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1일 콘크리트로 덮인 청계천이 47년만에 복원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수도 한양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설상가상 숙종 대에는 전국에 걸친 대기근으로 지방의 인구가 대거 한양으로 향한다. 급기야 수도 한양은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수용의 한계가 드러나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발생한다. 일정한 직업 없이 걸식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고 날품팔이를 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 사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조선 정부의 골칫거리로 등장한다. 도시 빈민층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형성된 것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들을 구휼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그래서 영조는 진휼청에 곡미 1만석과 벼 5만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그들을 구휼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이내 서울과 지방의 창고가 비어버리고 지방에서 한양으로 유입되는 빈민의 수는 줄지 않았다. 이에 영조 17년(1741) 3월 11일 좌의정 송인명은 한양으로 몰려드는 빈민들의 한양 수용을 막아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영조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떠나지 않으려 하는 백성은 받아들여 구휼케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한양에 도시 빈민층이 계속 늘어나자 그들을 구휼하는 문제와 더불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청계천의 오염과 홍수였다. 인구가 계속 늘어나자 하수량이 늘어나고 남산 일대의 수목도 땔감으로 마구 남벌되었다. 또 남산의 일부가 경지로 개간됨에 따라 하천으로의 토사 유입량도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장마기가 되면 많은 비가 내려 홍수로 인해 청계천이 범람하여 가옥과 인명의 피해가 매우 컸다. 그리하여 영조는 궁리 끝에 청계천 준설 공사를 지시했다. 영조 27년(1751) 11월 10일 예조참판 홍봉한이 아뢰길,
"성중의 개울이 거의 모두 막혀 매년 여름 장마철을 당하면 개울가에 사는 백성들이 피난 갈 준비를 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더러는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발생하기도 하니, 만일 한성부로 하여금 방민(坊民)과 삼군문(三軍門)을 출동시켜 힘을 합치게 한다면 막힌 것을 뚫을 수 있을 것입니다."이에 영조는 이듬해 봄, 개울을 소통시켜 뚫을 것을 명하고 그에 앞서 공사비용과 준설 기계를 미리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MB의 청계천 복원 사업과 4대강 사업MB는 서울시장 재직 시절 청계천 복원 사업과 대통령 재임 시엔 전국적으로 4대강 사업을 실시한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청계천로와 청계고가로의 구조물 노후화에 따른 안전문제의 근원적 해소, 환경 친화적인 도시 공간 조성, 서울의 역사성과 문화성 회복, 장기적 주변 개발을 통한 강남과 강북의 균형 발전 도모를 목적으로 한 사업이었다. 복원 사업 초기에는 사업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받아 많은 시민단체와 저명인사들의 지지가 있었다. 하지만 공사과정에서 드러난 문화재 파괴와 일방적인 '속도전'으로 인해 사업의 목적성을 의심 받게 되었고, '콘크리트 어항', '시민혈세가 흐르는 강'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2년 남짓의 기간 만에 청계천 복원 공사를 마무리 한다. 4대강 공사에 못지않은 엄청난 속도전이었다.
MB는 대통령 후보 시절 '대운하 사업'을 통해 한국 경제의 부흥을 일으키겠다는 야심찬 공약을 발표한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민들의 반대와 저항에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공약을 수정했고 대선에서 승리한 후 군사전략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한반도 전역에서 이루어진다. 정부는 2009년 6월 8일 4대강 정비 사업 종합 계획이라는 것을 발표한다. 이 계획에 보면 4대강 살리기의 5대 핵심 과제라는 것이 있다.
'물 부족에 대비한 수자원 확보, 200년 빈도 이상의 홍수에 대비한 홍수조절용량 확보, 본류 수질 평균 2급수로 개선, 하천의 다기능 복합 공간 개조, 지역발전을 위한 연계사업'
한국형 녹색 뉴딜 사업이란 거창한 기치를 내걸고 사업을 실시했지만, 사업 초기부터 국민의 반대로 포기를 선언한 한반도 대운하 사업의 명칭만 바꾼 것이라는 의혹이 시민단체와 언론사를 중심으로 제기되었고 사업 과정에서도 수많은 문제점이 드러나 사업 중단을 요구하는 여론이 형성되었지만 MB정권은 소통의 귀를 닫고 일방적으로 사업을 추진해나간다.
영조와 MB의 사업 추진 과정, 달라도 너무 달라1752년 1월 27일 영조는 광통교로 나가 백성들에게 청계천 준설 공사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나는 민력(民力)을 거듭 지치게 할까 걱정했다. 그런데 이제 보건대, 막혀 있는 것이 이와 같고 또 성을 지키려면 시내를 파내는 것이 더더욱 급선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성들이 대답하기를 "신 등이 어렸을 적에는 기마(騎馬)가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지금은 다리와 모래가 서로 맞닿게 되었습니다. 전에 일꾼을 동원해 깨끗이 파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또 이렇게 막히게 되었습니다."이렇게 영조는 대역사를 추진하기 전에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들었고, 그 사업의 명분과 정당성을 얻었다.
하지만 이에 반해 MB의 사업 추진 스타일은 완전 정반대였다. 그의 4대강 사업은 편법과 탈법의 온상이었다. 댐 하나, 도로 하나를 건설하려 해도 경제성 분석,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해야 한다. 하지만 MB는 공사의 신속성을 위해 국가재정법 등 법령을 무시했다. 4대강 추진 반대 단체가 법원에 소송까지 냈지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국민의 대다수가 이 사업에 대해 반대를 했지만 MB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민주적 절차까지 무시한 채 22조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을 토목공사에 쏟아 부은 것이다.
MB의 청계천 복원 사업도 매한가지였다. 전문가들과 환경단체는 하천을 덮은 콘크리트 관으로 인공적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방식은 '콘크리트 수조'에 불과할 뿐이지 절대 친환경 사업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콘크리트 바닥에선 물고기의 산란이 어렵고 녹조현상이 자주 일어나 생태계가 크게 훼손될 것이라고 경고를 보냈다. 또한 청계천 공사 과정에서 나온 조선시대 석축들을 중랑구 하수종말처리장에 마구 방치해 논란을 야기했고 급기야 역사학자와 문화재 전문가들도 MB의 청계천 복원 사업은 복원이 아닌 역사와 문화재 파괴 행위일 뿐이라고 질타했다. 빗발치는 경고와 질타를 무시한 채 청계천 사업은 전광석화로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위원들이 사퇴를 하고 MB를 문화재보호법 위반과 직무유기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기에 이른다.
영조는 백성들의 의견을 물은 뒤 준설 공사는 춘궁기에 하도록 지시한다. 춘궁기엔 백성이 식량이 모자라 고통 받을 시기라 노역 일당으로 받은 돈으로 그들을 구휼하도록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청계천의 범람 문제는 여름철에 집중적으로 발생하기에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춘궁기에 공사를 하도록 지시를 한 것이다. 공사 준비가 마무리 단계에 왔을 때 영조는 명정전 월대에 나가 보았다. 그때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살펴보면,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갔는데, 평시서(平市署) 제조(提調) 홍봉한(洪鳳漢)이 시민(市民)을 인솔하여 들어오자, 하교하여 위로하고 유시(諭示)하였으니, 대개 내를 파는데 자원하여 성책(成冊)된 자가 무려 1만여 인이 넘었기 때문이었다."준설 공사는 영조 36년(1760) 2월에 시작해 4월에 끝났다. 이 공사에는 수많은 백성이 동원되었고, 경비 역시 현재 가치로 환산해 약 8억 원 이상이 들어갔다. 영조는 백성들이 공사로 인해 고통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으면 안 된다고 하여 그들에게 노임을 지급하고 공사를 재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한 준설 공사 이후 그 효과를 지속하고 오물이나 모래가 쌓여 수로가 막히는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준천사(濬川司)라는 상설기관을 설치했다. 해마다 준천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는데, 가능하면 춘궁기 백성을 먹거리가 없어 고달픈 시기에 실시하도록 했다.
MB의 4대강 사업은 22조 원이 투입되는 단군 이래 역사상 가장 큰 토목사업인데도 임기 내에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신념하나로 무리한 일정의 공사를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환경은 파괴되어 물고기 떼가 집단 폐사를 하고 수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4대강 사업 기간 중 너무나 무리한 공사 진행 속도와 안전 불감증으로 희생당한 노동자가 무려 19명에 이른다고 한다. 4대강 사업은 물고기와 사람에게만 피해를 준 것이 아니라 올 여름, 예년과 같은 집중호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경지에 들어찬 물이 4대강 제방공사 때문에 제때 빠지지 않아 애써 가꾼 농사를 다 망쳐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낙동강 유역 철새 도래지를 찾아오는 철새의 개체 수가 무려 3분의 2가 줄어들었다. 죽은 강에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가 없다. 그것을 생각해 보면 4대강은 '살리기' 사업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영조와 MB, 그들은 무엇을 남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