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가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다

[처가월드를 말하다①] 처가의 간섭에 '묘한 부담'... 그래도 시월드만 하겠는가

등록 2012.09.29 11:28수정 2012.09.29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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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는 시래깃국도 싫어한다'는 말이 있다. 시래깃국의 '시'자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시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종영된 KBS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도 방귀남(유준상 분)이 친부모를 찾은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시댁 바로 앞에 살며 '시월드'(시부모, 시누이처럼 '시'자가 들어간 사람들의 세상, 즉 '시댁'을 말하는 신조어)에 빠져버린 차윤희(김남주 분)의 고된 생활을 그려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샀다.

'사'자(字) 직업을 가진 며느리가 생활비 대부분을 친정 식구들에게 쓰는가 하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시부모를 전혀 돌보지 않는 것도 막장드라마의 단골메뉴. 또 드라마에서는 항상 상위 0.001%의 완벽남과 평범한 여자의 사랑이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된다.

처가와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 "틀렸다"

a  얼마전 페이스북에서 주고받은 대화내용.

얼마전 페이스북에서 주고받은 대화내용. ⓒ 김학용


내 아내도 완벽한 남자와의 결혼을 사다리 삼아 '신데렐라'처럼 신분 상승(?)을 꿈꿔 봤을 테지만 불행하게도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아내 눈에 비친 내 등급은 결혼정보회사 기준으로 5~6등급 쯤에 머물렀으리라. 그건 나도 마찬가지. 결혼 한방으로 인생역전에 성공하는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다만 '처가 덕'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내심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14년을 살아보니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가 나에게 주는 심리적 이득은,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도 내가 버는 돈 이상이었다. 마누라가 예뻐 보이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하지 않던가? 아내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나 '호구'라며 흉보는 풍토는 정말이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이상한 습성 중의 하나다.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지만 '처가와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는 이 말, 내가 볼 땐 틀렸다. 그렇게 나이 많이 먹은 것은 아니지만, 한두 살 더 먹어갈수록 처가가 좋다. 남성들이여, 그렇다고 나에게 일방적인 돌팔매질을 하지는 마시라.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 하지 않았던가.

남자들은 기껏 나를 고생해서 키워 준 어머니한테 마누라란 여자가 하는 행동과 말에 대부분 속이 뒤집히고 만다. 하지만 내 어머니가 나를 고생해서 키웠지, 아내를 그렇게 키웠는가? 배려나 이해 없이 아내에게 먼저 너무 많은 걸 바라니까 '시월드'라고 하는 것이다.


며느리라 우울해, 아내라 우울해, 임신해서 우울해, 엄마라 우울해, 차 안 사줘서 우울해, 아들 시험 망쳐 우울해, 명절이라 우울해, 명절 끝나서 우울해…. 그렇다. 아내는 피가 다른 사람이니 배려해 줘야 하고, 연약한 여자니까 배려해 줘야 하고, 맨날 우울하다고 하니 또 배려해줘야 하고, 그러다 한 번 시댁 때문에 수틀리면 대책이 없으니 평생 배려해줘야 하는 것이다.

여자들이 '시월드'가 짜증난다고 하는 것은, 대접이나 배려는 커녕 언제나 하녀처럼 일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처가는 사위한테 잘해야 딸이 대접받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사위에겐 별로 터치를 안 하는 편이지 않는가.


그런데 시댁은 어떤가? 며느리 기를 먼저 죽여 놔야 자기 아들이 대접받는 줄 알고 마구잡이로 대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 특히 명절이면 무보수 명예직의 도우미로 착출되어 죽도록 일만하다 지치기 일쑤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집 풍경만 봐도 그렇다. 1주일 내내 직장에서 시달린 아내는 명절이라 시댁에 가서 일만 하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데, 나는 처가 가서 장모님이 차려주는 음식 먹으며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있다 오지 않았는가.

먹는 것, 입는 것까지 공유하는 처가

a  KBS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한 장면.

KBS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한 장면. ⓒ KBS


'처가월드'까지는 아니지만 난들 불만이 없겠는가? 유난스러울 정도로 처가 식구들은 가족 모임이 잦다. 결혼 초기에는 자주 얼굴보고 편하게 지내는 처가 식구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이것도 너무 잦으니 오히려 부담스럽다. 자주 모이다 보니 시시콜콜한 집안일은 모두 처가와 공유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참견과 조언까지 듣게 되니 어쩔때는 잔소리로 여겨질 때도 있다.

"오늘 뭐 해? OO마트 세일한다는데 가을 옷이나 하나 보러 갈래?"

여가를 아내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처형과 처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며 먹는 것, 입는 것까지 공유한다. 이러니 우리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훤히 꿸 정도다. 내가 몇 시에 퇴근을 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이번 주말에는 뭘 하는지 처가 식구들이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찔리는 건 없지만 한 번씩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던 우리 가족의 겨울 여행지는 물론 아내가 명절에 시댁에 언제 가서 언제 오는지 등 나도 모르는 스케줄까지 공유하고 있다는 게 가끔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또 처형이나 처남 집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을 경우, 내가 인지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거의 몇 달이 걸리지만 '왜 나만 모르고 있었냐'며 항의도 제대로 못했다. 친정 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기 커지는 아내의 목소리와 파워에 난 그저 움찔하고 말았다. 아무리 가족같이 살갑게 굴어도 결정적일 때 느끼게 된다.

'아, 난 역시 사위구나.'

그래도 이 모든 게 '간섭'이 아닌 '관심'이라 생각하고 싶지만, 병풍처럼 둘러져 소외받는 느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특히 아내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고 내가 따르는 게 일상이 돼 버렸다. 오늘도 퇴근길에 휴대폰이 울린다. 빨리 처형 집으로 오란다.

"어? 나 오늘 약속 있는데?"
"뭐? 내가 며칠 전에 말했잖아! 언니하고 오빠집하고 밥 먹기로 한 거…."
"어… 언제? 그랬나…"
"빨리 와!"
"……."

아무리 그래도 '시월드'만 하겠는가

a  '처가와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는 말은 틀렸다. 하지만 시시콜콜 모든 걸 공유하는 처가월드에서 사위는 가끔 불편하다.

'처가와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는 말은 틀렸다. 하지만 시시콜콜 모든 걸 공유하는 처가월드에서 사위는 가끔 불편하다. ⓒ sxu


일방적으로 최대한 빨리 오라는 점을 강조한다. 짧은 대화지만 이건 분명 '강요된 복종'과 '조건 없는 희생'을 강요하고도 남는다. "깜빡 잊고 회식 잡은 건 미안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약속이 있다면 오늘 아침정도는 다시 말해줬어야지"라고 대꾸라도 해봤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말은 벌써 꿀꺽 삼키고 말았다. 하기야 어차피 항변해봤자 싸우는 게 아닌 일방적으로 혼나는 꼴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처가의 구성원을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을 하니 언제부터인가 편해졌다.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이런 날은 아내와 처가를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하니 관계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됐다.

이번 추석에는 한 번쯤은 처가의 입장을 깊게 생각해보고 조건없는 희생으로 봉사해보는 것도 명절을 맞는 진정한 남편의 자세가 아닐까. 혹시 당신은 지금 일방적으로 처가 식구들의 일원이 되기를 요구받으며 묘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가? 아무리 그래도 '시월드' 만큼 하겠는가.
#처가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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