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

[길을 걷다 만난 풍경 13] 순창 강천산 애기단풍들 사이에 숨은 전설

등록 2012.11.10 10:49수정 2012.11.1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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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산을 휘감고 있는 애기단풍들 ⓒ 박주현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단풍의 이유> 이원규·시인-

이원규 시인은 '단풍의 이유'란 시에서 " 이 가을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일까. 가을이 깊어갈수록, 깊은 산중의 모든 나무와 물까지 일제히 붉게 달아올라 있다. 11월 8일. 평일인데도 전북 순창 강천산 입구는 끝물 단풍의 애잔한 모습 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많은 사람들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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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강천산에 붉게 타오르고 있는 애기단풍들 ⓒ 박주현


오메~ 죽인다 죽여
히야~ 직인다 직이
어머~ 예쁘다 어쩜

연이은 감탄사가 전국 경향각지에서 온 인파라는 걸 금세 느끼게 했다. 이 곳은 올해가 세 번째 산행이지만 만산홍엽의 감동은 언제나 늘 새롭다. 늘 그랬던 것처럼 땀도 흐르고 숨도 가쁘지만 점점 더 붉게 타들어 가는 강천산 늦가을 풍경에 결코 발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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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홍, 수홍, 인홍... ⓒ 박주현


곳곳에 크고 작은 병풍폭포가 단풍들 사이에 숨어 조용히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물소리에 세상 시끄러운 소리들이 묻히고 붉은 단풍에 마음이 묻히니, 핍진한 세상을 등진 물아일체가 따로 없다.

늦가을 맑은 물줄기도 붉게 물들고, 폭포와 기암괴석들도 붉게 물들고, 그야말로 강천산의 절정은 바로 지금 이 시기다. 이 아찔한 황홀경 앞에, 무슨 형언이나 수식어가 필요할까?

달포 전 설악산에서 시작된 긴 단풍행렬은 이곳 강천산에 이르러 더욱 강렬한 기세를 발휘하며 마지막 혼을 불태우고 있다. 해발 584미터의 강천산은 순창군이 자랑하는 군립공원으로 이곳엔 강천사를 비롯해 유명한 전설이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산이다.

호남의 소금강, 강천산 휘어감은 가녀린 애기단풍들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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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단풍들이 빈 의자를 사이에 두고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 박주현


신라 진성여왕 때(887년)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강천사의 웅장한 사찰 주변은 당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성산성(金城山城)이 에워싸고 있어 가을이면 애기단풍들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생김새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용천산(龍天山)이라 불리기도 했던 강천산은 깊은 계곡과 맑은 물, 기암괴석과 절벽이 어우러져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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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다리를 가득 메운 인파 ⓒ 박주현


전주-순창간 4차선 국도가 개통돼 전주시에서 한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강천산 입구에서부터 가녀린 모습에, 울긋불긋 형형색색을 한 애기단풍들이 가장 먼저 반긴다. 온 산을 휘어 감고 가을을 노래하고 있는 애기단풍들은 작으면서 색깔이 곱다.

어찌 이리 붉을 수 있을까?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게다가 왕복 8㎞에 이르는 맨발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단풍을 가득 담아 붉게 물든 냇물이 또한 절경이다. 마치 투명한 유리처럼 모든 단풍의 색깔을 죄다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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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다리에서 바라본 풍경 ⓒ 박주현


기암절벽과 청정한 계곡 사이로 펼쳐지는 산책길을 걸으면 강천산의 성스러운 기운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산 아래 입구에서 30여분을 오르면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기운이 가득 고여 있다는 전설의 구름다리, 현수교가 하늘을 가린다. 구름다리 주변은 곱게 물든 단풍들이 구름처럼 떠있는 듯하다. 50미터 이상 되는 높은 구름다리 발아래에는 사람도, 물도, 나뭇잎도 온통 붉게 일렁인다.      

산홍, 수홍, 인홍...모두가 아름답게 불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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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단풍 색을 가득 머금은 물 ⓒ 박주현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 드는 날> 도종환·시인-

도종환 시인의 '단풍 드는 날'이란 시가 절로 떠오르게 하는 구름다리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와 다시 500여미터를 걷다 보니 100여미터 이상에서 떨어지는 웅장한 폭포가 한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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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와 단풍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강천산 비경 ⓒ 박주현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구장군 폭포는 전설을 가득 담고 있다.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하며 등산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이 폭포는 천년을 살다 승천하지 못해 피를 토하고 쓰러져간 용의 머리 핏자국이 남아 있다는 용머리 폭포와 함께 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마한시대 9명의 장수가 죽기를 결의하고 전장에 나가 승리를 얻었다는 전설이 담긴 구장군 폭포는 웅장함과 기이한 형상이 살아 있는 듯했다. 폭포 아래에 위치한 용소는 밤이면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한다고 알려질 만큼 물이 맑고 깊었다. 이곳 역시 전설이 가득 담긴 곳이다.

전설 가득 담긴 구장군 폭포, 거북바위...가을이면 더욱 '애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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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을 가득 머금고 흐르는 구장군 폭포 ⓒ 박주현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강천산 산골 마을에 한 청년이 어머니를 위해 약초를 구하러 강천산의 깊은 산속을 돌아다니다 산삼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그만 폭포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 때 마침 용소에서 목욕을 하던 선녀가 청년을 발견하고 청년의 정성에 감동하여 산삼을 찾아주고 사랑에 빠졌다. 이 소식을 들은 옥황상제는 그들에게 천년동안 폭포에서 거북이로 살게 하고 천년이 되는 날 동트기 전 폭포 정상에 오르면 하늘로 올려 주리라는 약속을 했다.

마침내 천년이 되는 날 암거북을 먼저 정상에 올려 보낸 숫거북이 정상으로 향하는 순간 호랑이를 만나 숫거북을 공격하게 되고 숫거북은 호랑이와 다투다 동이 트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던 옥황상제는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을 영원히 지켜주고자 그들을 바위로 변하게 했다.

이후 사람들은 이를 '거북바위'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 후 마한시대 아홉 명의 장수가 폭포의 천년 사랑 거북바위를 기리며 도원결의하고 전장에 나가 승리를 이뤄냈다고 전해지면서 폭포 이름을 '구장군 폭포'라 부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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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같은 맑은 물 ⓒ 박주현


이처럼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신비로움이 가득 배인 강천산은 비경과 전설이 섥혀 있는 곳이다. 울긋불긋 단풍잎 사이로 이어지는 황토 모랫길 산책로와 울창한 산림욕장, 고즈넉이 자리 잡은 사찰과 곳곳의 병풍폭포 등의 운치가 강천산의 묘미를 한층 더해준다.

올해는 더욱 유난히 곱게 물든 애기단풍잎들이 현수교와 강천산 곳곳에 노랑, 주황, 초록, 빨강 빛으로 물들어, 오색의 장관을 연출하며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있다. 늦가을 붉게 타오르는 애기단풍과 그 사이로 애잔한 전설을 볼 수 있는 강천산이 있어 참 좋다.
#깅천산 #애기단풍 #구장군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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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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