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과 폭포의 공통점은 무엇?

[노래의 고향 23] 경북 구미 <회고가>

등록 2012.10.29 20:29수정 2012.10.2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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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구미 금오산 아래 채미정 경내의 경모각에 걸려 있는 길재 초상 ⓒ 채미정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명왕 2년 여름 6월', 왕건은 궁예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한 달 위인 918년 '가을 7월' 견훤의 아버지인 상주 군벌 아자개가 아들 아닌 왕건에게 의탁해 엄청난 파란을 일으킨다. 아자개의 왕건 합세는 고려의 전진에 큰 힘을 보태준 정치적 대사건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오백 년' 고려는 935년(경순왕 9) 신라 병합, 936년 후백제 진압을 완성하여 2차 삼국통일을 이룬다. 그 후 고려는 1392년까지 왕조를 이어간다. 서울은 왕건의 고향인 개경. 개성은 길재의 <회고가>가 말하는 '오백 년 도읍지'가 되었다.


오백년 고려는 허망하게 사라지고

하지만 결국 고려는 문을 닫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무릇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니 그 점에서는 국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그래서 정도전은

선인교 나린 물이 자하동에 흐르로니
반천 년 왕업이 물소래뿐이로다
아해야 고국 흥망을 일러 무삼하리요


하면서, 이미 멸망한 고려에 미련을 두지 말고 앞날을 향해 살아가자고 노래한다. 종장의 '아해야'를 의례적 감탄사로 보지 않는다면 정도전은 사람들에게 '새 나라의 어린이'가 될 것을 권유하고 있는 셈이다.

정작 노래는 그렇게 했지만 '개국 공신' 정도전은 '새 나라'가 문을 연 지 6년만인 1398년에 이성계(조선 태조)의 아들 이방원(3대 태종)에게 피살된다. 정도전이 처참하게 죽은 후에도 개성 자하동의 선인교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는 변함없이 한결같았으니, 그의 노래 또한 '일러 무삼하리오'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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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서 바라본 채미정. 기둥 사이로 길재 유허비각이 보인다. 채미정은 영조 때에 길재를 기려 세워진 정자다. ⓒ 정만진


정몽주의 제자 길재는 이씨 왕조가 들어서기 이전에 관직을 떠난다. 1389년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향리인 경북 선산으로 내려갔다. 시기적 우연 탓에 그는 스승처럼 맞아죽는 일은 모면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씨 왕조에 참여할 마음이야 있을 리 없었다.

1400년(정종 2),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세자 이방원이 벼슬을 주며 불렀다. 그는 거절했다. 고려의 '산천'은 옛날[舊]과 다름이 없건만[依] 충신[人傑]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길재는 혼자[匹馬] 남은 기분으로 망국의 서울 개성을 둘러보았지만, 지난날 오백년의 고려 시대[太平烟月]는 한낱 꿈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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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좋은 가을날, 채미정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앉아 있다. 답사 여행을 온 일행들이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양이다. ⓒ 정만진

물론 길재도 고려 말기가 태평성대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사람으로서 지난날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구미 금오산 동굴에 숨어[隱]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친 '야은'이다. 그래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여말 삼은(麗末 三隱)'으로 여겨졌다.

이씨 왕조 벼슬 거절하고 금오산에 묻혀 살아

(신라는) 법흥왕 15년(528)에 불교를 처음으로 폈다. 처음에 눌지왕 때(417∼458) 중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와서 일선군(一善郡)에 당도했다. 일선군 고을 사람 모례(毛禮)가 자신의 집에 굴방을 만들어 묵호자를 머물게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보듯, 경북 선산은 신라 때 불교가 처음 들어오는 등 오랜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는 지역이다. 936년에는 왕건이 후백제와 마지막 대접전을 펼친 끝에 대승, 마침내 후삼국 통일의 토대를 구축한 대망의 땅이기도 하다. 지금은 구미시에 통합되어 있다. 그래서 1768년(영조 44)에 길재를 기려 세워진 정자 채미정(菜薇亭)의 주소도 경북 구미시 남통동 산 249번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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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으로 들어가는 건흥문 사이로 숙종 어필과 길재 초상이 있는 경모각이 보인다. 짙은 여름, 채미정 일대는 정말 시원하다. ⓒ 정만진


채미정은 고사리[薇]를 캐어서[菜] 먹고 사는 사람이 머무는 정자(亭子)라는 뜻이다. 중국 백이 숙제의 고사에서 따온 작명인데, 길재가 이씨 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리는 차원에서 정자 이름이 그렇게 정해졌다.

금오산 아래 채미정은 명승 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둘러싼 '산천이 의구'하여 아득한 고려 시대로 들어온 듯하고, 가을이면 '물소래'까지 붉게 물들인 듯한 찬란한 단풍에 나그네의 마음은 하릴없이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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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굴 가는 길. 대혜폭포에서 절벽의 길을 타고 도선굴로 들어가는 짜릿한 재미가 제법이다. ⓒ 정만진

국가명승 52호 지정되어 있는 채미정

채미정 경내에는 길재 유허비와 경모각(敬慕閣)도 있다. 경모각에는 길재를 기려 숙종이 남긴 어필오언구(御筆五言句)와 야은 초상이 걸려 있다. 채미정 경내로 들어가는 흥기문(興起門) 가운데로 경모각이 정면으로 보이고, 채미정 기둥 가운데로 유허비각이 정면으로 보이는 풍경이 이채롭다.

채미정에서 금오산 정상을 왕복하면 네 시간 남짓 걸린다. 길재가 머문 동굴은 금오산 중턱에 있다. 이름은 도선굴(道詵窟). 풍수지리의 대가인 신라 도선대사가 득도를 한 곳이라 하여 굴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굴은 폭포에서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이어지는 길이 자못 험난하여 한번 찾았던 이들에게는 생애의 추억이 남는다. 도선굴은 내부 길이가 7.2m, 높이가 4.5m, 너비가 4.8m가량인데, 굴 안에 들어가 밖을 내다보는 감회로 문득 가슴이 떨리는 곳이다. 구미시를 향해 떨어질 듯 하강하는 금오산 자락이 굴 바깥 하늘의 중턱에 독수리처럼 걸린 풍경을 응시하며 사진 한 장 '찰칵' 찍는 재미 또한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가난한 날의 행복'이다. 이곳이 바로 길재 선생이 고사리를 캐먹으면서 '가난'하게 살아 이씨 왕조를 온몸으로 거부했던 유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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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바로 뒷날의 대혜폭포. 금오산의 비경 중 하나인 이 폭포는 도선대사가 득도하고 길재 선생이 은거한 도선굴에서 약간 왼쪽 아래에 있다. ⓒ 정만진

김수영의 <폭포>가 생각나는 대혜폭포

내려오는 길에, 올라올 때 들르지 않고 지나쳤던 해발 400m 지점의 높이 28m 대혜폭포를 감상한다. 특히 소나기가 내린 다음날 찾아가면, 절벽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대혜폭포의 기둥 같은 물줄기가 온통 사람의 마음까지 말끔하게 씻어주는 체험을 맛보게 된다. 

길재 선생도 가끔은 도선굴에서 내려와 이곳 물기둥에 몸을 맡긴 채 다시금 '태평연월'이 도래하기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충신과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재는 폭포 앞에서 '(역시) 꿈이런가 ' 싶은 탄식에 젖었을 것이다. 대혜폭포, 김수영의 시 <폭포>가 실감나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의 시를 한번 읊조려본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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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대혜폭포. 가늘게 흘러 내린 물이 얼어 빙벽이 되었다. ⓒ 정만진

고매한 정신처럼 쉼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태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회고가

한자어 '회고가'를 자전적으로 풀이하면 '옛날[古]을 돌이켜 보는[懷] 노래'라는 뜻이다. 하지만 회상을 주제로 하는 보통의 시조들을 '회고가'라 하지는 않는다. 이 문학용어는 고려 말에 이씨조선 참여를 거부하고, 고려가 남긴[遺] 충신(臣)이기를 자처한 이들의 노래에만 한정하여 쓰인다. 그래서 의미를 파악하기 쉽게 '유신(遺臣) 회고가'로 지칭하기도 한다.

회고가 중에는 길재의 회고가, 원천석의 회고가가 가장 유명하다. 원천석의 회고가는 아래와 같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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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굴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 ⓒ 정만진


#길재 #회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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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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