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춘근 세 번째 시집 <황해>시인 정춘근이 이번에 펴낸 북한 사투리시집 <황해>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평안도 사투리로 쓴 독특한 장시집이다
작가마을
걸쌔(빨리) 가자
얼뜬 그냉(그냥) 달려가자이 지긋지긋한 쌈터 벗어나 그리운 오마니 기다리는 곽산꺼정(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자......그러나 어드렇게 곽산으로 갈 것인가길목마다 디키고 서서 뒷거리(의심이 가는 것에 아는 체 하며 쏘아 물어 자백을 들음)하는인민군 부대를 피해서 내쨀 것인가몰마다 어그적셔(멋없이 교만함을 놀리는 말) 조제 묻는(꼬치꼬치 따져 묻는)인민 위원회를 어드렇게 피할 것인가 -87~88쪽, '황해 37' 몇 토막
시인 정춘근이 이번에 펴낸 북한 사투리시집 <황해>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평안도 사투리로 쓴 독특한 장시집이다. 시인은 이번 장시집에서 평안도 정주에서 열여섯에 피난 나온 어머니가 겪은 눈물과 핏물에 젖은 이야기와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외삼촌에게서 들은 뼈마디 시린 이야기를 시란 비석에 또렷하게 새긴다.
모두 86편으로 이어진 장시에 담긴 이 이야기는 시인 정춘근 가족사이자 우리 민족이 어쩔 수 없이 서로 가슴에 총부리를 마주 댄 아픈 역사를 생생하게 그린 첫 한국전쟁 장시다. 이 시집에는 해방을 맞이한 뒤 식의주를 위해 몸부림치는 서민들이 겪는 삶, 전쟁이 주는 참혹한 현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피난길에 나서는 한 가족이 겪은 고된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한국전쟁을 사실 그대로 그린 이 장시를 읽으면 몇 해 앞 이 세상을 떠나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한국전쟁 때 의무하사로 참가했던 아버지는 그 지독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틈틈이 일기를 썼다. 글쓴이는 어릴 때 아버지께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그 한국전쟁 일기장, 그림까지 직접 그려가며 쓴 그 일기장을 자주 꺼내 읽곤 했다.
그때부터 글쓴이는 나중에 시인이 되면 아버지께서 전쟁통에 어렵게 쓴 그 일기장을 디딤돌로 삼아 한국전쟁시를 쓰려고 했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쓴 한 병사일기'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아쉬운 점은 그 일기장이 창원공단이 만들어지면서 어쩔 수 없는 철거민이 되어 이사를 하고 난 뒤부터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시인 정춘근은 10일(수) 전화통화에서 "이번 시집 소재는 낡고 고린내 나는 분단이자 어느 이름 없는 한 가족이 북한에서 겪은 이야기"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그는 "이번 시집은 어찌 보면 이산가족 모두가 겪었던 자잘하고도 큼직한 여러 가지 사건을 거창하게 '장시'라는 이름을 붙여 쑥스럽기까지 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분단으로 고통 받고 핍박받는 사람들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제 다 왔다멀쯔가니 목포가 보인다정말로 다 왔다수평선 끝에 항구가 보인다목숨 걸었던피난 탈출 끝났다사람들 말없이 제마금(제각기) 피난 보따리 챙긴다아버지는 덥차게(주머니)에서붉은 북되선 돈을 꺼내 짐 속에 깊이 찔러 넣는다 몇 달 후 쌈이 끝나고 곽산으로 돌아가서틀거리(근거 자본)로 쓸 날을 기대하며 -189쪽, '황해 86 완결' 몇 토막 시인 정춘근이 펴낸 세 번째 시집 <황해>는 끔찍한 한국전쟁을 겪은 가족사와 그 가족을 둘러싼 이웃들이 겪은 피눈물 어린 기록이다. 6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철조망이 우리 민족 가슴을 찌르고 있는 휴전선 가까운 철원에서 살고 있는 시인은 한국전쟁을 사실 그대로 다룬 북한사투리 시집을 통해 오늘도 통일한국이 어서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문학평론가 구모룡은 "두 개의 국가가 만들어지는 예외상태에서 이념적 배제와 폭력, 외세 개입과 종족 학살이 난무한다"며 "정춘근 시인의 <황해>는 한 여성이 경험한 해방과 한국전쟁을 그린 장시"라며 "작가의 이런 노력은 상실된 것에 대한 단순한 애착이나 그리움이 아니라 우리가 끝내 회복해야 할 진정한 가치인 사랑과 화해에 대한 염원"이라고 적었다.
시인 정춘근은 "나는 철원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못 박는다. 그는 "나는 이 철원에서 바깥 세상을 바라보면 그 중심은 분단"이라며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건 시인으로선 당연하다. 분단으로 고통 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못 박았다.
시인 정춘근은 1960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99년 <실천문학> 봄호에 '지뢰꽃' 등 3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지뢰꽃> <수류탄 고기잡이>가 있다. 지금 철원에서 글짓기 강사를 하며, 강원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황해
정춘근 지음,
작가마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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