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야, 고맙다, 멘붕에서 구해줘서"

지난 가을 베란다 화분에 심은 4포기 중에서 살아남은 한 포기 배추

등록 2012.12.22 19:33수정 2012.12.22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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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가을 앞 베란다 화분에 심은 4포기의 배추 중에서 홀로 살아남아 씩씩하게 자란  배추 한 포기

지난 가을 앞 베란다 화분에 심은 4포기의 배추 중에서 홀로 살아남아 씩씩하게 자란 배추 한 포기 ⓒ 이승철


"요즘 왜 외출도 안 하시고 집에만 계세요?"
"집에만 있으니 밥맛이 없지? 친구들도 만나고 외출 좀 하세요?"


다 큰 딸과 아내가 걱정하며 하는 말이다. 그럴 만도 하다.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외출을 했었는데 벌써 3일째 집안에만 처박혀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입맛도 뚝 떨어졌다. 아침도 대충 먹었는데 점심에도 우유 한 컵과 김치반찬 한 가지를 곁들인 찐 고구마 몇 쪽으로 때웠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요즘 내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이었을까? 어제도 그제도 정말 너무나 우울한 날이었다. 한 곳에 원고를 보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맹맹한 상태로 집안에서만 뒹굴다니, 이런 걸 요즘 말로 멘붕이라고 하나보다.

고구마 몇 쪽으로 점심을 때우고 나니 거실에 찾아든 햇살이 쨍하다. 햇살에 힘입어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오늘이 주말이다. 베란다 화분들에 물주는 날이다. 서둘러 물주기에 나섰다. 그런데 이상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화려하게 꽃을 피우던 연산홍이 그냥 그대로다.

기온이 낮아서일까, 화분 아래 떨어진 노란 낙엽만 수북하다. 게발선인장도 꽃피울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몰아쳤던 추위 때문일 것이다. 거실 앞 베란다에 있는 화분들에 정성껏 물을 주었다. 그런데 "저게 뭐지?" 저쪽 안방 앞 베란다 한쪽에 파란 잎들이 무성하다.

배추였다. 요 며칠간 까맣게 잊고 지낸 배추, 그런데 며칠 사이 배추는 쑤욱 자라있었다. 물도 주지 않고,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전에는 이틀에 한번 씩은 꼭 물을 주었는데, 요 며칠 맹맹한 정신 상태가 배추를 잊게 한 것이다.


a  찐 고구마 몇 쪽으로 때운 오늘 점심

찐 고구마 몇 쪽으로 때운 오늘 점심 ⓒ 이승철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자란 배추 한 포기는 사연이 많다. 지난여름에 고추 4포기를 심어 40여개가 넘는 풋고추를 따먹은 그 화분에서 자란 배추이야기다. 가을에 접어들자 풋고추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고추나무 줄기 윗부분을 잘라내고 어린 배추 4포기를 사다가 심었다.

그런데 배추모를 옮겨 심은 계절이 늦어서인지 작고 오종종한 배추들이 자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배추들이 자라기는커녕 자꾸 오그라드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작고 어린잎들을 무언가가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배추 잎을 갉아먹는 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작은 배추 4포기 때문에 살충제를 구입해서 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동안 배추 2포기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 두 포기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베란다에 나갔다가 우연히 배추를 살펴보게 되었는데 이게 웬일, 어린 배춧잎에 달라붙어 갉아먹고 있는 벌레가 눈에 띈 것이다. 웬 벌레일까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더욱 놀랍다. 무슨 벌레가 아니라 집 없는 달팽이였기 때문이다.

집 없는 달팽이는 거실 앞 베란다 화분에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달팽이들이 몇 미터 떨어진 거실 앞 화분에 어린 배추가 자라는 것을 알고 침범한 것이다. 다음 날 화원에 찾아가 물으니 어린 배춧잎은 달팽이가 좋아하는 먹이라고 했다.

2포기의 어린 배추도 집 없는 달팽이들이 먹어치운 것이 틀림없었다. 이날 밤부터 배추를 지키기 위한 집 없는 달팽이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날마다 해가 지고 어둑해진 한두 시간 후 나가보면 어김없이 달팽이 한두 마리가 배춧잎을 갉아먹고 있거나 근처에 접근 중이었다.

a  배추야 고맙다

배추야 고맙다 ⓒ 이승철


이때부터 눈에 띤 달팽이는 창문 밖 화단으로 추방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달팽이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어린 배추가 도무지 자라지 않는 것이다. 처음엔 계절이 너무 늦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주말농장을 하는 지인에게 물으니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별로 크지 않은 화분에 고추 4그루를 심어 40개가 넘는 풋고추를 따먹었으면 화분의 흙 영양소가 메말랐을 것이라고 한다, 결국 그 지인이 주말농장을 하며 사용하던 비료 한 줌을 얻어다가 배추 주변에 뿌려주기로 했다.

비료를 어떻게 뿌려줄까 생각하다가 어린배추 주변에 작은 구멍 몇 개씩을 뚫고 비료 몇 알씩을 넣어주기로 했다. 그 다음에 물을 뿌려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다음 날 저녁 때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어린 배추 2포기 중 한포기가 거의 말라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급히 지인에게 전화로 물어보니 어린 배추 가까이에 비료를 너무 많이 준 것 같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배추를 살리려면 빨리 많은 물을 화분에 뿌려 비료성분이 씻겨 내려가게 하라는 것이었다. 지인의 지시대로 곧 많은 물을 화분에 뿌려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들어가던 한 포기는 구할 수 없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 포기의 배추를 어떻게 크게 자라게 할 수 있을까? 다음부터는 비료를 줄 때 배추에게서 되도록 멀리, 아주 작은 양을 주고 이틀에 한 번씩 물을 주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키우고, 제법 크게 자란 배추 한 포기, 올해 초겨울부터 몰아친 한파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고 있는 배추 한 포기는 그래서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렇게 특별한 배추를 까맣게 잊고 4일간이나 돌보지 않고 지내다니.

"배추야, 고맙고 미안하다, 이제 널 잊지 않고 돌봐줄 테니 아무리 추워도 잘 이기고 씩씩하게 자라다오"

오늘부터 맹맹하게 지냈던 지난 며칠을 떨쳐버려야겠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 죽음의 고비를 이겨내고 싱싱하게 자란 한 포기의 배추처럼, 희망을 잃고 좌절감에 빠졌던 수많은 사람들도 새롭게 떨쳐 일어나기를 기도해야겠다.
#배추 #고구마 #멘붕 #집 없는 달팽이 #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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