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공한 귀농인? 나처럼 되지 마시라

[귀농에 관한 오해와 진실⑨] 아쉬움 남는 귀농 6년..."귀농도 순서가 있다"

등록 2012.12.10 12:39수정 2012.12.10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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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귀촌 인구가 매년 최고치를 기록중입니다. 2012년 상반기 귀농귀촌인구는 8706가구 1만7745명에 이릅니다. 이들은 왜 도시를 떠나 시골로 향하는 것일까요? 귀농귀촌인 절반 이상은 4050세대이지만 2030 세대의 귀농귀촌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생태적 삶'을 살고자 귀농을 결심하는 이들도 많지만, 상당수는 자영업에 실패하거나 명퇴를 당했거나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귀농귀촌의 리얼스토리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개인의 선택 차원을 떠나 뚜렷한 사회현상이 되어버린 귀농귀촌에 대한 실질적인 사회적 뒷받침이 이뤄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말]
또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가을걷이가 끝난 시골은 코앞에 닥친 겨울을 나기 위해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집집마다 김장하는 손길이 교차한다. 길고 긴 겨울, 집안에 바람 들어 오는 구석은 없는 지, 각종 보일러 점검에 기름, 연탄, 땔감 준비로 부산하다.


수확과 곶감 작년엔 고온 현상으로 곶감의 절반이 피해를 입었다. 늦가을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과 벼나락이 가을의 풍성함을 말해주고 있다. ⓒ 이종락


귀농한 지 햇수로 어느덧 6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아직도 뜬구름같은 농부의 삶에 어색함을 떨칠 수가 없다.

얼마 전, 잘 아는 지인이 내가 사는 마을로 귀촌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마침 마을 한가운데 적당한 빈집이 하나 있어 소개했다. 하지만 재래식 화장실이 바깥에 있다는 치명적 이유(?) 때문에 결국은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사실 어린 딸과 엄마, 그들 모녀에게 집 바깥 재래 화장실은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은 환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시골에 살고 싶은 간절함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귀촌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랑 애가 마당 있는 시골집에 살고 싶어 하고, 산촌유학처럼 몇 년이라도 시골에서 학교 다니면 아이한테도 좋을 것 같아서요."
"재래 화장실을 친환경적으로 잘 정리해서 사용하면 어떨까요?"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여자들만 있어서.."
"마당에 풀도 베고, 시골 살면 호미 낫 드는 건 기본입니다."
"(난감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배워 가면 되지 않을까요."
"저렇게 괜찮은 빈 집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네.. 화장실만 해결되면..."

여러 고민을 하며 서울로 올라간 지인은 지방에 근무하는 남편과 상의 끝에 시골에서 살겠다는 생각을 접었다고 알려왔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정도로 접을 귀농·귀촌이면 아예 발을 내딛지 않는 게 낫다는 게 귀농 6년 차의 변함없는 지론이다. 귀농을 막연하게 꿈꾸고 망설이거나, 귀농 후의 삶에 대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은 더 시간을 갖는 게 낫다. 시골에 대한 간절함이 생겨날 때까지.


자나 깨나 시골생각, 실제 살아보니...

내 귀농의 단초는 수세식 화장실 물에 대한 작은 깨달음에서 시작했다. '소변과 대변이 물과 함께 흘러 어디로 가나'에서 시작한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결국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데로 집중됐다. 그후부터는 수세식 화장실도 마음 편히 사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한 3박 4일의 여름 텐트휴가로 귀농 계획은 구체화 됐다. 아파트며 각종 식기며 옷가지들 등 살면서 불필요한 것을 많이 끌어안고 살고 있었다.

이어진 주말농장 실습과 귀농운동본부의 귀농학교 수료 등 3년에 걸친 준비기간을 보냈다. 직장을 정리한 후 6개월 뒤 귀농을 결행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살아온 내게 귀농에 대한 불안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익숙해진 모든 것들과 결별해야 했고 먹고사는 문제는 캄캄했다. 그러나 그 어떤 불안감이나 망설임도 귀농에 대한 간절함을 이길 수는 없었다.

당시 도시의 번잡한 관계와 타인에 의한 경제 의존, 껍데기만 그럴 듯한 삶에 깊은 거부감이 가득 찬 상태였다. 화려한 도시는 내게 김광석의 노랫말처럼 '그저 시계추와 같이 왔다 갔다'하는 삶으로 각인되었다. 그렇게 도시를 떠나 귀농을 했다.

귀농의 첫 둥지 오랜 시간 발품 끝에 겨우 구한 경북 상주 화서면 금산리 시골의 빈집, 이 집에서 2년 6개월을 살았다. ⓒ 이종락


그리고 올해로 만 6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다. 경북 상주의 산골 화령에서 빈집 살이 2년 만에 새로운 터를 잡아 집을 짓고 현재 임대로 포도밭 1600평과 논 300평, 문전옥답 400평과 곶감 농사를 주로 짓고 있다. 대학과 기숙사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들의 학비 등으로 한창 돈이 들어가 경제자립이 쉽지는 않지만, 주변에선 '귀농해서 자리 잡았다', '성공했다'는 등의 겉도는 얘기를 하곤 한다.

시골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다는 2년이 지나고 마지막 남은 힘까지 써 본다는 마의 5년도 넘겼으니 얼핏 그런 평이 나올 수도 있지만 실상 진짜 고민은 다른 데 있다.

생태농으로 자립하겠다는 초심, 관행농으로 뒤죽박죽

지금은 주농사가 포도농사지만 귀농하면서 포도농사를 짓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사실 지역과 빈집 구하기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농사 작물과 땅까지 계획대로 추진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 역시 우리 다섯 식구가 둥지를 틀 시골의 빈집을 구하느라 충청도, 경상도를 발에 땀나도록 다녔다. 살던 집을 빼주기로 한 시점을 불과 한 달여 남기고 겨우 빈집을 구할 수 있었다. 농사는 그 다음이었다.

살아 보니 상주시 화서면과 그 주변 일대는 포도특구였고 포도는 가장 경제성이 높은 작물이었다. 귀농 다음 해 7년 된 포도밭 1200평을 임대해 첫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된서리 피해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그것도 잠시, 귀농 3년차 되는 해 집을 비워주든지 사라는 빈집 주인의 통고에 다른 터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인근 마을에 새로운 터를 잡고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경제문제가 현실로 다가왔다. 밭농사·논농사의 경제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이 지역의 특작물인 포도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포도를 심어 다음 해부터 조금씩 수확을 해야 되는데 포도 심을 땅을 구할 수 없었다.

집 짓느라 땅 살 돈은 없고, 땅을 임대해야 한다. 포도는 최소 10년 이상 농사짓는 과수로 쉽게 땅을 임대해 줄 주인이 없었다. 포도 심을 시기도 3~4월을 놓치면 다음 해로 넘어가야 했다. 애가 탔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이리저리 돌아 다녔다. 절박한 마음이 통했을까?

포도 수확 노동은 쓰되 열매는 달다. 9월부터 시작된 한 달의 수확 기간이 생각보다 빨리 지나 간다. 올해는 태풍 피해로 수확의 30%를 버려야 했다. ⓒ 이종락


마을 주민이 논 7백 평을 포도 심으라고 내준 것이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살펴보니 반듯한 땅으로 포도 심기에도 적합한 논이었다. 그리고 올해로 벌써 심은 지 4년차가 돼 수확도세 번이나 했다.

5년차 된 포도밭도 임대하여 총 1600평을 짓고 있지만 농약을 치는 관행농이다. 나름대로 농약 횟수를 줄여 저농약으로 짓고 있지만 주변이 온통 관행농이라 홀로 유기농이나 무농약으로 짓기도 어려운 환경이다. 농약을 조금이라도 안 치면 그 때문에 벌레가 더 생긴다고 화살을 돌리는 분위기다.

농약을 조금이라도 제때 안 쳐주면 나타나는 온갖 피해들 때문에 손을 놓을 수도 없는 상황. 숨 막히는 방제복을 입고 치기 싫은 농약을 칠 때면 '내가 이 짓 하려고 귀농했는가?'라는 자괴감으로 오랜 시간 상한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유기농으로 과수 농사를 짓다가 상당한 피해를 당하는 농가를 보면 과수 유기농의 의지는 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벼농사는 우렁이 농법으로, 밭농사는 유기농에 가깝게 짓고 있지만 정작 경제자립의 주축 농사는 그렇게 몇 년 해 왔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에선 포도농사 아니면 먹고 살 농사가 없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새로운 둥지 귀농 3년차 ,인근 해발 325미터 봉촌리 산골에 새로운 터를 잡고 지은 집. ⓒ 이종락


이제와서 곰곰 생각해 보니 집과 농사 중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없다면 우선 농사부터 고민한 후 원하는 농사에 맞는 지역과 집을 찾으라고 권하고 싶다. 농사의 첫 단추가 내 의지와 달리 꿰이다 보니 '이제 와 다시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가야 하는가?'의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6년이 지나도 뜬구름 같은 귀농자의 모습

사상 유래 없이 귀농·귀촌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도시의 포화와 농촌의 진공을 해소시켜 줄 귀농은 이 시대의 필연적 귀결임에 틀림없다. 정부의 지원 정책에 따라 귀농 관련 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지자체마다 다양한 귀농자 유치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귀농자 본인의 확고한 의지와 삶과 노동에 대한 철학,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려는 준비와 노력 없이는 정착이 결코 쉽지 않다.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귀농자들의 정착을 힘들게 하는 난관은 수없이 많다. 보이지 않는 텃세, 대화 소통의 부재, 비논리적 문제 해결 등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해 볼까 한다.

#1. 몇 년 전 면단위에서 거주 귀농자들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유치한 적이 있었다. 단 한번, 그 때 우리는 처음으로 같은 지역에서 사는 귀농자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고, 한 두차례 귀농자들끼리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다음날, 지역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귀농자들 모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긍적적인 반응이 아니라 껄끄러워하는 분위기였다. 며칠 후 마을 주민과 우연히 가진 술자리에서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귀농자들이 모였다면서?"
"처음으로 모였지. 소문 빠르네."

"귀농인들이 주민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어울리면 서로 좋을 게 없어."
(조금 울화가 올라오면서 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사는 주민들이야 수 백 년 동안 함께 살아 온 사람들이고 다 친구고 친척인데. 귀농자들은 다 버리고 내려 온 외로운 사람들이다. 무슨 힘이 있겠나? 겨우 한 번 모인 거 갖고 그렇게 예민하게 볼 필요가 있나?"
"그건 그렇지."

#2. 귀농한 40대 부부가 포도밭을 2년 기간으로 임대하여 열심히 지었으나 1년 만에 주인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 귀농자는 억울하고 분해 주변에 호소하고 다녔으나 주변의 반응은 귀농자가 너무 떠들고 다닌다는 거였다. 앞으로 땅 구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은근한 으름장과 함께.

이것이 시골의 정서다. 70~80대 노인들로만 구성된 마을이 아니라면 원주민들은 귀농자들에게 알게 모르게 경계심을 갖는 게 사실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상식과 원칙보다는 지금까지 지켜왔던 정서를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힌다.

그런 가운데 함께 어울려가며 살아가야 하는 곳이 시골이다. 도시에서 살 때 지녔던 논리적 판단력, 시비를 가리려는 마음, 불필요한 자존심 등을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큰 갈등 없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귀농은 삶을 통째로 바꾸는 인생의 대전환이다. 간단히 말해 사무직 노동자에서 육체노동자로 자신을 바꾸는 길이며 그것도 도시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나를 맞춰가면서 인생을 개척해야 하는 미답의 길인 것이다.

첫 눈 풍경 거실 창에서 바라 본 첫 눈내린 마당의 풍경, 감나무의 잎이 다 떨어지면 겨울은 시작되고 창밖을 보며 농부는 하염없는 상념에 사로 잡힌다. ⓒ 이종락


그럼에도 이런 모든 것들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한 힘이 시골엔 여전히 있다. 도시보다 넘쳐나는(?) 이웃 간의 관심과 인정(긍정적으로 볼 때), 대자연의 섭리를 아침, 저녁, 계절별로 체감할 수 있는 기쁨, 고된 노동 후에 맛보는 휴식과 여유로움, 다양한 생명과의 만남 등은 도시에서 맛보는 말초적인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내 인생에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고 자부하면서도 6년이 지난 아직도 농사짓는 내 모습이 뜬구름처럼 보이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감히 말하고 싶다. 간절함과 구체적인 준비 없이 귀농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늪에 자신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귀농 #상주 #빈집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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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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