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간 남편 편지, 가슴에 품고 울기만 했어요"

충북 음성 문학동아리 '시갈골' 할아버지 할머니 시집 출간

등록 2012.10.12 14:08수정 2012.10.1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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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충북 음성군 노인복지관 어르신 시창작교실에서 시를 배우고 있는 시갈골문확회 회원들이 자신들이 쓴 시가 걸린 복지관 계단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충북 음성군 노인복지관 어르신 시창작교실에서 시를 배우고 있는 시갈골문확회 회원들이 자신들이 쓴 시가 걸린 복지관 계단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이화영


평균나이 73.6세. 충북 음성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9명은 최근 <갈 수도 머물 수도 없는 그리움>이란 두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


이들은 2010년 1월 음성군 노인복지관의 시 창작교실에서 만나 같은 해 8월 '시를 갈고닦는 골짜기'란 의미가 담긴 '시갈골'이란 문학 동아리를 만들었다. 시 창작교실 강사인 증재록 시인의 지도를 받고 2010년 10월 첫 번째 시집 <벌 나비 날아들면 열매 맺는다>를 출간했다.

시갈골문학회가 펴낸 두 번째 시집에는 1인당 7편에서 11편까지 모두 95편의 시가 담겼다. 이들의 시에는 투박하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삶이 그대로 녹아있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또 일상생활과 그 자취를 시로 그렸다는 것이 공통분모다.

임기화(70) 시갈골 문학회장은 발간 인사에서 "생의 공허하고 무력한 날을 시를 통해 치유하고, 지친 심신 저 깊은 곳에서 숨죽이며 번민하던 수많은 사연을 하나 둘씩 원고지에 풀어내 봤다"며 "감히 시라고 말하기 송구하지만 진솔한 마음 모아 한 권의 작은 책으로 묶어 냈다"고 말했다.

a  음성군 노인복지관 어르신 시창작교실 강사인 증재록 시인이 강의를 하고 있다.

음성군 노인복지관 어르신 시창작교실 강사인 증재록 시인이 강의를 하고 있다. ⓒ 이화영

증 시인은 발문을 통해 "상상, 정서, 사상, 운율, 함축적 언어 등 시적 그물망이나 심미적 관점에서는 헐겁지만 진실성 하나로 감동을 준다"며 "지식보다는 70~80여 년 삶의 긴 여정에서 나온 지혜의 깊이가 그대로 운율을 탄다"고 밝혔다.

이 문학회는 시집 출간 말고도 경사가 생겼다. 충북노인종합복지관에서 주최한 2회 충북노인문화예술제 문예부문에서 정연기(72) 회원이 대상, 허희숙(70) 회원이 우수상에 선정됐으며 회원 6명은 입선의 영광을 안았다. 오는 13일 오후 청주 예술의전당에서 상을 받는다.


시갈골문학회 회원으로는 2008년 '봄꽃은 희망이고 가을꽃은 행복이다'란 시집을 펴낸 한충자(82·여) 시인, 2011년 '늦게 피는 꽃도 향기 짙어'란 시집을 출간한 조순례(73·여) 시인, 2011년 '풀 섶 헤치고 마주친 이야기'를 펴낸 정연기(72) 시인을 비롯해 이명재(72·여), 김종태(76), 임기화(70·여), 허희숙(70·여), 이화섭(72·여), 이영자(76·여) 시인 등이 활동하고 있다.

까막눈에서 글 배워 시집을 내다


a  한충자 시인을 비롯한 시갈골문학회원들이 시창작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한충자 시인을 비롯한 시갈골문학회원들이 시창작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 이화영


시갈골문학회에서 최고령인 한충자(82) 시인은 9년 전인 2003년 노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한글학교에서 글을 배워 '까막눈'을 탈출했다. 이어 75세 때인 2005년 이 복지관에서 개설한 어르신 한글쓰기 반에 등록해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 시인은 시를 배우기 시작한 지 2년 후인 2008년 한글쓰기 반 학생 중 처음으로 85편의 시가 담긴 <봄꽃은 희망이고 가을꽃은 행복이다>란 개인 시집을 펴냈다. 2010년 2월에는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아 무극초등학교(음성군 금왕읍) 졸업식에서 오희진 교장으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2011년에는 충북노인종합복지관이 주최한 1회 충북노인문화예술제 문예부문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1931년생인 한 시인은 일제치하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엄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는 교육을 시켰지만 "여자가 글 배우면 시집가서 시집살이 한다고 편지질이나 한다"며 글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글이 너무 배우고 싶어 형제들에게 얼씬거리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그렇게 글을 배우지 못한 채 결혼했고, 공부가 소원이었던 한 시인은 시집가면 남편에게 배우겠다고 다짐했지만 사정은 생각했던 것처럼 녹록치 않았다.

"6남매 중 맏이와 결혼하면서 시할아버지와 시부모를 봉양해야만 했고 어린 시동생들 키워야 했기 때문에 공부할 형편이 되지 못했지. 어른들 모시고 시집살이 하는데 세월을 다 보냈어요."

a  한충자 시인이 시창작교실에서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려앉은 손으로 칠판의 글씨를 받아 쓰고 있다.

한충자 시인이 시창작교실에서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려앉은 손으로 칠판의 글씨를 받아 쓰고 있다. ⓒ 이화영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군대를 갔고 편지를 보내왔다. 글을 읽거나 쓰지 못했던 한 시인은 남에게 읽어 달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웠고,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다.

"무슨 내용인지 몰라 남에게 내보이기가 창피했어요. 또 젊은 사람이 글을 모른다고 노인에게 갖다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린이에게 읽어 달라고 하기도 부끄러웠지. 그저 편지를 가슴에 품고 울기만 했어요. 그렇게 모아놨다가 친정 동생이 왔을 때 '매형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내용을 몰라 가슴에서 불이 나니 읽어 달라'고 했어요. 결국 내용은 평범한 안부 편지였어요."

결혼해 시할아버지를 25년간 모셨고 시아버지는 92세에 돌아가셨다. 시동생들과 자식 5남매를 모두 출가 시키고 나니 그녀의 나이는 70세를 훌쩍 넘겼다. 102세인 시어머니는 생존해 계시고 근력이 한 시인보다 좋단다. 조금 여유가 생기자 미뤄뒀던 공부를 떠올렸다.

"한숨 돌리고 나니 글 배울 욕심이 생겨서 한글 잘 아는 사람에게 배울 생각했지만 선생님을 찾기도 그렇고 시간이 안 났어요. 그러던 중 이웃으로부터 노인복지회관에서 글을 가르쳐 준다는 말을 듣고 '내가 죽어도 한글은 깨치고 죽을 것이다'라고 각오하고 노인복지관을 찾았어요."

한 시인은 굳은 각오를 하고 복지관 앞에 섰지만 창피한 마음에 선뜻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이 70이 넘도록 글도 몰라 공부하러 왔다'고 흉볼까봐 얼굴이 화끈 거렸다. 한참을 서 있다가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복지관으로 들어섰다.

"막상 교실에 들어서서 학생들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까 나보다 얼굴도 잘생기고 옷들도 훌륭하게 입은 사람들이 앉아 있더라고. 그제야 마음이 놓였어요. '저런 사람들도 하는데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괜찮다.' 생각하고 그래서 시작하게 됐어요."

5척 단신의 한 시인은 음성군에서도 오지인 생극면 하루동 마을에서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복지관에 갈 수 있는 번거로움과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았지만 한글을 배우겠다는 열정에는 장애가 되지 못했다. 한글교실이 열리는 날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았고, 배운 지 2년 만에 간신히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편지로 사랑고백

a  노인복지관에서 글을 배워 시를 쓰고 있는 한충자(오른쪽) 시인과 이명재 시인

노인복지관에서 글을 배워 시를 쓰고 있는 한충자(오른쪽) 시인과 이명재 시인 ⓒ 이화영


그 당시 복지관에서 한글 배우는 학생을 대상으로 아무나 좋으니 편지를 쓸 것을 권유했다. 편지 얘기를 꺼내던 한 시인은 감정이 복받친 듯 말문을 이어가지 못하다가 결국 눈물을 보였다.

"편지를 써놓고 차마 읽지를 못했어요. 진짜 내가 쓴 건가 싶기도 했거니와 사연이 있었어요. 시할아버지와 시부모, 5명의 시동생, 자식 5남매 키우면서 우리부부는 얼굴 마주치고 제대로 웃지도 못했어요. 어른들 모시다 보니 흉잡힐까봐 서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눈치만 봤지요. 그러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70이 넘어 편지로 사랑한다는 말을 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워요."

이 편지글은 한글교실 반에서 2등을 차지했고 부상으로 주전자도 받았다.

"진짜 살맛이 났어요. '공부하니 이렇게 좋구나, 내가 써서 당선된 건가' 의심되기도 했어요. 글을 깨치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버스를 타더라도 남에게 묻고 않아도 되고 간판도 다 읽을 수 있고 정말 뿌듯했어요."

한글교실을 마친 한 시인에게 민요나 장구 배우는 것 등을 안내했으나, 한 시인은 그곳으로 가면 그동안 공부할 것 다 잊어버릴까봐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고 이런 것에는 취미가 없다" 해서 한글쓰기 반을 소개해 줬다. 여기서 증 시인을 만나 시를 배우게 됐고, 시집까지 출간하게 됐다.

"내가 글에 얼마나 환장을 했는지 다른 학생은 다 갔는데도 선생님을 못 가게 붙들고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2년을 배우고 시집을 냈지. 처음에 시집 낸다고 하니까 자식들은 '가문의 영광'이라고 좋아했는데 남편은 '소학교도 못나와 이제 겨우 글 배웠는데 시집 낸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반대를 했어요. 증재록 선생님이 집까지 찾아와서 남편에게 '이렇게 시 쓰는 분이 없고, 시집을 내도 된다'고 설득해 결국 책을 출간했어요."

시집이 나오고 남편에게 책을 건네자 그저 씩 웃고 말았다. 표현에 인색한 남편은 사랑 편지를 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과 주변 사물에서 시상을 떠올린다는 한 시인은 더 열심히 공부해 두 번째 시집 출간을 꿈꾸고 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사연이 많았고, 길을 걷다가 이상한 사물이나 풀을 보고도 시상을 떠 올립니다. 이런 것들을 글로 옮기니 시가 되더라고요. 더 노력하고 공부해서 아름다운 시집 내 보는 것이 마지막 꿈이에요."

수박 농사를 짓는 이명재(72) 시인도 한 시인과 같이 노인복지관에서 글을 배워 시를 쓰고 있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늘 마시는 공기처럼 대수롭지 않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얼굴을 붉게 만드는 부끄럼이고 생전에 풀고가야 할 절박함이다. 아래는 한충자 시인의 '내 인생길'이란 작품이다.

내 인생길

한충자

험한 길 다듬지도 못하고
거친 길 깎아내지도 못한 내 인생
수십 년 땅을 파도
금은 보이지 않고 자갈만 널려있다
빛바랜 자갈은 메밀꽃 핀 것 같다
승용차는 달리다 길이 험하면 되돌아가기나 하지
내 인생길은 돌아갈 수 없다
잠시라도
봄꽃 피는 행복과
가을의 풍요로운 꿈길이라도 걷고 싶다
초롱초롱했던 눈동자 흐려지고
맑았던 정신도 뜬 물 같다
아서라 마서라
묵정밭 일구면 일굴수록
가슴만 더 답답해지니
황금물결 들판을 바라보자

a  시갈골문학회원들이 시창작교실에서 증재록 시인으로부터 수업을 받고 있다.

시갈골문학회원들이 시창작교실에서 증재록 시인으로부터 수업을 받고 있다. ⓒ 이화영


a  음성군 노인복지관 어르신 시창작교실 강사인 증재록 시인이 강의를 하고 있다.

음성군 노인복지관 어르신 시창작교실 강사인 증재록 시인이 강의를 하고 있다. ⓒ 이화영


a  이명재 시인이 달력 뒷면을 이용해 습작을 했다.

이명재 시인이 달력 뒷면을 이용해 습작을 했다. ⓒ 이화영


#한충자 #시갈골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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