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에 물든 '숲의 사람', 어떤 영혼을 빚어낼까

[서평] 신화를 그리고 빚는 김봉준 화백의 <신화순례>

등록 2012.09.19 14:28수정 2012.09.1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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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순례> 표지 ⓒ 미들하우스

사람들은 그를 '민중미술가'라고 말했다. 낯익은 그의 목판화들에서는 그 엄혹했던 시절의 열정이 뚝뚝 묻어난다. 하지만 나는 그가 1999년 이후 흙을 빚어 만들기 시작했다는 테라코타들이 좋다. 피레네 언덕의 슬픈 전설을 품고 있는 여인, 가슴 한 쪽을 드러내고 아이를 안고 있는 여신, 선하고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그렁소 등 그가 흙으로 빚은 조각들 앞에 서있으면 가슴 속에서 가만히 따뜻한 기운이 올라온다.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 <신화순례>(미들하우스, 2012)라는 책을 냈다. 그 책을 읽으며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가 만든 흙 조각들은 그냥 단순한 '물질'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땅의 '영혼'이 들어 있었다. 돌과 나무와 흙을 조각할 때 그것을 그냥 단순한 물질로 보면 '썩은 양식'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고 했다.


나무와 돌과 흙에도 숨소리가 있고 영혼이라 부를 만한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의 작품 앞에 서 있을 때 가슴 가득 따뜻한 물이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바로 그 흙의 영혼이 작품에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흙의 영혼을 자신의 작품에 담아내는 사람이다.

원래 흙의 영혼을 작품에 담아내는 일은 신화 속 창세여신들의 몫이었다. 신화 속의 여신들이 성공적으로 인간을 빚어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처럼 흙에 여신의 영혼을 담았기 때문이리라. 그 지점에서 화가 김봉준과 창세여신들이 만난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 여신들의 영혼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난다.

원주 진밭마을의 신화미술관에서 신화의 주인공들을 되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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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고개(목판화 1982) ⓒ 김봉준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에서부터 북미 원주민들의 땅에 이르기까지, 그의 길은 멀고 아득했다. 하지만 그는 그 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숲 속의 나무 한 그루에, 허공을 가로지르는 바람 한 줄기에, 강가에서 살아가는 새 한 마리에, 발에 걸리는 돌멩이 하나에 깃들어 있는 영혼들을 만난다. 그 영혼들은 모두가 아득한 고대로부터 전해져오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그는 그 이야기들에 천천히 물들어갔다.

제이 그리피스는 오스트레일리아 그레이트샌디 사막을 그린 두 장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한 장은 유럽인이 그린 지도인데, 아무런 특징도 없고 색도 없는 단조로운 지형으로 묘사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똑같은 장면이 원주민 예술가들의 그림 속에서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알록달록한 빛깔과 움직이는 생명, 그리고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공허하거나 빈 공간, 혹은 황무지의 개념이 없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빈 공간'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만이 생명의 가치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사막의 모래밭에서 살아가는 도마뱀 한 마리에까지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그곳은 온갖 놀라운 것들로 가득한 생명의 땅이다.

김봉준은 그 순례의 길에서 그러한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만났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과 책 속에 담았다. 아니, 그뿐 아니다. 그는 실제로 신화 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먼 길을 떠나 마을 사람들을 위해 불을 구해오거나 곡식의 종자를 찾아온 용감한 청년처럼, 그는 자신이 순례 길에서 만난 영혼들을 진밭마을로 모시고 왔다. 그리고 그곳에 신화와 세상 모든 것들의 영혼이 만나 공생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합리적 이성주의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대극을 통합하는 신성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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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템 상징 조각 연작 중 그렁소(테라코타 2001) ⓒ 김봉준


그는 자신의 책이 신화학 연구서는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의 책은 그 어떤 신화학 이론서보다 더 치열하다. 자신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자신이 향하고자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아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같은 근대주의 문명의 쌍생아"이며 "집중화된 도시를 건설하고 산업경제 시스템을 도입하여 생산력 제일주의를 도모한다는 면에서" 그 둘은 결국 같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예리한 이론가의 모습이 보인다.

또한 이 책에는 변화해온 그의 사상의 궤적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투쟁, 부정의 역사가 아닌 긍정의 역사를 갖고 싶어"했던 그는 마침내 신화가 "합리적 이성주의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대극을 통합하는 신성한 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그는 환웅과 웅녀 신화조차 이제는 건국신화라는 테두리에서 풀어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감히' 말한다.

국가주의의 그늘, 이데올로기적 경향성에서 신화를 풀어줄 것을 그는 적극 주장한다. 우리 스스로 축소시켜버린 신화 세계를 북만주 일대에서부터 연해주, 유라시아 대륙 전체, 나아가 북미 원주민 지역까지 확장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공동체의 복원, 신화와 마을을 창조적으로 결합시키는 '재신화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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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테르 여신상(테라코타 2003) ⓒ 김봉준


현대의 환경 문제는 인간의 탐욕과 연결된 거대 자본과 깊은 관련성이 있고, 인간 소외 문제 역시 '승자 독식 사회'가 만들어낸 경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신화가 품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대칭성사회'의 인식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로도 확장된다. 그래서 그는 이제 신화가 움트고 자라났던 숲의 문명을 되살릴 것을 낮은 목소리로 권한다.

신화가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다고는 물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신화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신화가 갖고 있는 신성한 힘을 자각하고, 인간 그리고 자연과 소통하고자 한다. 그는 그 소통의 방법으로 신화와 마을을 창조적으로 결합시키는 행동을 선택했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재신화화'이다.

사실 신화는 동아시아의 수많은 작은 마을들에서 오랜 동안 마을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강한 힘으로 작동했다. 이제 우리가 내쫓은 수많은 신들을 돌아오게 해야 한다. 그들이 공동체를 지켜주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샤먼의 전통이 살아 있었던 시대, 샤먼은 치유자이면서 초월자였고 지혜로운 사람이면서 동시에 많은 지식을 갖고 있던 전지적 지식인이었다. 순례의 길에서 돌아온 '숲의 사람' 김봉준에게서 나는 그런 전지적 지식인의 모습을 본다. 알록달록한 신화의 빛깔에 곱게 물든 그가 그의 숲과 마을에서 또 어떤 영혼의 흙 조각들을 빚어낼지, 가만히 지켜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 <신화순례> 김봉준 씀, 미들하우스 펴냄, 2012년 9월, 416쪽, 2만 원
* 글쓴이는 신화학자로, <중국 소수민족 신화기행> 저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신화순례> 김봉준 씀, 미들하우스 펴냄, 2012년 9월, 416쪽, 2만 원
* 글쓴이는 신화학자로, <중국 소수민족 신화기행> 저자입니다

신화순례

김봉준 글.그림,
미들하우스, 2012


#신화순례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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