 병이 있어서 5살이 되도록 입양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당시 미련씨 의료기록을 보면 기관지염이 있었고 독감을 종종 앓았으며 심한 중이염으로 고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결국 심한 중이염으로 그녀는 왼쪽 귀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또 고아원에 입소 당시 그녀는 심한 눈병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외에도 오른쪽 팔이 부어올라 수술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미련씨는 자기 몸이 쇠약하고 아픈 곳이 많아서 친부모가 생활고로 양육을 포기한 것이 아닌지 추정한다.

최미련씨가 5살부터 20살까지 15년 동안 살던 미국 위스콘신주 한 카운티에서 아시아 사람은 그녀 혼자였다. 입양가족도 그녀가 백인이 아니고 아시아인 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시켰다. 미련씨가 15년이나 살던 위스콘신주 한 카운티에서 아무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백인 행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주위 백인들이 자신이 백인이 아니라 황인이라는 점을 지적해 줄 때 왠지 슬프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살던 동네 백인들이 아는 황인은 중국인과 베트남인밖에 없었다.

"엄마 말 안 들으면 빈곤한 한국으로 돌려보낼 거야!"

최미련씨가 살던 마을에 많은 젊은이 들이 베트남전에 전사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은 베트남인을 싫어했고 미련씨도 베트남인으로 취급했다. 백인 마을에 혼자 아시아 소녀로 자라면서 동네아이들은 그녀 피부색이 어둡다, 눈이 작다, 코가 납작하다고 놀려댔다. 더 어려웠던 것은 백인입양 엄마도 "어떻게 그런 작은 코로 숨을 쉴 수 있니?"하고 놀려댈 땐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입양엄마는 미련씨에게 "엄마 말 안 들으면 빈곤한 나라 한국으로 돌려보낼 거야!"라고 야단을 쳤다.

고등학교때 미련씨 생활은 가장 비참했다. 하나뿐인 동양 여성과 데이트를 신청하는 백인 남성은 마을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결국 모든 것을 미워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싶었다.

입양부모는 미련씨보다 다섯 살 연상의 아들과 한 살 어린 아들이 있었다. 입양부모와 백인오빠와의 관계는 항상 불편했고 긴장의 연속이었다. 특별이 양어머니와의 관계가 가장 나빴다. 양부모는 미련씨의 모국인 한국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미련씨가 커가면서 한국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홀트에서 미련씨 양부모에게 입양 전 심리검사를 하던 중 양어머니는 아동 입양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이 나왔다. 그리고 결국 2번의 입양시도가 실패 한 후 3번째 입양시도에서 양어머니는 입양부모를 위한 심리검사를 통과했다. 그리고 입양한 것이 바로 최미련씨였다. 그래서 그런지 양어머니는 미련씨를 야단칠 때 마다 항상 "너는 내 3번째 선택이었어. 알겠니?"라며 소리쳤다.

"불행하게도 양어머니는 기분이 안 좋으실 때 마다 제게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저를 마치 펀칭백처럼 때렸어요"라고 담담히 말하는 미련씨 눈에 눈물이 고였다. 숱한 양어머니의 폭행으로 미련씨 몸에는 지금도 흉터가 남아있다. 성인이 된 지금 미련씨는 양어머니가 당시 어떤 욕구불만이나 정신질환이 있어서 자신을 그렇게 학대했다는 생각이 든다.

"너를 입양하는 것은 조건도 까다롭지 않았고 가격도 쌌어!"

미련씨 입양부모는 이미 아들 둘이 있었기 때문에 딸로서 미련씨를 입양했다. 미련씨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어린 시절 양어머니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때였다.

"나는 원래 파란 눈을 가진 백인 금발 여자아이를 입양하고 싶었단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입양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 그런데 너를 입양하는 것은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고 조건도 까다롭지 않았지. 가격도 쌌어. 그래서 그냥 너를 입양했어."

미련씨는 양어머니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귀에 목이 박히게 들으며 자랐고 백인이 아니고 파란 눈이 아닌 자기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입양가족의 집은 조용할 날이 없었어요. 집에는 항상 큰소리와 큰 주먹이 날아다녔어요. 전 겁에 질려 구석에 앉아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요"라고 말하는 미련씨 표정은 너무 우울해 보였다.

30세가 되던 지난 2000년 미련씨는 마침내 양부모과 아예 결별했다. 미련씨는 1999년, 2001년, 2003년 각각 친부모나 자기를 발견한 김남배씨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해 익산농고 근교의 마을을 찾았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녀는 익산농고 부근 경찰서를 방문하여 김남배씨를 수소문 했으나 담당 경찰은 그 이름이 가짜 같다고 답변했다. 다급한 마음에 미련씨는 1970년 그 익산 부근에서 아이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지 경찰서에 문의했으나 그런 기록은 7년만 보관되고 폐기되어서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통역과 함께 미련씨는 익산농고 근처 노인정을 찾아가 1970년 출생한 아이와 버려진 아이 그리고 김남배라는 여성에 대해 마을 노인들에게 문의했다. 그러나 노인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질문이 너무 많다며 미련씨와 통역에게 "가!"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미련씨는 친부모에 대해 아무 정보도 못 얻고 실망해서 돌아왔다. 미련씨는 지금도 왜 그 노인들이 그렇게 자신을 냉정하게 대했는지 이해 할 수 없다. 불행히도 미련씨가 친부모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마을에 포스터를 붙이는 것이 불법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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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최미련씨 모습 ⓒ 최미련


미련씨는 그 후 익산 근교의 작은 마을을 방문하여 자기 사진, 연락처와 함께 "친부모님을 찾습니다"라는 포스터를 여기저기 붙였다. 그러나 한 마을 주민이 화를 내며 포스터를 찢어버렸다. 미련씨는 지금도 왜 그 마을주민이 그 포스터를 찢어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마을에 포스터를 붙이는 것이 불법인가요?"라며 그녀는 내게 물었다.

미련씨는 미국으로 입양 보내지기 전 기독영아원에서 살던 즐겁지 않은 생각이 간혹 난다. "음식을 많이 먹으려고 다른 원아들과 싸우던 생각...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미련씨 눈은 촉촉해 보였다. 미련씨가 입양 보내지기 전 머물던 기독영아원은 나중에 미련씨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교회로 변해있었다.

2001년 미련씨는 한국홀트를 방문해서 어떻게 입양 전 심리검사에 2번이나 떨어진 가정에 자기를 입양 보냈냐고 화를 내며 항의했다. 당시 홀트 직원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미국에서 좋은 생활을 했잖아요? 영어도 할 줄 알고, 한국에서 영어도 가르치잖아요.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래요!" 미련씨는 그 직원의 뻔뻔스런 답변에 어이가 없었다. "제가 영어를 말할 줄 알고 가르치면 다른 것은 다 괜찮다고 그 직원은 모든 것을 정당화해서 정말 놀랐어요" 라고 미련씨는 말했다.

미련씨는 해외입양이 불가피 하더라도 입양부모의 자격기준이 지금보다 훨씬 엄격하길 원한다. "홀트에서는 기독교인이면 입양부모로서 자격을 갖춘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닙니다"라고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입양부모의 정신질환 이력도 충분히 검증되어야 합니다. 입양아가 입양부모의 구타로 제 경우처럼 몸과 마음에 부상을 당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으면 입양기관이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라는 그녀의 하소연은 거의 절규와도 같이 들렸다.

"왜 한국인들은 '올바른 혈통'이 아닌 사람,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돈이 많지 않은 사람을 나쁘게 대하나요? 그런 것을 볼 때 마다 저는 제가 한국인 인 것에 말 못할 부끄럼을 느낍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포용성이라고 생각합니다"는 말도 미련씨는 잊지 않았다.

"제 존재의 근원을 알고 싶을 뿐인데요"

미련씨는 자라면서 언젠가는 한국에 와서 친 부모를 찾으리라 마음먹었다. 미련씨는 자신이 왜 친부모로부터 버려졌을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난 가치 있는 사람일까?" 미련씨는 스스로에 대해 이런 질문을 자주한다. "지금 저는 제가 무가치 한 인간으로 느껴져요. 지난 10여 년간 한국과 미국에서 친부모님을 찾으려고 백방의 노력을 했는데 소용이 없군요. 전 제 존재의 근원을 알고 싶을 뿐 인 데요"라고 말하는 미련씨의 음성은 너무도 서글프게 들렸다.

다음은 얼굴과 이름도 모르는 한국 친부모에게 최미련씨가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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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련씨 ⓒ 최미련


저는 부모님의 소식을 날마다 기다리면서 지난 10여 년간 당신들을 한국과 미국에서 찾고 있습니다. 얼마나 형편이 어려우셨으면 부모님이 저를 포기했을지 저는 이해합니다. 부모님이 제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실지 확신이 없지만 저는 그래도 항상, 매순간 부모님을 기다립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고 저는 부모님이 어디에 계신지 정말 궁금합니다. 저를 생각하시나요? 저는 자주 부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가 누구를 닮았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다양한 삶을 살아왔지만 '딸'로서의 삶은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비록 저와 어떠한 관계도 원하시지 않더라도 연락을 해주세요. 제 출생배경을 아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직접 연락하시는 게 어려우시다면 친척이나 주위 분들을 통해서라도 저에게 사실을 알려 주세요.

저는 제가 있을 보금자리를 찾아서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하지만 늘 친부모님이 저를 다시 반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수시로 한국에 돌아오곤 합니다. 저는 기다립니다. 부모님 빨리 연락주세요.

오랜 세월 부모님과 떨어져있던 당신의 딸 최미련 올림

최미련씨를 알아보시는 분은 '뿌리의집'(3210-2451)으로 연락 바란다.
#최미련 #김성수 #입양 #익산 #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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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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