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하운에 남아있는 안데르센의 자취

[덴마크, 문화와 자연이 공존한다 ⑪] 코펜하겐 첫 번째 이야기

등록 2012.09.04 09:49수정 2012.09.0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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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크루즈 객실 배치도

크루즈 객실 배치도 ⓒ 이상기


오슬로 시내를 지나면서 나는 다시 왕궁과 시청을 지난다. DFDS 크루즈 터미널은 오슬로 중앙역 앞 해변에 위치한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해안에 정박해 있는 DFDS 국제 여객선이 보인다. 우리가 탈 DFDS는 오슬로에서 코펜하겐을 왕복 운행하는 야간 여객선이다. 오후 4시 45분에 오슬로를 출발, 다음 날 오전 9시 45분에 코펜하겐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16시간 이상을 배에서 지내야 한다.

여객선에 오르면 5층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우리가 묵을 방은 2층이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배의 구조도를 보니 1,2층이 객실, 3,4층이 차량 적재실, 5층 이상이 업무 공간, 객실, 상가, 식당, 회의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위에 무거운 자동차들을 이고 자는 셈이 된다. 침실로 들어가 보니 좁지만 쾌적한 편이었다. 4명이 잘 수 있는 공간인데, 2명이 자도록 배정되었다.


a  우리가 타고 온 크루즈 DFDS.

우리가 타고 온 크루즈 DFDS. ⓒ 이상기


짐을 정리한 우리 부부는 9층으로 올라가 배가 떠나는 모습을 본다. 오슬로에서 북해로 나가려면 두 시간 정도 오슬로 해안을 운행해야 한다. 해안 양쪽으로 주택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해안의 폭이 점점 넓어지고, 집들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 때쯤 해서 우리는 다시 선실로 들어간다. 먼저 면세점으로 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로 한다. 마침 오이릴리(Oilily) 가방이 괜찮은 게 있어 하나 산다. 요즘 말로 신상이다.

그리고는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간다. 세븐 씨즈(7 Seas)라는 이름을 가진 뷔페식 레스토랑이다. 이곳은 해산물, 육류, 빵, 햄과 치즈, 국, 샐러드, 과일, 디저트 등 없는 게 없다. 한꺼번에 500명은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시간 정도 여유 있게 천천히 저녁을 먹는다. 식당 밖으로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고, 배는 이제 북해 어딘가를 항해하고 있을 거다. 객실로 돌아온 나는 사진을 분류하고, 하루를 글로 정리한다. 그러다 보면 매일 한두 시다. 나는 내일 코펜하겐에서의 일정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든다.   

코펜하겐 시청사가 가지는 의미

a  코펜하겐 시청사.

코펜하겐 시청사. ⓒ 이상기


코펜하겐에 도착하니 날씨가 좋다. 비가 오고 음산하던 오슬로 날씨와는 대조적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시청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현지 가이드를 만나기로 되어 있다. 시청에 이르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우리는 시청 안으로 들어간다. 후문 입구에는 두 마리의 바다사자가 지키고 있다. 정문으로 나오니 광장이 펼쳐진다. 그 사이 비가 조금 그쳤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이 많다.

코펜하겐 시청은 1905년 개청했다. 1892년 마르틴 뉘롭의 설계로 북유럽의 낭만적 스타일로 지어졌다. 이탈리아 시에나 시청 건물을 모방했다고 하며, 정면 발코니 위에는 12세기 후반 덴마크 대주교 겸 정치인이었던 압살론(Absalon)상이 부착되어 있다. 건물 왼쪽에는 높이 105.6m의 시계탑이 우뚝 솟아 있다. 시계탑에는 옌스 올센이 디자인한 천체시계가 설치되어 있다.


a  용과 황소가 싸우는 분수.

용과 황소가 싸우는 분수. ⓒ 이상기


시청에서 앞의 광장으로 나가려면 난간이 있으며, 이곳에는 청동으로 만든 세 마리 상상의 동물이 있다. 몸은 날개가 달린 용인데, 얼굴은 코뿔소 같기도 하고 쇠똥구리 같기도 하다. 아마 시청의 수호신으로 만든 모양이다. 광장의 왼쪽 끝에는 용과 황소가 싸우는 모습을 조각한 분수가 있다. 분수가 처음 세워진 것은 1904년이고,  용과 황소가 싸우는 형상은 1923년에야 만들어졌다.

수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의도와 맞지 않다고 해서 비판이 많았으나 현재까지도 별 문제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분수는 그 이후에도 네 번이나 자리를 옮기고 변형되는 수난을 겪었다. 분수를 보고 나서 우리는 시청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 동상으로 간다. 안데르센은 덴마크(Danmark)가 낳은 최고의 동화작가다.


안데르센 이야기와 티볼리 공원

a  시청옆 티볼리 공원 앞의 안데르센 동상

시청옆 티볼리 공원 앞의 안데르센 동상 ⓒ 이상기


사실 안데르센 동상은 시청 옆이 아닌 안데르센 거리에 앉아서 안데르센 성과 티볼리 공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동상은 헨리 루코-닐센에 의해 만들어져 1961년에 세워졌다. 우리는 이곳에서 안데르센과 기념촬영을 한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그의 동화를 읽고 자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이 코펜하겐을 찾은 것은 14살 때인 1820년이었다. 그는 목소리가 좋아 왕립극장의 배우가 되었으나, 변성기가 찾아오면서 창작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후원자인 요나스 콜린의 도움으로 스라겔세 문법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1822년 <팔라토케 무덤의 유령(The Ghost at Palnatoke's Grave)>이라는 책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a  안데르센이 살았던 니하운 20번지.

안데르센이 살았던 니하운 20번지. ⓒ 이상기


그는 헬싱괴르에서 1827년까지 대학을 다녔고, 1829년부터 다시 시와 소설 그리고 희극을 쓰기 시작했다. 1833-34년에 그는 독일과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여행했고 1835년 코펜하겐의 니하운 20번지에 정착하게 되었다. 1835년 그는 불후의 명작이 된 <동화(Eventyr)>를 처음 발표하였다. 이들이 모여 1836-37년에 책으로 발간되었다. 그러나 초반 반응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1837년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여행하면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의 연대감을 고취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는 1851년 이후에는 수많은 여행기를 남겼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스웨덴 여행 스케치>, <하르츠 기행>, <작센 기행>, <에스파냐 기행>, <포르투갈 기행> 등이다. 안데르센의 여행기는 보고 느낀 바를 적는 다큐멘터리일 뿐 아니라, 주제가 있는 철학이고, 재미가 있는 문학이었다.

a  티볼리 공원.

티볼리 공원. ⓒ 이상기


그는 또한 동화를 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1838년과 1845년에 동화집을 계속 냈다. 1845년에는 니하운 67번지로 이사했고, 1864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855년 그는 <나의 삶의 이야기(Mit Livs Eventyr)>라는 자서전을 출판하게 되었다. 1835년부터 안데르센 작품의 독일어 번역본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후 그의 작품은 계속 독일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안데르센은 160편 이상의 동화를 썼으며, 그것이 현재 8권의 전집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데르센이 바라보고 있는 티볼리 공원은 어린이를 위한 놀이공원 겸 테마 파크다. 1843년 8월에 처음 문을 열었으니 그 역사가 170년 가까이 된다. 이곳은 처음 도시 서쪽 외곽의 경사지였다. 처음부터 이곳에는 놀거리, 볼거리, 탈거리, 먹을거리가 잘 갖춰져 있었다. 1874년 중국 양식으로 된 판토마임 극장이 세워졌고, 1900년대에는 해적선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15년에는 나무로 만든 롤러 코스트가 설치되었다.

a  티볼리 공원의 안데르센성.

티볼리 공원의 안데르센성. ⓒ 이상기


2006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회전 그네(Himmelskibet)가 설치되었는데, 그 높이가 80m나 된다. 이곳에서는 시청 건물을 내려다볼 수 있다. 2009년에는 곡예비행기 버티고(Vertigo)가 운행되고 있다. 티볼리 공원에는 이와 같은 오락시설 외에 콘서트 홀과 야외공연장이 잘 갖춰져 있다. 2011년 이곳을 찾은 입장객수는 396만 명에 이른다.

니하운

a  니하운

니하운 ⓒ 이상기


니하운(Nyhavn)은 새로운 항구라는 뜻을 가진 덴마크어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이곳 항구 주변에 운하가 생기고 위락시설이 들어서면서 코펜하겐 도심과 바다를 연결해주는 관문이 되었다. 이곳은 한동안 어항과 무역항으로 번성했고, 선원들을 상대로 하는 영업이 성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다로 나가는 배가 점점 커지면서 그 역할이 점점 축소되었고, 2차 세계대전 후에는 항구로서의 기능이 외곽의 코펜하겐 항구로 이전되었다.

1977년 니하운은 오래된 배들이 정박하는 박물관 항구로 변해 관광명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니하운을 지나간다. 니하운의 길이는 400m다. 1681년 가장 먼저 지어졌다는 7번지의 집부터 17번지까지 집을 유심히 쳐다본다. 그 중 17번지 집에는 노란색 벽에 붉은 니하운 17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a  니하운의 닻.

니하운의 닻. ⓒ 이상기


니하운 20번지에는 안데르센이 살았다고 하는데, 안데르센 당시의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리모델링한 것 같다. 창문과 벽이 상당히 현대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벽에는 안데르센이 1835년 5월부터 이곳에 살았다는 명판이 붙어있다. 이곳 니하운에는 걸어 다니는, 버스 투어를 하는, 보트 투어를 하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니하운 300년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아말리아 궁전 방향으로 간다. 다리에는 커다란 닻(Mindeankeret)이 세워져 있다. 이 닻은 1951년 8월에 세워졌는데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이곳이 항구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2차 세계대전 때 죽은 1,600명의 덴마크 선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란다. 이곳에서 궁전을 가다 보면 덴마크 출신의 왕과 정치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단마크와 쾨벤하운 : 우리는 단마크와 쾨벤하운을 영어식으로 덴마크와 코펜하겐으로 부르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와 도시 이름을 단마크와 쾨벤하운으로 발음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단마크와 쾨벤하운으로 불러주는 게 맞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단마크와 쾨벤하운 : 우리는 단마크와 쾨벤하운을 영어식으로 덴마크와 코펜하겐으로 부르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와 도시 이름을 단마크와 쾨벤하운으로 발음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단마크와 쾨벤하운으로 불러주는 게 맞지 않을까?
#쾨벤하운 #크루즈 #시청사 #안데르센 #니하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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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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