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내 나는 분단, 끝내 포기할 수 없었다

철원 시인 정춘근, 세 번째 시집 북한사투리 장시 <황해> 펴내

등록 2012.10.11 16:39수정 2012.10.1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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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춘근 시인 정춘근이 펴낸 세 번째 시집이자 북한 사투리 장시집 <황해>(작가마을)를 읽고 있으면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젖는다
시인 정춘근시인 정춘근이 펴낸 세 번째 시집이자 북한 사투리 장시집 <황해>(작가마을)를 읽고 있으면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젖는다 이종찬

황해의 꽁댕이 페안도 곽산
을유 해방 우슴도 니저버리고
38선으로 되선 팔도 허리가
콩짜개터럼 짤린 쇠식도
촌 어리광이들에게는 놈 녜기
아즈바니들과 아바니는 바닷가에서
컬마니가 냉긴
쑥겅이 가매를 걸고
소금을 굽는다 -7쪽  '황해 1' 몇 토막

그대는 이 시를 제대로 읽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 시가 다른 나라 말로 쓴 것도 아니다. 서울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KTX로 달려가면 1~2시간 남짓이면 금방 닿을 수 있는 평안도 말로 쓴 시다. 충청도 말이나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강원도 말로 쓴 시는 따로 뜻풀이를 붙이지 않아도 그나마 누구나 쉬이 읽을 수 있다.


왜 평안도 말로 쓴 이 시는 제대로 읽기가 어려울까. 모두 분단 때문이다. 환갑을 훌쩍 넘기도록 한반도 허리춤에 박힌 철가시가 가로 막고 있어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평안도나 함경도 말을 어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같은 한글을 쓰면서도 그 지역에서 쓰는 말을 외국어쯤으로 알아들어야 하니, 이 어찌 슬픈 민족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철조망 가까운 철원에서 태어나 철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 정춘근이 펴낸 세 번째 시집이자 북한 사투리 장시집 <황해>(작가마을)를 읽고 있으면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젖는다. 기사 첫 머리에 옮긴 이 시를 남한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쉬이 읽을 수 있게 다시 옮기는 까닭은 너무 오랜 분단으로 언어까지도 분단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에서다. 

황해의 꽁댕이(끝) 페안도(평안도) 곽산
을유 해방(8.15 광복) 우슴도 니저버리고(웃음도 잊어버리고)
38선으로 되선(조선) 팔도 허리가
콩짜개터럼(콩이 두 쪽이 난 것처럼) 짤린 쇠식(소식)도
촌 어리광이(촌사람)들에게는 놈 녜기(남 이야기)
아즈바니(아저씨)들과 아바니(아버지)는 바닷가에서
컬마니(할머니)가 냉긴
쑥겅이 가매(검은 가마솥)를 걸고
소금을 굽는다 -7쪽  '황해 1' 몇 토막

시인 정춘근은 '시집 머리에'에서 "이 시집을 쓰기 시작한 것은 십 년 전의 일이다"라며 "이것을 다시 평안도 사투리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문을 연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미지 표현과 현장감을 구체화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라며 "그러나 이것은 가장 큰 실수였다"고 되짚는다. 왜? 우리나라에는 평안도 사투리를 제대로 정리한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며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 남아 있는 자료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바짝 매달렸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는 그때부터 인터넷 중고서적을 뒤지기 시작한다. 서울에 있는 중고 책방도 뒤지며 평안도 관련 책은 모조리 사서 분야별로 정리한 끝에 마침내 시를 평안도 사투리로 바꾸었다.

스스로 쓴 시에 들어 있는 낱말 하나하나를 찾아 평안도 사투리로 바꾸면서 애매한 낱말은 평안도 정주 출신인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는 "그런 과정을 거쳤음에도 틀린 곳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며 "오류가 있더라도 지난 10년 동안 쏟았던 공을 생각하여 용서해 주셨으면 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아픈 역사 생생하게 그린 첫 한국전쟁 장시

시인 정춘근 세 번째 시집 <황해> 시인 정춘근이 이번에 펴낸 북한 사투리시집 <황해>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평안도 사투리로 쓴 독특한 장시집이다
시인 정춘근 세 번째 시집 <황해>시인 정춘근이 이번에 펴낸 북한 사투리시집 <황해>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평안도 사투리로 쓴 독특한 장시집이다 작가마을
걸쌔(빨리) 가자
얼뜬 그냉(그냥) 달려가자
이 지긋지긋한 쌈터 벗어나
그리운 오마니 기다리는
곽산꺼정(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자
......
그러나 어드렇게 곽산으로 갈 것인가
길목마다 디키고 서서 뒷거리(의심이 가는 것에 아는 체 하며 쏘아 물어 자백을 들음)하는
인민군 부대를 피해서 내쨀 것인가
몰마다 어그적셔(멋없이 교만함을 놀리는 말) 조제 묻는(꼬치꼬치 따져 묻는)
인민 위원회를 어드렇게 피할 것인가
-87~88쪽, '황해 37' 몇 토막   


시인 정춘근이 이번에 펴낸 북한 사투리시집 <황해>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평안도 사투리로 쓴 독특한 장시집이다. 시인은 이번 장시집에서 평안도 정주에서 열여섯에 피난 나온 어머니가 겪은 눈물과 핏물에 젖은 이야기와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외삼촌에게서 들은 뼈마디 시린 이야기를 시란 비석에 또렷하게 새긴다.  

모두 86편으로 이어진 장시에 담긴 이 이야기는 시인 정춘근 가족사이자 우리 민족이 어쩔 수 없이 서로 가슴에 총부리를 마주 댄 아픈 역사를 생생하게 그린 첫 한국전쟁 장시다. 이 시집에는 해방을 맞이한 뒤 식의주를 위해 몸부림치는 서민들이 겪는 삶, 전쟁이 주는 참혹한 현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피난길에 나서는 한 가족이 겪은 고된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한국전쟁을 사실 그대로 그린 이 장시를 읽으면 몇 해 앞 이 세상을 떠나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한국전쟁 때 의무하사로 참가했던 아버지는 그 지독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틈틈이 일기를 썼다. 글쓴이는 어릴 때 아버지께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그 한국전쟁 일기장, 그림까지 직접 그려가며 쓴 그 일기장을 자주 꺼내 읽곤 했다.

그때부터 글쓴이는 나중에 시인이 되면 아버지께서 전쟁통에 어렵게 쓴 그 일기장을 디딤돌로 삼아 한국전쟁시를 쓰려고 했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쓴 한 병사일기'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아쉬운 점은 그 일기장이 창원공단이 만들어지면서 어쩔 수 없는 철거민이 되어 이사를 하고 난 뒤부터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시인 정춘근은 10일(수) 전화통화에서 "이번 시집 소재는 낡고 고린내 나는 분단이자 어느 이름 없는 한 가족이 북한에서 겪은 이야기"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그는 "이번 시집은 어찌 보면 이산가족 모두가 겪었던 자잘하고도 큼직한 여러 가지 사건을 거창하게 '장시'라는 이름을 붙여 쑥스럽기까지 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분단으로 고통 받고 핍박받는 사람들 이야기는 현재진행형"

이제 다 왔다
멀쯔가니 목포가 보인다
정말로 다 왔다
수평선 끝에 항구가 보인다
목숨 걸었던
피난 탈출 끝났다
사람들 말없이
제마금(제각기) 피난 보따리 챙긴다

아버지는 덥차게(주머니)에서
붉은 북되선 돈을 꺼내
짐 속에 깊이 찔러 넣는다
몇 달 후 쌈이 끝나고
곽산으로 돌아가서
틀거리(근거 자본)로 쓸 날을 기대하며 -189쪽, '황해 86 완결' 몇 토막

시인 정춘근이 펴낸 세 번째 시집 <황해>는 끔찍한 한국전쟁을 겪은 가족사와 그 가족을 둘러싼 이웃들이 겪은 피눈물 어린 기록이다. 6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철조망이 우리 민족 가슴을 찌르고 있는 휴전선 가까운 철원에서 살고 있는 시인은 한국전쟁을 사실 그대로 다룬 북한사투리 시집을 통해 오늘도 통일한국이 어서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문학평론가 구모룡은 "두 개의 국가가 만들어지는 예외상태에서 이념적 배제와 폭력, 외세 개입과 종족 학살이 난무한다"며 "정춘근 시인의 <황해>는 한 여성이 경험한 해방과 한국전쟁을 그린 장시"라며 "작가의 이런 노력은 상실된 것에 대한 단순한 애착이나 그리움이 아니라 우리가 끝내 회복해야 할 진정한 가치인 사랑과 화해에 대한 염원"이라고 적었다.

시인 정춘근은 "나는 철원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못 박는다. 그는 "나는 이 철원에서 바깥 세상을 바라보면 그 중심은 분단"이라며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건 시인으로선 당연하다. 분단으로 고통 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못 박았다.

시인 정춘근은 1960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99년 <실천문학> 봄호에 '지뢰꽃' 등 3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지뢰꽃> <수류탄 고기잡이>가 있다. 지금 철원에서 글짓기 강사를 하며, 강원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문학in]에도 보냅니다

황해

정춘근 지음,
작가마을, 2012


#시인 정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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