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그리운 건 뭍이 아니다

[사진] 너의 부음을 가슴에 새기고 찾아간 비양도

등록 2012.11.19 10:07수정 2012.11.1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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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비양도에서 바라본 제주도. 일렁이는 파도 너머로 멀리 한라산 능선이 결 곱게 흘러내리고 있다.

비양도에서 바라본 제주도. 일렁이는 파도 너머로 멀리 한라산 능선이 결 곱게 흘러내리고 있다. ⓒ 이주빈


고작 15분 남짓 가는 뱃길이지만 바다는 사나웠다. 늦가을 바람은 매섭게 파도를 일으켜 세워 작은 도선(渡船)을 흔들어댔다. 태평양 건너 보스턴에서 의남매 동생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부음을 듣고 혼이 빠진 채 건너는 제주바다. 가을비가 쓰린 눈물을 감추어 주었다.


본섬인 제주도는 약 1백만 년 전부터 시작된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기록에 따르면 비양도는 태어난 지 일천년이 갓 넘은 청춘의 섬이다. 신동국여지승람은 "고려 목종 5년(서기 1002년) 6월에 제주 바다 한가운데서 산이 솟아났다"고 했다. 천살 갓 넘은 청춘의 섬에 동생의 부고장을 가슴에 새긴 채 찾아가는 것이었다.

제주도 한림항에서 비양도까지는 3.5㎞. 그 짧은 거리를 건너며 대칭이 되는 여러 가지 언어들이 나열되었다. 바다와 육지, 찰라와 영원, 만남과 이별 그리고 삶과 죽음.... 그 나열의 끝에 '너는 가고 나는 남았다'고 썼다.

a  비양도 교회 전경. 분홍색 십자가와 예배종이 인상적이다.

비양도 교회 전경. 분홍색 십자가와 예배종이 인상적이다. ⓒ 이주빈


첫배를 타고 비양도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교회였다. 일반 주택을 개조해 지은 작은 교회. 분홍색 십자가와 예배종이 공허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위로와 성찰, 기도하는 마음이 주는 선물이다.

사람들은 늘 죽음을 일상처럼 맞이한다. 사랑하는 연인이 죽고, 아버지가 죽고, 이쁜 동생이 죽고, 절친한 벗이 죽고.... 이렇게 늘 죽음과 조우하고 살아가지만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순간 혹은 그 이후의 어떤 무엇을 알 수 없기에 두려운 것이다.

그 두려움의 끝에 천국을 지었다. 천국은 어디 있는 것일까. 먼저 간 동생을 천국으로 보내고 싶지만 그곳으로 가는 기차와 방주는 있기나 한 것일까. 그저 가을 찬비를 피해 너의 영면을 기도하는 섬마을 교회 작은 예배당이 너와 내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천국이려니 했다.


a  비양분교 운동장에 한 아이가 두고 간 축구공이 덩그라니 놓여 있다.

비양분교 운동장에 한 아이가 두고 간 축구공이 덩그라니 놓여 있다. ⓒ 이주빈


비양도엔 약 100명이 넘는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 중엔 초등학생도 있어서 한림초등학교 비양분교엔 학생 2명이 공부를 하고 있다. 나도 섬마을 어린이였던 시절이 있었다. 실처럼 길게 이어진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수평선 너머 어디 있을 나의 미래와 꿈을 더듬어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그 시절에 그토록 아득하게 그리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련한 그리움을 운명처럼 낙인 찍혀 태어난 나는, 섬놈이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가장 오래된 동무로 지정받고 살아가는 나는, 섬놈이다. 바람의 눈물 속에 서러운 통곡을 감추고 살아가야할 나는 그리고 너는, 섬놈이다." - 11월 4일 비양도에서 남긴 메모

a  비양봉에 있는 비양등대. 그리움은 원래 등대처럼 높고 쓸쓸한 것이다.

비양봉에 있는 비양등대. 그리움은 원래 등대처럼 높고 쓸쓸한 것이다. ⓒ 이주빈


a  실선처럼 이저진 수평선 앞 등대. 섬에서 그리운 건 뭍이 아니다.

실선처럼 이저진 수평선 앞 등대. 섬에서 그리운 건 뭍이 아니다. ⓒ 이주빈


섬에서 그리운 건 뭍이 아니다. 섬에서 그리운 건 섬이다. 아니 섬에서 그리운 건 섬이 된 사람 바로 너다. 그래서 섬에선 늘 외롭고, 그립고, 쓸쓸하고, 아프다. 섬으로 만나 섬으로 헤어지기 때문이다. 간혹 도선이 섬과 섬을 이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도선이 끊긴 섬의 시간엔 온전하게 외로움과 그리움만 상주한다. 섬에는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외로움과 아련한 그리움이 사는 것이다.

비양도는 느릿느릿 걸어도 두 시간이면 다 돌 수 있다. 꼬인 회로와 섞인 미로 속을 사는 도회지 사람들은 '인생은 알 수 없다'고 쾌락의 순간을 점멸한다. 그러나 비양도를 걷다보면 세상 어느 곳이나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의 끝이 뻔함을 깨닫게 된다. 두 시간이면 확인 할 수 있는 명징한 결론, 시작이 있는 모든 것엔 끝이 있다는 것이다.

a  억새밭 언덕에 소나무 몇그루. 흐린 날은 풍경조차 슬프다.

억새밭 언덕에 소나무 몇그루. 흐린 날은 풍경조차 슬프다. ⓒ 이주빈


a  돌담이 억새밭과 하늘을 가르고 있다.

돌담이 억새밭과 하늘을 가르고 있다. ⓒ 이주빈


막배를 기다리는 비양도에 가을비는 그치지 않았다. 유골이 되어 돌아올 동생의 한국 장례를 어떻게 치를까 하는 사무적인 궁리를 하는 것으로 찢어져 내리는 가슴을 틀어 막았다. 그러나 가슴에 비가 흘러드는 것은 막지 못했다.

저기 바다 한가운데서 도선이 다가왔다. 육지로 돌아갈 시간이 온 것이다. 동생과 정식으로 이별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도선이 비양도에 가까이 올수록 동생의 유골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듯 했다. 비양도 선착장에 도착한 작은 도선이 뿡우웅 하고 울었다.

"외롭고 아팠기에 너의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이었다.
쓸쓸한 날이 많아서 너의 원려는 곱게 깊었다.
신은정, 심장에 피어 결코 지지 않을 보랏빛 자운영."
- 독립영화감독 고 신은정 추모책에 바친 조시

a  천년 전 일어난 화산활동으로 생긴 섬 비양도의 바닷가.

천년 전 일어난 화산활동으로 생긴 섬 비양도의 바닷가. ⓒ 이주빈


덧붙이는 글 하버드대의 이면을 폭로한 다큐 <베리타스, 하버드 그들만의 진실>로 뉴욕국제독립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고 신은정 감독이 지난 3일 미국 보스턴에서 사망했습니다. 사망한 신 감독은 유골이 되어 지난 10일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한국에서 장례를 치른 고 신은정 감독은 지난 13일 아버지가 먼저 잠들어 계신 광주 영락공원에서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양도 #신은정 #제주도 #등대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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