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명산 내력에 대해 설명하는 이복웅 원장.
조종안
지난 23일 오후 7시 군산시평생학습관(구 여성회관)에서 열린 '群山學'(군산학 : 군산을 제대로 이해하기) 세 번째 강의에서 군산문화원 이복웅 원장은 군산의 월명산(月明山), 월명동(月明洞) 등의 지명을 일제잔재로 인식하는 분이 많은데, 순수 고유지명이라고 주장했다.
이 원장은 "김부식이 지은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제35대 경덕왕(?~765) 때 명승 월명대사(月明大師)가 지은 <도솔가:兜率歌>와 <제망매가:祭亡妹歌>에 '월명리'란 지명이 등장한다"며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월명(月明)'을 일본인들은 '명월(明月)'을 즐겨 사용했다"고 덧붙였다.
"신라 경덕왕 19년(AD 760년) 4월 초하루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나 열흘 동안이나 계속되는 괴변이 일어났어요. 이에 왕은 향가 작가인 월명대사를 불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하여 그 변을 물리치도록 청합니다. 이에 월명대사가 <도솔가>를 지어 부르자 괴변이 곧 사라졌어요. 월명대사는 피리도 잘 불었는데, 달밤에 피리를 불면 그 아름다운 소리에 지는 달마저 기울기를 멈추니까 그 길을 '월명리'라 명했다고 전합니다." 이 원장은 "조선 성종 17년(1486년) 완성된 지리서 <동국여지승람>, 중종 25년(1530)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산군 편과 철종 12년(1861년)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도 '월명산'이 표기되어 있다며 "일제 식민통치 이전(1907)에 다녀간 일본인이 쓴 기행문(부지군산)에도 '군산공원에 오르니 인근 남쪽에 월명산이 있더라'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부연했다.
이 원장은 "1934년 제작된 군산부(府) 전도에 '월명동'이란 동명이 등재되기 시작한다"며 "일부 시민단체와 시민은 '월명산과 월명동도 일제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니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민족적 감정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이어 "군산에서 학교에 다니던 일본인 자녀들이 해방(1945) 후 본국으로 돌아가 결성하고 왕래하는 친목단체 이름(월명회)에서도 자극을 받았을 것"으로 내다봤다.
군산은 경술국치(1910년) 이전까지는 지금의 해망로(본정통)를 시점으로 영화동이 중심지였다. 그 후 1920년대 후반 부청(시청) 건물을 중앙로(지금의 이성당 앞)에 신축하고 도시가 명산동까지 확장되면서 중심지가 된 월명동 지역(천대정)은 일본인 부자들만의 거주지가 되었고, 해방 후 최근까지도 고위 공직자나 회사 사장 등 부유층이 살던 동네였다.
이 원장은 "재미있는 야사와 깊은 의미가 담긴 고유지명을 일제는 1914년 행정 개편을 하면서 마을 이름을 모두 일본식 한자로 바꿔 놓았다"면서 "대야(배달메), 개사리(가세골), 내유리(안 버들리), 외유리(밖 버들리) 등이 대표적인 예이며 그 외에도 많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순수 우리말 지명에는 메(뫼), 멀(마을), 말(마을), 동(깊은 마을), 골(고을), 실(산이 감싸고 있는 마을), 이(리), 뜸(10가호 이하 들녘마을) 등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군산의 월명산은 어떤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