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조차 '인스턴트'로 하는 미국인들

[시골 한의사, 미국을 달리다⑦] 미국 자전거 횡단 제19일~21일

등록 2012.08.27 14:24수정 2012.08.2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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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토요일

Troutdale, VA - Rosedale, VA 근처 elk garden united methodist church
58mile = 93.3km


간만에 사람다운 식사를 한 엊저녁을 잊지 못하겠다. 아늑한 호스텔을 이제는 떠나야 할 때. 나는 자전거 페니어백을 챙기고 케빈은 등산 가방을 꾸린다.

"러셀 혼자 남겨 두고 떠나는 거야?"
"아니야. 러셀 형이 나를 버린 거지."

퉁퉁 부은 발을 공중에 매단 채 누워있는 그가 보였다. 어제 직업정신을 발휘해 진맥을 했었다. 다행히 열병으로 의심할 만한 전신증상은 없었고 발목에만 국한된 충상(蟲傷)이었다. 더불어 약간의 스트레스와 감기 기운이 있었다. 그래서 목에 스카프를 꼭 두르라고 일러 둔 터였다. 감기 조심하라는 충고를 다시 하며 자전거에 올라탄다.

날씨는 예측불가하다. 한 여름 같던 날씨가 자취를 감추고 오슬오슬 떨릴 정도의 한파가 몰아닥친다. 3000피트를 훨씬 넘는 고지대라 일교차가 심하다.

10마일 정도 힘겹게 페달질을 했을 무렵. 눈 앞으로 시원한 내리막이 펼쳐진다. 브레이크 잡는 일 외에는 할 게 없다.


코나록(konnarock)을 지나니 CR 728번을 통해 버지니아 크리퍼 트레일(virginia creeper trail)로 가는 입구가 보인다. 다마스쿠스(damascus)까지 가는 Federarl Route 58번을 11마일 가량 대체할 수 있는 숲길이다. 자갈길에서 으레 발생할 자전거의 반동이 걱정되어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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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크리퍼 트레일(virginia creeper trail) 처음부터 끝까지 약간의 내리막인 트레일에서는 힘들게 페달을 밟을 필요가 없다. 트레일을 내려가는 바이커. ⓒ 최성규


맞은편 차선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트럭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짐칸에는 자전거가 잔뜩 실려 있다. 7마일에 달하는 버지니아 크리퍼 트레일을 자전거로 달리며 자연의 정취를 온 몸으로 느끼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구. 허나 힘들게 페달을 밟고 싶지는 않다. 그 욕망을 제대로 간파한 자전거 대여점들의 관광 상품. 트럭을 타고 꼭대기에 도착한 관광객들은 자전거를 타고 편하게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다마스쿠스까지 내려와 자전거를 반납한 사람들은 허기를 느낀다. 인근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메뉴를 고른다. 사이즈는 두 가지. 6인치와 그 두 배에 달하는 푸트롱(foot long) 사이즈. 누구나 대형 사이즈를 원한다. 탄산 음료는 필수. 열량이 높은 초코와 크랜베리 쿠키로 입가심을 하고 나서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운동조차 인스턴트를 선호하는 미국인의 속성은 다이어트의 가장 큰 적이다.

방금 먹었던 음식의 열량을 맹렬히 불태우며 그들 옆을 보란 듯이 지나간다. 메도우뷰(meadow view)를 지나 헤이터즈 갭(hayters gap)까지는 평탄한 길이지만 다음 지점인 로즈데일(Rosedale)까지는 1500피트를 올랐다 내려가야 한다.

도저히 페달을 밟고 올라갈 수 없는 급경사다. 안장에서 내려 무려 4마일을 걷는다. 1시간의 중노동. 자전거는 문명의 이기지만 오르막에서는 그런 짐덩이가 없다. 워싱턴 카운티(Washington county)를 벗어나 러셀 카운티(Russel county)에 진입하면서 오르막은 내리막으로 바뀐다.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진다.

"냉장고에서 맘껏 꺼내 먹어요", 천국이 따로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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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k garden united methodist church 자전거 여행자를 위해 한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숙소다. 항상 굶주린 여행자들에게 주방은 천국과 같은 곳. ⓒ 최성규


인근 교회에서 자전거 여행자를 위한 숙소를 제공한다. "Elk garden united methodist church". 지난 밤에는 침례교 덕을 보더니 이번에는 감리교다. 뒷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방이다. 벽에는 안내문 한 장이 붙어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냉장고랑 찬장에서 맘대로 꺼내 먹어요. 단, 깨끗하게 해 놓을 것."

누가 공짜를 마다할 것인가. 하물며 항상 칼로리 부족에 허덕이는 자전거 여행자에게는 천국이다. 라면을 꺼내어 먹고 또 먹는다. 냉장고에서 꺼낸 냉동식품을 가열하는 전자레인지의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폭풍과도 같은 저녁식사가 끝나니 정적만이 남았다. 방명록을 보니 하루 이틀 전에 머물렀던 자전거 여행자들의 기록이 보인다. 서너 명으로 이루어진 그룹 라이더들도 종종 눈에 띈다. 오늘 손님은 나 혼자다. 문득 외로움이 밀려든다. 공간이 클수록 공허함은 비례하는 법이다. 동료 라이더를 언제나 만나게 될 것인가? 잠에 빠져드는 순간까지도 머릿 속을 채우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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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 자전거 여행자들이 남겨놓은 기록들. 2012. 5. 29 크리스, 그렉, 알렉스 여기 왔다 감. ⓒ 최성규


6월 3일 일요일

Rosedale, VA - Lookout, KY
62.5 mile ≒ 100.5 km

잠이 밀려든다. 음주운전보다 무서운 게 졸음운전이라던데. 오르막을 감당하느라 팽팽해진 허벅지의 뻐근함, 작열하는 햇빛에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아우성을 치는 와중에도 하품을 멈출 수 없다. 순간 오토바이 한 무리가 굉음을 내며 뒤에서 돌진해온다. 1690CC의 배기량을 자랑하는 할리데이비슨 '로드킹'의 육중한 몸체를 보니 마운틴 바이크의 프레임이 마른 나뭇가지마냥 연약해 보인다. 자동차마저 압도하는 그들의 위세를 보며 이 순간만큼은 뒷좌석이라도 얻어 타고 싶은 심정이다.

강한 서풍이 불어 닥친다. 서부 연안의 캘리포니아 주나 오리건 주에서 버지니아 주를 향해 동진하는 라이더들이 유독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들에게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는 바람이 서쪽을 향해 가는 나에게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다. 고함을 지르며 오기를 부려보지만 소리는 바람에 맥없이 묻히고 만다. 그저 묵묵히 페달을 밟을 수밖에.

자전거는 인생이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모두 자신만의 페달을 밟아야 한다. 거기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 거센 바람, 육체의 피로, 가파른 경사를 극복하고 드디어 꼭대기에 올라선다. 보상으로 주어지는 신나는 내리막. 영원처럼 길었던 고생에 비해 쾌락은 너무나 짧다. 찰나의 순간에 그 거리를 소진하면 또 다른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끝없이 돌을 굴려야 했던 그리스 신화 속 '시지푸스'의 운명을 타고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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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터키 주 입성 브레이크스 인터스테이트 파크(breaks interstate park)를 통과하니 주 경계선이 바뀌었다. ⓒ 최성규


경사도에 따라 기어를 조절하는데 어느 순간 문제가 생긴다. 갑작스레 기어가 바뀌면서 체인이 체인링(Chain ring)에 겹 감아지고 앞 변속기(front derailleur)가 미묘하게 틀어졌다. 체인이 통과해야 하는 앞 변속기 내부 공간이 좁아지면서 앞 2단 뒤 6, 7단에서 마찰음이 들린다. 최저단인 앞 1단 뒤 1단으로 변속하면 체인이 빠져버리는 불상사까지 일어난다. 덕분에 오르막길이 더욱 힘들어진다.

삐걱거리는 자전거와 팽팽하게 힘줄이 불거진 다리. 안쓰럽다. 초짜 주인을 만나 이래저래 고생이 많다.

엉망진창이지만 어떻게든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간다. 브레이크스 인터스테이트 파크(breaks interstate park)를 통과하니 뷰캐넌 카운티(buchanan county)가 파이크 카운티(pike county)로 바뀐다. 동시에 버지니아 주에서 켄터키 주로 넘어가는 역사적인 순간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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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da Harris Baptist Center 침례교회에서 행사나 운동회 용도로 쓰는 체육관. 평소에는 자전거 여행자를 위한 훌륭한 숙박시설이 된다. ⓒ 최성규


애팔래치안 산맥이여, 안녕. 목줄 없는 개들과 지나는 차들은 여전히 위협적이지만 발걸음은 새롭다. 켄터키 주에 입성하자마자 반가운 쉼터가 눈에 띈다. 한 침례교회에서 자전거 여행자들에게 체육관을 숙소 대용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3일째 종교의 힘을 빌어 지친 몸을 뉘일 공간을 마련한다.

텃세가 심한 켄터키 주 차량들... "미친 운전자가 많아, 조심해"

6월 4일 월요일

Lookout, KY - Hindman, KY
50 mile ≒ 80 km

여행자 숙소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료인데다가 서로 다른 특색으로 자전거 라이더의 오감을 만족시켜준다. 어제 잠을 청했던 체육관은 샤워실을 갖추고 있어 땀에 절어버린 몸뚱아리가 때 아닌 호강을 했다. 방명록에 기록을 남기며 감사 인사를 대신한다. 자전거 라이더는 그 외 흔적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떠나간다.

한껏 충전된 체력으로 자전거를 탄다. 주 경계선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텃세가 시작되었다. 켄터키 주 차량들은 버지니아 주에 비해 거친 편이다. 보통 급한 커브길에서는 차량들이 추월하는데 주저함을 보이거나 속도를 한껏 줄인 채 부드럽게 다가왔다. 이 곳은 물이 다르다. 경적도 없이 옆으로 치고 나가는 트럭이 백미러에 우악스럽게 비친다.

켄터키 주로 진입하면서 나에게 새로운 일정이 생겼다. 결혼 직후 미국에 와서 몇 년째 사는 사촌형님이 켄터키 렉싱턴 근처 윌모어(wilmore)에 있기 때문. 이역만리 타국에서 반가운 친척을 만나기 위해 새롭게 동선을 짰다. 며칠 후 만남을 위해 오늘은 50마일 떨어진 힌드만(hindman)까지 가야한다.

버지(Virgie)라는 마을에서 좌회전해서 SR 122번 남쪽 노선으로 진입해야 한다. 진입 표지판을 보지 못하고 얼떨결에 앞으로만 달리다보니 어느덧 10마일을 코스에서 벗어나버렸다. 제대로라면 7.5마일 거리에 있는 멜빈(Melvin)에 진즉 도착해야 했다. 반대방향인 SR 122번 북쪽 노선으로 잘못 들어선 결과다.

"거리에 미친 운전자들이 많으니 조심하라구."

지나가던 행인은 길을 가르쳐주며 불안한 인사를 건넨다. 이거 뭐, 평소보다 10마일 적게 간다고 좋아했더니, 되려 20마일을 추가하게 생겼다.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을 썼던 홍은택 작가님이 몇 십 마일을 되돌아가며 느꼈던 심정이 이제야 이해된다.

돌아가는 길은 그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낯설게 느껴지는 주변을 보며 공간은 보는 시점에 따라 새롭게 변모함을 알게 된다.

절반쯤 되짚어 갔을 무렵, 근처 가정집에서 누군가 손을 흔든다. '드링크? 드링크?'를 외치는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친절함으로 잔뜩 무장한 아저씨는 갓 냉장고에서 꺼내온 캔 음료를 두 개나 쥐어주었다. 올해 60세가 된 레이 칠더스(Ray Chil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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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칠더스(Ray Childers) 아저씨 84세 노모를 모시고 사는 효자. 부인과 아이들 없는 생활의 적적함이 자전거 여행자에 대한 친절로 승화된 것일까? ⓒ 최성규


발음하기가 어렵다. 동양인은 'L'과 'R'발음을 내는 데 어려움이 많다. 끙끙대는 나를 보고 레이 아저씨는 그저 웃기만 한다. 

바로 옆집에는 84세 어머니가 살고 계신다. 이민 간 형제를 대신해 모든 부양은 그의 몫이다. 결혼은 했어도 자녀를 낳지 못했다는 그의 말에 깊은 사연이 묻어난다.

독특한 켄터키 사투리를 전혀 알아듣지 못해 대화는 삼천포로 빠졌지만, 그의 상냥한 마음은 해석할 수 있었다. 순간의 실수로 20마일을 더 갔지만 좋은 인연을 만났다. 곰곰이 뜯어보면 잘못된 길이란 없다. 사람의 잘못일 뿐. 'Wrong way'(잘못 들어선 길)의 의미를 다시 곱씹어 볼 일이다.

몰리(Mallie)에 도착하니 힌드만(Hindman)까지는 4.5마일. 조금만 더 힘을 내자. 페달에 박차를 가하고 시침은 7시를 향해 치닫는다.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서야 도착. 총 73마일을 질주했다. 예정에 없던 비공인 최고기록이다. 옛 어른들의 말은 틀린 게 없다. 닥치면 다 한다.

지도의 정보로는 이 근처 'knott county historic society'라는 숙소가 자전거 여행자들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한다. 마지막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듯 아주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자전거 여행자들이 써놓았음직한 'you can do it' , 'almost'라는 글귀들이 땅바닥에 적혀 있다.

놀래라. 한 아저씨가 수많은 고양이를 구름처럼 몰고 나를 맞이해준다. 캣우먼이 아니라 캣맨이다.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 아저씨는 17년째 자전거 여행자들을 위해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전거 라이더 한 명도 미리 와 있었다. 인사를 주고 받는데 이름이 낯익다. 이틀 전 묵었던 로즈데일(Rosedale) 근처 교회 방명록에서 봤던 친구다.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오리건주 플로렌스까지 간다던 제이콥 버크홀즈(jacob birkholz)가 이 사람이라니.

하루 앞서 있던 제이콥이 힌드만(hindman)에서 이틀을 묵으면서 따라잡은 셈이다. 동료 라이더를 만나겠다는 꿈이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나와 공통점이 많은 친구다. 내가 공중보건의를 최근에 마치고 여행을 왔듯이 이 친구는 올 1월 군 복무를 마쳤다. 헬리콥터에 탑승해서 환자를 이송하는 의무병이었다. 신속한 환자 이송을 맡다보니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유럽, 아프리카 등 안 가본 데가 없다.

결혼과 이혼 전력도 가지고 있다. 잠깐이나마 부부의 연을 맺었던 부인은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미군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었다. 마찬가지로 의무병으로 일했던 그녀는 제이콥이 아프가니스탄에 장기 주둔하게 되자 끝내 갈라서기로 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낼 시간을 감당할 수 없었던 부인을 그는 이해했다.

"차라리 잘 된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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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드만 히스토릭 B&B(Bed & Breakfast)에서의 캠프파이어 왼쪽부터 제이콥 버크홀즈(jacob birkholz),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 친구가 되려면 이래야 한다면서 우리 모두 담배를 돌려가며 태웠다. ⓒ 최성규


손님이 한 명 더 온다. 데이비드의 육촌형제 찰리(Charlie)다. 그리고 캠프 파이어가 시작되었다. 각자 손에 긴 꼬챙이를 하나씩 쥐었다. 소세지를 꿰어 모닥불에 굽는다. 남자 네 명이 옹기종기 앉아 익기만을 기다렸다. 빵에 넣어 케첩을 잔뜩 바른 다음 한 입 앙 베어 물었다. 여행 초반부터 지겹게 먹었지만 홈 메이드는 역시 다르다.

제이콥이 하모니카를 꺼내어 한 곡조를 뽑는다. 선율에 반응이라도 하듯 하늘을 수놓은 별빛 무더기가 반짝이고 불은 타닥타닥 타들어간다. 맥주를 한 모금 알싸하게 들이킨다. 콧잔등이 알딸딸해지면서 양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오늘만큼은 혼자가 아닌 밤. 
#미국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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