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미친 짓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묻지마 범죄'가 두렵지 않은 이유

[마을의 귀환 ⑥]'달동네의 변신' 은평구 산새마을

등록 2012.08.28 20:14수정 2012.10.03 16:07
0
원고료로 응원
'미래세계의 희망은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뤄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에 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책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2012년, ‘콘크리트 디스토피아’ 서울 곳곳에서는 ‘마을공동체 만들기’가 한창입니다. 함께 '집밥'을 먹고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는 것부터, 아이를 같이 키우고 일자리를 나누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까지. 반세기 전 간디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다양한 마을만들기 사례를 통해 마을이 왜 희망인지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a

산새마을 방범순찰에 나선 주민들이 23일 오후 서울 은평구 신사2동 지역 공원과 학교 주변 등 취약지역을 살피며 순찰활동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a

산새마을 방범순찰에 나선 주민들이 23일 오후 서울 은평구 신사2동 마을 주변을 순찰하던 도중 밤 늦게까지 놀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빨리 귀가하라"며 타이르고 있다. ⓒ 유성호


23일 오후 9시 20분. 박상열(78), 진정임(62), 안영숙(52), 최복순(47). 이정환(47) 다섯 명의 산새마을 마을 지킴이들이 사랑방을 떠났다. 매주 한 번 돌아오는 자율방범활동인 마을 순찰 때문이다. 야광조끼에 경광봉을 든 지킴이들은 이웃에 마실가듯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눈빛은 예사롭지 않다. 어두운 골목길에 쓰레기가 버려지는지, 버려진 공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꼼꼼히 수색한다. 아이들에게는 "빨리 집에 안 들어가면 엄마한테 전화한다"며 겁을 준다. 지나가는 이웃들에게는 안부를 전한다. 지킴이 이정환(47)씨는 "바쁜 출근길에도 골목길에 주차가 삐딱하게 돼있으면 전화해서 '다시 주차하라'고 한다"며 "평소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들을 행동으로 옮기게 됐다"고 말했다.

'마을 지킴이'가 밤마다 순찰... "처음엔 '미친 짓'이라고 했는데"

마을지킴이 활동은 지난 5월부터 시작됐다. 마을 주민 25명이 매주 한 번씩 순찰을 돈다. 순찰코스는 은평구 신사2동 237번지 5~9통 지역 일대다. 평소 같으면 퇴근 후 집에서 쉬어야 할 시간이지만, 일주일에 한 번이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이정환씨는 "처음 순찰 돌 때는 주민들이 밤에 미친 짓한다고 그랬다"면서 "한 달 정도 지나고 나니까 마을 사람들이 고마워하더라"고 말했다.

지킴이는 마을 주민에게 '안전 귀가'를 선물했다. 전날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서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 지나가던 행인 2명이 난데없는 칼부림을 당했다. 산새마을 주민들은 마을지킴이 덕분에 든든하다. 지킴이가 나선 후 마을 공터에서 가출 청소년들이 소란을 피우는 일도 없어졌다.

퇴근 길에 지킴이들을 만난 양희정(32)씨는 "지킴이가 없을 때는 집에 있는 동생한테 버스정류장까지 나오라고 할 정도로 안심이 안 됐다"면서 "지킴이 덕분에 이제는 동생이 더 고마워한다"고 말했다. 양씨는 이어 "잘 알지 못하는 사이지만 한 마을이라고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걸 보면 마을 활동에 관심이 간다"고 덧붙였다. 강지희(10)양은 "(마을 지킴이가) 처음에는 무서운 사람들인 줄 알고 피해다녔다"면서 "지킴이가 나오는 시간에는 이렇게 엄마를 마중 나갈 수 있다"며 웃었다.

산새마을은 서울시 은평구 봉산 중턱에 있다. 마을버스가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경사가 가파른 '달동네'다. 산에 부엉이, 뻐꾸기, 딱따구리 등 산새가 많아 산새마을이 됐다. 이날 지킴이 순찰을 도는 시간에도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을에는 지은 지 30년 이상 된 노후 주택이 많고 저소득층 비율이 높다. 50~60대 장년층이 많다.


a

산새마을 주민이 23일 오후 서울 은평구 신사2동 산새마을 사랑방 앞을 청소하고 있다. 산새마을 사랑방은 마을 주민들이 와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어린이들이 놀러와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 유성호


지난해 6월 은평구청(구청장 김우영)과 사회적 기업 ㈜두꺼비하우징은 산새마을을 '두꺼비하우징 사업' 시범 구역으로 선정했다. 두꺼비하우징은 뉴타운 재개발 등 기존의 도시개발과는 다르다. 다 부수고 새로 짓는 뉴타운 방식에서 벗어나 낡은 집을 수리·관리하면서 기존에 살던 주민들의 정주권을 보장한다. 주민들은 낮은 이자의 '두꺼비 하우징 대출'을 통해 수리비용을 마련하고, 사회적 기업인 '두꺼비 하우징'은 공사 원가를 투명하게 공개한다. 주민들 사이의 커뮤니티 형성을 통한 마을공동체 만들기도 함께 진행된다.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특히 윤전우 ㈜두꺼비하우징 마을만들기 팀장의 역할이 컸다. 몽골에서 4년 넘게 마을만들기 활동을 했다는 그는 올해 초부터 산새마을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20년 동안 반상회 안 하던 마을사람들을 매주 마을회의에 참석하게 만들고, 마을학교를 열어 주민참여 역량을 키웠다.

쓰레기장 '텃밭'으로 가꾸며 마을공동체 싹 움트기 시작

a

산새마을 주민 최복순씨가 23일 오후 서울 은평구 신사2동 봉산 산자락에 조성된 산새마을 텃밭에서 주민들과 함께 재배한 호박을 들어보이고 있다. 산새마을 텃밭은 주민들과 구청 주민센터 공무원들이 쓰레기 더미를 직접 치워 만들었으며 재배한 채소를 인근 복지관에 무료로 보내는 등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 유성호


a

산새마을 주민 최복순씨가 23일 오후 서울 은평구 신사2동 봉산 산자락에 조성된 산새마을 텃밭에서 주민들과 함께 재배한 수박을 마을 어린이에게 보여주고 있다. 산새마을 텃밭은 주민들과 구청 주민센터 공무원들이 쓰레기 더미를 직접 치워 만들었으며 재배한 채소를 인근 복지관에 무료로 보내는 등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 유성호


산새마을에서 공동체의 싹이 본격적으로 움트기 시작한 것은 지난 3월 봉산 등산로 입구에 방치된 쓰레기를 주민들이 함께 치우면서부터다. 당초 서울시는 이곳 공터 400평을 매입해 2013년 초 도시텃밭으로 조성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기다릴 수 없었다. 한 여름 쓰레기 더미에서 악취가 나고, 모기의 서식처가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 작업을 시작했고 은평구청 직원들까지 나와 함께 쓰레기를 치웠다. 3주에 걸친 대공사로 텃밭이 완성됐다. 텃밭은 산새마을의 상징이라고 할 만큼 마을사람들이 아끼고 가꾼다. 현재는 깻잎 위주로 고구마, 수박, 참외, 배추 등을 심고 있다.

텃밭 수확물은 인근 복지관에 무료 급식용 재료로 보낸다. "몰래 따다 집에서 반찬 해드시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최복순(47) 9통 통장은 손사래를 치며 "나를 위한 일이라면 힘든 일이겠지만 같이 모여서 돕고 좋은 일로 이어지니까 신이 나서 서로 경쟁한다"고 말했다. 복지관에 일손이 부족하자, 손수 김치를 담아 보내기도 했다.

텃밭 입구에는 작은 마을 공원이 조성돼 한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다. 이날 텃밭 일을 함께 한 9통 주민들은 최점순(55)씨네 집에서 점심을 같이 했다. 한 여름에 반찬은 별 거 없었다. 열무에 밥을 비벼 먹었다. 1년 전에는 그저 인사만 하던 사이다. 하지만 이제는 하루를 같이 보내며 '언니, 동생'하는 자매가 됐다.

23일 마을텃밭 옆 공원에는 '시끌벅적 산새마을' 민요수업이 열렸다. 9통 주민 아홉 명이 모였다.

"마음 편하게 눈감고 생각대로 해보세요. 코로 숨이 들어간다. 목을 타고 가슴을 지나서 뱃속에 잠깐 저장했다가 아 하고 내 앞으로 쭉 소리를 던져주세요. 아~ 아~"

쭈뼛쭈뼛, 눈치 보면서도 김경은 강사(도들빛 국악연구소)의 지도를 따라간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를 내뱉는다.

이날 수업에서 최고령인 홍경순(83)씨는 "민요도 배우니까 다른 동네에서 '산새마을 출세했다'고 그런다"면서 "집중력이 떨어져 따라가기 힘들지만 집에 있는 것보다 백배 낫다"고 웃으며 말했다. 최점순씨도 "이 곳 먼 데까지 올라와서 민요 가르쳐주는 사람이 어딨냐"며 "마을하니까 마을 사람들끼리 민요도 배우고 텃밭도 가꾼다, 다른 데로 이사 가기 싫다"고 말했다.

일주일마다 마을 회의... "콜", "콜", "100% 콜"

a

산새마을 주민들이 23일 오후 서울 은평구 신사2동 봉산 산자락에 조성된 산새마을 텃밭 앞에 모여 김경은 국악예술교육 전문가로부터 장구 장단에 맞춰 국악을 배우고 있다. ⓒ 유성호


민요수업이 끝나고 사람들은 마을 회의에 참석했다. 윤전우 팀장의 주재로 마을 현안을 보고하고 안건을 토의했다. 매주 열리는 회의에 일주일간 생각해온 마을 현안들이 쏟아져 나온다.

"제안 하나 할게요. 마을에 약수터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낮지 않은 산이라 몇 m만 파면은 금방 물이 나올 것 같아요."
"그냥 파서는 안 돼. 관정(管井, 둥글게 판 우물)을 뚫어야지. 꽃에 바로 물 줄 수 있게 하면 얼마나 좋아."
"근데 약수터 만들면 전기요금 누가 내나?"
"내가 낼게. 내가."

마을 회의에서는 거수나 투표도 필요 없었다. 윤 팀장이 "이쪽부터 콜 하세요"라고 하면 사람들은 "콜!", "콜!", "100% 콜! 물을 필요도 없어요"라고 답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인근의 상신초등학교 개방 시간 확대·후문 설치, 마을버스 노선 조정, 마을주차장 조성 등이 논의됐다. 또 앞으로 진행될 우리집 명패 만들기, 영정 사진 촬영, 의료생협 왕진, 벽화그리기 등 마을 프로그램들의 일정이 소개됐다. 중요한 돈 문제도 빠지지 않았다. 윤 팀장이 마을기금의 회계 사항을 보고했다.

이날 회의에서 가장 큰 수확은 평소 마을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던 8통 주민 3명이 기부금을 쾌척한 것이다. 기부금을 내며 쑥스러워하던 권호택(66)씨는 "적지 않은 돈이지만 마을을 위해서 써달라"며 "낸 돈 만큼 마을 일에 참견하면서 잔소리 할 것"이라며 웃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박수로 화답하며 마을 회의를 마무리 했다.

윤전우 팀장은 "마을에 들어온 지 6개월째라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기부금을 꺼내는 순간 놀랐다, 눈물이 날 뻔했다"고 뭉클해했다.

느슨한 공동체 넘어 협동조합 꿈꾼다

a

산새마을 최복순씨와 홍경순씨, 최점순씨가 23일 오후 서울 은평구 신사2동 산새마을 사랑방에 모여 손뜨개질로 친환경 수세미를 만들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수세미를 팔아 모은 돈은 마을기금으로 사용한다. ⓒ 유성호


a

산새마을 주민들이 23일 오후 서울 은평구 신사2동 정자에 모여 마을경관 사업에 대해 마을회의를 하고 있다. ⓒ 유성호


마을은 이제 느슨한 공동체를 넘어 협동조합을 꿈꾸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조합의 회원이 돼 회비를 내고 마을관리 서비스를 받는 것이다. 아파트에 경비원이 있는 것처럼 마을 사람들 몇 명을 마을 관리원으로 두는 방식이다. 조합비로 마을 내의 일자리도 만들고 마을의 안전과 청결 유지를 꾀할 수 있다. 또 봉산에 과수원을 조성해 산새마을이 관리를 맡도록 하는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이는 장년층이 많은 산새마을에 중요한 일자리가 될 수 있다.

산새마을은 외부인, 즉 (주)두꺼비하우징을 통해 마을공동체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주민들의 자발성이 기대되는 수준이다. 이날 회의에서처럼 약수터를 만들자고 제안한다든지, 기부금을 쾌척하는 모습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 윤 팀장은 "마을에 들어와서 들쑤시고 다니면서 사람들 관심 끌어내는 게 일이었다"며 "처음엔 반응이 싸늘했는데 지나다 보니 이렇게 신뢰가 쌓이고 자발적인 모습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윤 팀장은 빈집이 생기면 산새마을에 들어와 마을 주민이 될 예정이다. 외부인과 마을 주민들이 하나가 되어가는 산새마을. 다음 회의에서는 또 어떤 제안들로 마을 사람들이 '콜'을 외칠지 기대가 된다.
#마을공동체 #산새마을 #두꺼비하우징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군산 갯벌에서 '국외 반출 금지' 식물 발견... 탄성이 나왔다
  2. 2 20년만에 포옹한 부하 해병 "박정훈 대령, 부당한 지시 없던 상관"
  3. 3 광주 찾는 합천 사람들 "전두환 공원, 국민이 거부권 행사해달라"
  4. 4 남자의 3분의1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다고?
  5. 5 "개발도상국 대통령 기념사인가"... 윤 대통령 5·18기념사, 쏟아지는 혹평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