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아내를 사랑한 남자, 흥덕왕

[경주여행 24] 영천에서 경주로

등록 2012.11.22 13:58수정 2012.11.2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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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사터 13층 석탑. 신라 때 작품이지만 누가 봐도 고려 시대의 탑으로 여겨진다. ⓒ 정만진


927년, 견훤은 경북 영천에서 군사를 이끌고 경주로 진격,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인다. 김유신이 고구려 첩자 백석을 따라가다가 여신들의 충고로 상황을 깨닫게 되는 곳도 영천이다. 당연히 영천에서 경주로 가는 길에도 신라의 자취는 흥성하다.

이 길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역사유적은 국보 40호인 정혜사터 13층 석탑이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854번지에 있는 이 국보탑은 역사 교사조차도 안내판을 보지 않으면 "고려 탑"이라고 착각할 만큼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만큼 정혜사터의 국보는 보는 이에게 '신기한' 감동을 준다(정혜사터 석탑에 대해서는 오마이뉴스 2012년 6월 18일자 기사 역사교사 "고려 때 탑", 안내판엔 "통일신라 탑" 참조).


정혜사터의 국보 탑부터 먼저 둘러보고

탑 바로 인근에는 옥산서원(사적 154호)과 독락당(보물 413호)이 있다. 이언적(1491-1553)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옥산서원은 양동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은 곳이다. 독락당도 벼슬을 그만둔 이언적이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사랑채다. 신라 유적이 아니라고 해서 외면하고 비켜가서는 안 되겠다는 말이다.

특히 이곳은 여름에 찾는 것이 좋다. 여름이 무르익으면 계곡 물 속으로 떨어지는 녹음도 짙어진다. 천혜의 피서지를 자부하는 옥산서원과 독락당 일대의 시원한 풍치는 한여름의 보물이라 할 만하다.

"괘릉이다!" 틀렸습니다. 흥덕왕릉입니다.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번지에 있습니다. ⓒ 정만진


정혜사터 13층탑에서 안강읍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에 흥덕왕릉이 있다. 신라 42대 임금인 흥덕왕(興德王)은 선왕인 헌덕왕의 동생으로, 826년부터 836년까지 10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왕릉 앞 안내판을 보면 흥덕왕은 재위 3년(828),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장보고를 청해진(淸海鎭) 대사로 임명하여 바다를 통제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또 중국에 갔던 사신 대렴이 가져온 차의 씨를 지리산에 심게 하여 장차 나라에 널리 퍼지게 하는 문화적 업적도 남겼다.


흥덕왕,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여 해상 장악

하지만 그는 비운의 왕이기도 했다. 재위 6년(831),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왕자 능유가 귀국길에 서해에서 익사했다. 뿐만 아니라, 즉위 원년(826)에는 왕비도 죽었다. 임금 자리에 앉은 지 불과 두 달만의 일이었다.

삼국사기는 '왕이 정목왕후를 잊지 못하고 줄곧 슬픔에 빠져 있자 신하들이 새로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대답한다.

"새도 짝을 잃으면 슬픔을 못 이기는데, 어찌 사람이 좋은 배필을 잃고 나서 무정하게도 다시 부인을 얻겠는가?"

왕은 새로 왕비를 들이지 않은 것은 물론 시녀들조차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소소한 심부름도 남자종들을 부렸다. 10년 뒤, 왕은 죽으면서 왕후와 합장을 해달라고 유언했다. 조정은 왕의 유언에 따랐다.

2009년 8월 만주에 가서 환도성 앞을 흐르는 통구하 강물을 보았다. 당시 중국정부는 환도성 안에 유리왕이 머물던 궁궐과 왕릉을 복원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얼마나 진척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치희도 아마 이 통구하 강을 건너 유리왕을 떠났을 것이다. ⓒ 정만진


<황조가>의 유리왕보다도 더욱 참된 사랑을 보여준 흥덕왕

'왕의 사랑'이라면 흔히 고구려 2대 임금 유리왕을 떠올린다. 유리왕은 왕비 송씨(松氏)가 죽은 후 화희(禾姬)와 치희(雉姬) 두 여인을 계실(繼室)로 맞았다. 두 여인은 늘 다투었다. 그러던 중인 기원전 17년 어느 날, 유리왕이 사냥을 간 틈에 화희에게 모욕을 당한 치희가 친정으로 가 버렸다. 그녀의 친정은 한(漢)나라였다.

사냥에서 돌아온 왕은 즉시 말을 달려 치희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민 그녀는 궁으로 돌아가자는 왕의 제안을 거부했다. 홀로 처량하게 돌아오던 왕은 나무 아래에 잠깐 머물러 지친 마음과 몸을 달래었다. 그때 꾀꼬리 두 마리가 짝을 지어 왕의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그 광경을 보고 왕이 넋두리를 하였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 翩翩黃鳥
암수 서로 노니는데 - 雌雄相依
외로워라 이 내 몸은 - 念我之獨
뉘와 함께 돌아갈꼬 - 誰其與歸

흥덕왕은, 널리 알려진 유리왕의 사랑보다도 훨씬 참된 사랑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시와 노래로 남긴 유리왕은 <황조가> 덕분에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그 이후 자신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흥덕왕은 어떤가! 따뜻한 인간적 정으로 넘쳐났던 흥덕왕,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번지 솔숲 속에 아내와 함께 누워 있다.

흥덕왕릉(왼쪽)과 괘릉은 가까이 다가서서 볼 때도 그렇지만, 멀리서 보아도 둘레의 소나무 조경, 아라비아인 분위기의 무인석, 돌사자 등 너무 닮았다. ⓒ 정만진


괘릉을 빼어닮은 흥덕왕릉의 아름다움 

흥덕왕릉은 멀리서 보면 괘릉인 듯 여겨진다. 서역인을 베낀 듯 빼어 닮은 무인상이 묘역을 지키고 있는 점도 같고, 네 마리 사자가 동서남북을 호위하고 있는 점도 같다. 왕릉까지 다가서는 좌우로 소나무들이 사열병처럼 줄을 지어 서 있는 광경도 같다.

너무나 닮은 두 왕릉을 보노라면, 원성왕이 죽은 해가 798년이고 흥덕왕의 부인이 타계한 해가 826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기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 결론은 이렇다. 너무나 왕후를 사랑했던 흥덕왕이 '가장 아름다운 왕릉' 괘릉을 본떠 그녀의 묘를 만들지 않았을까!

또 왕은 재위 10년 동안 정을 쏟고 마음을 들어부어 묘소를 가꾸었을 것이다. 본인도 죽으면 그 무덤에 왕후와 함께 합장해 달라고 이미 유언까지 해두었다. 흥덕왕릉이 그토록 아름다운 까닭은 충분히 헤아려지고도 남는다는 말이다.

흥덕왕이 남긴 '사랑시',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워

게다가 흥덕왕은 유리왕처럼 시도 남겼다. 아마도 흥덕왕의 노래는 당대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을 것이다. 그런 왕을 보다 못한 신하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선물을 구해왔다. 암수 한 쌍의 앵무새였다. 신하는 앵무새 부부를 통해 왕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생각했을 터이다.

하지만 신하의 기대는 엉뚱하게 흘러갔다. 사이좋게 지저귀던 한 쌍의 앵무새 중 암놈이 먼저 죽어버렸다. 왕은 혼자 남은 그 수놈이 꼭 자신만 같아서 거울을 구하여 붙여주었다. 수놈은 거울 안의 앵무새가 제 짝인 줄 알고 처음에는 좋아했지만 이내 진실을 깨닫게 되었고, 구슬프게 울부짖다가 죽고 말았다.

유리왕처럼 흥덕왕도 새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보았다. 부인을 향한 사랑이 진심이었으므로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었다. 흥덕왕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흥덕왕릉(왼쪽)과 김유신 묘는 아주 닮은꼴이다. 흥덕왕은 김유신에게 '흥무대왕'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 정만진


둘레돌 십이지신상, 돌난간 등 김유신 묘와 흥덕왕릉 '닮은꼴'

흥덕왕릉은 가까이 가서 보아도 봉분을 에워싼 둘레돌마다 새겨진 십이지신상, 둘레돌의 외곽을 보초병들처럼 에워싸고 지키고 있는 돌난간들까지 괘릉과 닮은꼴이다. 그런가 하면 흥덕왕릉은, 들어서는 입구의 분위기는 다르지만 묘소 자체는 흥무대왕릉과도 쌍둥이처럼 닮았다. 김유신이 흥무대왕으로 '왕'의 칭호를 얻게 된 때가 흥덕왕 10년(835)이니, 아마도 흥덕왕은 유신을 기려 그의 무덤을 왕릉처럼 가꾸는 성역화 작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듯하다.

그뿐이 아니다. 흥덕왕릉은 아름다운 솔숲을 자랑한다. 괘릉은 좌우와 뒷면의 소나무만 자랑하고, 흥무대왕릉은 진입로 좌우의 소나무만 자랑하지만, 흥덕왕릉은 한참이나 이어지는 솔숲을 지나야 비로소 무덤에 닿는다.  

솔숲을 지나노라면 마치 경덕왕(742∼763)릉을 향해 걸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한참 솔숲을 지나야 왕릉에 닿는 점, 산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평탄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점, 오릉이나 법흥왕릉의 소나무들처럼 장엄한 거목이 아니라 고불고불하고 가느다란 솔들이 서로 부둥켜 안는 듯한 자세로 빽빽하게 자라나 있는 점도 같다. 아마도 흥덕왕은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구가한 경덕왕릉으로 들어가는 길을 본받아 왕후의 묘소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조경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경덕왕릉과 흥덕왕릉, 들어가는 솔숲길 너무 닮아

역사의 임금들 중 가장 아내를 사랑한 남자는 흥덕왕이 아닐까. 그가 아내와 함께 나란히 묻혀 있는 무덤 옆 솔숲에 서서, 사랑을 잃고 우는 진정한 인간의 면모를 깨달음처럼 본다. 참된 사랑이 사라진 시대, 배우자가 죽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재혼하는 가벼운 이 시대에 흥덕왕은 무덤만이 아니라 그 마음까지도 고이 남겨주고 있다. 

흥덕왕릉(왼쪽)과 경덕왕릉은 들어가는 길의 솔숲이 너무나 닮았다. 고불고불하고 빽빽한 소나무들이 정말 빈틈이 없다고 할 만큼 울창하다. ⓒ 정만진


#흥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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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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