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먹는 샌드위치, 그냥 먹으면 곤란합니다

[체험기] 인내와 기술을 강요받는 어느 채식주의자의 고백

등록 2012.12.22 14:15수정 2012.12.2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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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년 전부터 고기를 먹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조류를 포함한 육지에서 나는 고기를 먹지 않고 생선이나 조개 등 해물류는 다 먹는다. 전문적으로 채식을 하는 분들은 나 같은 사람을 페스코(Pesco) 채식주의자라고 하는 모양이다.

채식을 하게 된 건 돼지고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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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 ⓒ 오창균


처음 채식을 하게 된 계기는 돼지고기 때문이었다. 돼지고기가 몸에 맞지 않아서인지 직장에서 삼겹살 회식을 하고 난 이튿날에는 속이 늘 불편했다. 그래서 돼지고기를 더 이상 억지로 먹지 않기로 결심하던 차에 소와 닭 등의 다른 고기도 그냥 안 먹어 보기로 한 것이다. 이전에도 생선은 좋아했지만 육고기류는 별로 좋아하지 않던 터라 의외로 이 결심은 다른 결심과는 다르게 오늘에까지 지켜지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쉬웠던 것은 아니다. 갑자기 채식선언을 한 터라 우선 주변 사람들의 집요한 질문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그 질문공세는 요즘에도 처음 식사자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고기 안먹습니다"라고 밝히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재현되고 있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 "닭고기 오리고기도 먹지 않느냐?" "생선은 먹느냐? 계란은?" "우유는?" 식사시간동안 끊임없이 계속되는 질문공세는 급기야 "가족들도 같이 채식을 하느냐?" "식사준비를 어떻게 하느냐?"는 내 가족구성원들의 식성 파악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고기집에서 하는 식사자리에서도 웬만하면 아무말 없이 같이 식사를 하는 편이다. 

어떻게 채식주의자가 고깃집에서 밥을 먹느냐고? 사실 고깃집에서도 채식주의자가 먹을 만한 음식은 많이 있다. 일단 비싼 고깃집일수록 그만큼 야채도 다양하게 푸짐하게 나오고 석쇠 위에서 익고 있는 고기 외에는 거의 다 야채반찬이기 때문이다. 상추나, 깻잎 같은 푸성귀 위에다 김치나 쌈장, 마늘, 고추를 얹어서 먹음직스럽게 먹으면 주변사람들도 고기를 먹는 줄 알고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사실 그런 식사 자리에서 옆자리에 누가 뭘 먹는지 신경 쓰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속한 테이블의 고기가 없어지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나더러 고기 많이 먹으라는 인사만 자주 들을 뿐이다.


이런 속임수가 힘든 경우는 내 경험상 순대집 정도가 아닐까 싶다. 순대집은 정말 김치깍두기 외에는 내가 먹을 만한 메뉴도 반찬도 전무하다. 그럴 때는 그냥 순순히 자수하고 맨밥에 김치만 먹을 수밖에 없다. 이도저도 귀찮으면 아예 도망가든지.

내 직업의 특성상 이런 저런 회의에 참석할 기회가 많은데 회의시간이 오전 11시 내외로 잡히면 십중팔구는 점심식사까지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나 같이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특히 그것이 가까운 사이끼리의 회합이 아닌 어려운 자리일 경우에는 점심메뉴가 뭔지를 조심스럽게 살피게 된다. 얼마 전의 경우처럼 식사장소가 이름난 갈빗집일 경우에는 최대한 표시나지 않게 바쁜 표정과 미안한 표정을 함께 지으며 선약을 들어 황급히 빠져나와야 한다. 어려운 자리에서 고기 먹는 연기까지 하면서 같이 밥을 먹기란 정말이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고기를 먹지 않고 사회생활 하기는 참으로 많은 인내와 현란한 기술을 요구한다. 김밥 먹을 때 햄을 이쑤시개로 찍어내고 치즈피자에 점점이 박혀있는 햄을 덜어내야 하는 편식 어린이 같은 모습도 본의 아니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 김치만두라도 먹을라치면 그 안에 오롯이 함께 섞여있는 돼지고기에 젓가락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야채샌드위치라고 해서 사가지고 사무실에 오면 그 속에 함께 들어있는 얇은 햄 한 조각 때문에 옆 동료에게 주든지 배가 아주 고프면 그 햄 조각을 떼어 내느라 또다시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진상을 떨어야 한다.

남자가 고기를 안 먹으니 힘이 생기나?

처가에 가면 예전에는 간단한 고기요리 한가지면 한 끼가 간단히 해결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기를 먹지 않는 별난 사위 때문에 갖가지 나물 무침을 하느라고 수고하시는 장모님과 안 그러셔도 된다는 나 사이에 매번 옥신각신하는 일이 벌어진다. 심지어 큰 아이를 낳고 둘째를 낳기까지 9년이 걸렸는데 그 사이 채식으로 바꾼터라 '남자가 고기를 안 먹으니 힘이 생기나?'라는 논리의 억지 공격도 주변에서 무수히 받기까지 했다.(채식을 한 후 태어난 둘째는 아주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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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을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 최오균


이렇듯 어렵고 불편한 것이 채식이지만 계속 해왔던 것은 우선 채식이 나와 잘 맞았고 채식을 하면서 하나 둘씩 알게 되는 채식의 긍정적인 점이 상당히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우선 채식을 하면 건강해진다고 하는데 나 같은 경우 솔직히 채식을 하기 전과 비교해서 커다란 건강상의 변화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마흔을 넘긴 나이에도 배가 전혀 나오지 않았고, 건강검사에서도 지극히 정상적인 수치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채식의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내가 받는 채식주의자의 질문공세 자리에 성소수자나 장애인을 앉혀 놓는다면 '어떻게 성소수자가 되셨어요?' '어떻게 장애인이 되셨어요' 라는 질문 따위가 당사자에게는 얼마나 피곤하고 또 폭력적이기까지 한지 채식을 하지 않았다면 쉽게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다분히 다수에 의한 지배논리와 획일성이 많이 상존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고기를 먹지 않는 '소수자'인 나의 행위가 우리사회를 여러 가지 면에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적이 많았다는 점도 채식을 통해 얻은 소득으로 꼽고 싶다.

또 고기를 먹을 때는 그냥 스쳐 지나갔던 사실들이 때로는 아프게 각인되는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한 해에 무려 760만 명의 어린이가 다섯 살 생일을 맞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으며, 이 가운데 260만 명은 '영양실조' 때문에 아사상태에 있는 현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저편에는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40%정도가 가축사료로 사용되는 불편한 사실들 말이다.

채식주의자가 맘 놓고 밥 먹는 식당 많아졌으면

몇 년 전 동남아의 한 휴양지에 갔을 때 현지의 작은 식당에 간 적이 있었다. 음식 메뉴판을 보고 있는데 한 쪽 페이지에 베지테리안 메뉴(Vegetarian Menu)가 있었다. 관광지 작은 식당이라지만 엄연히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던 베지테리안 메뉴가 나에게는 꽤 인상 깊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꽤 큰 식당에서도 채식인을 위한 전용메뉴를 본 적이 없던 터라 더욱 그랬다.

우리 주변에 나 같은 채식주의자가 마음 놓고 밥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나마 나는 해물류는 먹지만 완전 채식인 비건 채식(vegan)분들에게 오늘 점심시간은 또 얼마나 힘든 시간일까?
#채식주의 #페스코채식 #베지테리안 #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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