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모여 함께 노래하며 일하세

[노래의 고향 15] 양지 스님이 남긴 향가 <풍요>

등록 2012.09.14 16:09수정 2012.09.1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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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의 '후원합니다 깨끗한 정치후원금' 현수막 아래에 '국민 대통합 함께사는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시뻘갛게 걸려 있다. ⓒ 정만진


거리마다 현수막이 나부낀다. 선관위의 '후원합니다 깨끗한 정치후원금' 현수막이 옅은 푸른빛 얼굴로 횡단보도에 걸쳐져 있다. 그 아래, '국민 대통합 함께 사는 대한민국'이 시뻘겋게 시민의 머리를 누르고 있다. 국민 대통합? 함께 사는 대한민국? 우리나라가 지금 그런 국가인가? 

'신라의 노래'인 향가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일하는 시간은 세계 최상위권인 반면 노동생산성은 세계 최하위권인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자'와, 7세기 신라 '백성'들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양지 스님이 남긴 <풍요> 때문에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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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묘사에서 발견된 (일명) '신라의 미소' 수막새. 양지 스님의 작품이 아닐까? ⓒ 정만진

'신라의 미소'는 마냥 행복한 얼굴인데

양지 스님은 선덕여왕 때 사람이다. <삼국유사>에는 '양지 스님은 조상과 고향을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대신 신묘한 방법으로 시주를 받은 스님이었다고 증언한다.

양지 스님은 시주받을 일이 생기면 석장(錫杖, 스님의 지팡이)에 포대를 걸었다. 지팡이는 저절로 시주할 사람의 집으로 날아가 포대를 흔들며 소리를 내었다. 포대가 차면 지팡이는 스님에게 돌아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지 스님이 계시는 절을 석장사(錫杖寺)라 불렀다. 석장사는 지금의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뒤편의 계곡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지 스님은 대단한 예술가였다. 그는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삼존, 천왕상, 전탑의 기와, 천왕사탑 아래의 팔부신장, 법림사의 주불삼존, 좌우 금강신 등을 만들었다. 또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도 썼다. 지금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석장사터 출토 '고행상'과 사천왕사터 출토 '사천왕상'이 스님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양지 스님이 남긴 향가 <풍요>는 불교적 노동요


<삼국유사>의 양지 스님 이야기 '양지사석(良志使錫)' 안에는 향가 한 수가 섞여 있다. 스님이 영묘사에서 장육삼존상을 만들 때 사람들이 진흙을 나르면서 불렀다는 노래다.

오도다 오도다 오도다
오도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동무들아
공덕 닦으러 오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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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터에서 발견된 '사천왕상' 벽돌. 양지 스님의 작품으로 알려진다. ⓒ 정만진

이 노래를 <풍요(風謠)>라고 소개한 삼국유사는 '지금(고려) 사람들도 방아를 찧을 때 부른다'고 증언한다. 풍요는 신라 때든 고려 때든  일하면서 부른 노동요였던 것이다.

'양지사석' 기사 중 '사람들이 앞다투어 진흙을 날랐다(爭運泥)'는 대목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사람들은 흙 나르는 일을 힘들어 하지 않았다. 가난하여 시주를 못 하고 그 대신 노동을 하는 것이 처음에는 서러웠지만, 불교 공사 거들기를 극락 가는 공덕 닦기로 보았으므로 모두들 모여 함께 일하는 동무가 되었고, 앞을 다투어 일에 매달렸다.

자신들의 땅을 불국토로 여겼던 신라인

신라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부처의 땅으로 보았다. '불국'사라는 이름, 승려가 되는 진흥왕 등은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상징한다. 신라 때 절터였던 곳이 지금도 전국 곳곳의 산꼭대기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운송 수단도 없던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험악한 산정에 절들을 지을 수 있었을까' 싶지만, 신라인들은 불교적 노동요인 풍요를 부르면서 기꺼이 힘든 불사에 동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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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륜사 석조. 신라가 남긴 가장 큰 석조물로, 경주박물관 뜰에 보관 중이다. ⓒ 정만진

영묘사 자리로 여겨지는 경주시 사정동 285-6번지에 가본다. '靈廟寺'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땅이다. 그런가 하면 이곳은 신라가 528년 불교를 공인한 이후 처음으로 절을 지은 흥륜사 자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적 15호인 이곳에서 발견된 석조는 지금 경주박물관 뜰에 보관되어 있다. 신라가 남긴 석조물(石造物) 가운데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석조(石槽)다. '영묘사의 불상을 만드는 데에 곡식 2만3700석의 비용이 들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실감나게 해주는 증거물이다.

신라 최대의 석조와 곡식 2만3700석은 영묘사 불상 제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동참했던가를 증언해준다. 그러나 그들의 노동은 극락 가는 공덕을 닦는 종교 행위였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21세기 한국의 노동자와 7세기 신라의 백성 중 누가 행복하게 살았을까? 가난했지만 함께 살아갔던 신라의 '백성'들과, 세계 경제 11위 안팎의 나라이지만 양극화로 고통받는 대한민국의 '국민'들 가운데 누가 더 사람답게 살았을까? 노동은 있어도 '풍요'는 없는 길거리에 현수막은 붉게 휘날리는데… '국민 대통합', '함께사는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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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 풍요의 현장 영묘사터. 신라 최초의 공인 사찰인 흥륜사의 터로 여겨지기도 해서 지금은 흥륜사라는 현대식 절이 자리잡고 있다. ⓒ 정만진

덧붙이는 글 | TNT뉴스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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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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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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