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중인 김매자씨
김민영
그러나 독일 입양인 김매자씨는 아기를 팔아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한국인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돈을 주고, 인도주의와 자선사업의 이름을 빌어서, 쇼핑하듯이 아기를 사는 부유한 서구 국가들을 비판한다. 친부모를 찾아 두 번째 한국을 방문한 김매자씨를 30일 '뿌리의집'에서 만났다.
김매자씨는 1981년 7월 27일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에서 순찰 중인 경찰에 의해 발견 되었다. 발견 당시 매자씨는 기아상태에 있었다. 매자씨를 발견한 천현지서의 한 순경은 파주 반도의원(현 파주 사임당로 835-1에 있는 중앙외과)에 전화를 하여 기아상태에 있는 매자씨를 돌봐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틀간 병원입원 후 1981년 7월 29일 매자씨는 경신양연회라는 고아원에 입소한다.
그 후 1981년 10월 13일, 매자씨는 경신양연회로부터 홀트로 보내지며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982년 1월 25일, 생후 6개월 만에 독일로 해외입양 보내진다.
김매자씨의 입양부는 독일의 한 제약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입양모는 파트타임으로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입양부모는 매자씨 보다 4살 많은 언니와 2살 많은 오빠를 친자녀로 키우고 있었지만 아시아 여자아이를 입양하고 싶어서 매자씨를 해외입양 한 것이다.
양부모가 독일 중산층 가정이라 그런지 물질적으로 매자씨 어린 시절은 그럭저럭 행복했다. 문제는 어느 때부터 인지 그녀에게 자아의식이 생긴 후 부터였다. 이 자아의식이 생긴 후부터 그녀는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고,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는 극도의 외로움, 우울증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심한 분노감 때문에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특별히 매자씨는 어려서 독일아이들의 자신을 향한 인종차별이 죽도록 싫었다.
그러나 한 여성으로 성장하여 성인이 된 매자씨는 또 다른 차별에 시달렸다. 어려서는 독일아이들이 자신을 아시아 소녀라고 놀리고 차별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 여성으로 성장 한 후에는 자기 외모가 '이국적 이라며' 지나친 관심을 보이고 접근하는 독일남자들이 너무 싫었다. 그녀는 "저는 유럽인, 특히 독일인들이 무서워요, 인간을 신뢰하기가 너무 힘들어요"하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우울증을 극복하고자 2005년 김매자씨는 이태리계 독일 파트너와 딸을 하나 낳았다. 그러나 그녀의 우울증과 강박관념은 딸을 낳고부터 오히려 훨씬 심해졌다. 스위스항공에서 일을 하고 있는 김매자씨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을 동안 양모가 딸을 돌보아 주었다. 그런데, 딸을 잃을 것 같은 극도의 불안감과 강박관념이 갑자기 매자씨에게 엄습했다. 그녀는 회사에서 거의 10분에 한 번씩 양모에게 전화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양모가 매자씨에게 "얘야, 제발 안심해라! 어떻게 10분에 한 번씩 엄마에게 이렇게 계속 전화할 수 있니? 제발 엄마를 믿고 전화하지 마라!" 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매자씨의 끊임없는 우울증, 불안감, 강박관념 때문에 지난해 그녀는 4개월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기도 했다. 정신병원에서 마사지를 받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 상태가 좋아지든 듯했다. 그러나 병원을 퇴원하면 그녀의 우울증은 입원 전과 마찬가지인 상태로 돌아왔다. 정신과 의사는 매자씨가 친부모가 그리워서 그러는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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