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 바이패스(Truck Bypass)다리만 건너면 일리노이 주에서 미주리 주로 넘어간다.
최성규
공중보건의로 근무할 당시 아는 형님이 자전거 여행을 하다 들렀던 기억이 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었다. 트럭 하나가 뒤에 따라 붙었다. 거리를 좁히던 차량이 옆으로 지나가면서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순간적인 풍압에 못 이겨 휘청대던 순간이 며칠이 지났건만 그에게는 생생했다.
같은 입장이 되고 보니 실감이 난다. 무엇보다도 미국 트럭은 한국에 비해 풍채부터 우월하다. 영화 <트랜스포머>(Transformer)에 등장했던 육중한 떡대가 몸을 들이밀 때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음속으로 주행하는 전투기 뒤에서 약간의 간격을 두고 소리가 쫓아가듯, 트럭이 나를 지나치고 잠시 후. '팡'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온 몸을 휘감아든다. 정신을 못 차릴 만한 풍압. 정신 단디 차리지 않으면 핸들이 꺾여 사고가 날 수도 있다.
교통량이 줄어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몰아쉰다. 저쪽 언덕에서 자전거 한 대가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접선 형태를 갖춘다. 나는 오른쪽 갓길에, 그는 왼쪽 갓길에 자전거를 각자 세우고 안전선을 확보했다. 이차선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영국에서 날아온 이 친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을 향하고 있다. 이제 절반 이상은 마친 셈.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Trans America Trail)을 정규반에 비유하자면 이렇게 웨스턴 익스프레스(Western express) 코스는 속성반이다. 콜로라도에서 와이오밍, 몬태나, 아이다호, 오리건 주를 밟지 않고 유타, 네바다, 캘리포니아를 거치면서 횡단에 필요한 거리를 455마일(732km) 단축시키기 때문. 록키 산맥과 옐로 스톤(yellow stone) 국립공원의 험난한 산세를 겪지 않은 그들 앞에는 애팔래치안 산맥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헤어지기 전 내 앞길에 언덕이 많다는 귀띔을 주었다. 참말이다. 스무고개도 아니고 언덕이 왜 이리 많은지. 파밍턴(farmington)을 지나기 전까지 평균 속도가 8마일 밖에 나오지 않았다. 짐을 획기적으로 줄인 이후로 가장 느린 속도다. 결국 미주리도 내 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힘껏 외쳐줬다. 미주리! 이 XXX.
6월 19일 화요일Pilot knob, MO - Eminence, MO70mile = 112km땅에게도 인격이 있다면 미주리 주는 아마 고약한 심보를 가졌을 것이다. 무수한 언덕을 오르내리며 욕을 수없이 해댔다. 오르막과 오르막 사이가 너무 짧아 내리막의 여유를 맛보기도 전에 다시 힘겹게 페달을 밟아야 한다.
바람까지 가세. 산맥이 없어서인지 다른 지역에 비하면 더욱 거세다. 정도껏 불면 시원하기라도 할 텐데 자전거를 양 옆으로 흔들어 댈 때는 할 말이 없다.
언덕을 적어도 스무 개 이상은 넘었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내지르려는데 맞은편에서 누군가 자전거를 끌고 올라온다. 트레일러에다 짐을 실은 자전거 라이더다. 수염이 허옇게 나신 장년층이 미국 횡단에 도전하는 중.
오리건 주 애스토리아(Astoria)에서 시작해 버지니아 주 요크타운(Yorktown)으로 가고 있다. 더운 날씨에 자전거를 끌고 오르느라 온 몸은 땀 범벅이다. 미 해군에서 복무하다가 그만둔 지 7주째. 대체복무를 최근에 마친 나로서는 그 누구보다 동질감을 느낀다.
혼자여서 외로움을 느끼다가도 길 위에서 많은 솔로 라이더를 보면 위안을 얻는다. 함께 하지는 않아도 이 길 어딘가 나처럼 페달을 굴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Have a safe trip!(안전한 여행 하세요)"서로 행운을 빌어주며 자전거에 올라탔다. 만나면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구절은 자전거 여행을 하다 보면 절로 실감한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사람을 만나도 대화를 오래 끌기 어렵다. 그저 달릴 뿐이다. 웬만한 상황이 아니라면 안장에서 내리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