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포털 뉴스캐스트 중에 진성여왕 이후 처음으로 여성 리더의 시대가 열렸다는 뉴스 제목이 눈에 들어옵니다. 세기를 거슬러 진성여왕의 이름까지 운운해야 할 정도로 우리나라가 여성에게 여전히 닫혀진 사회라는 것을 함축하기도 하고, 또 여성에게 국가를 통솔하는 지도자의 자리를 내어줄만큼 열린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역시나 이번 대선의 결과는 여전히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가 뚜렷히 남아있다는 걸 확인하는 사건 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 향수가 사실에 근거하든 하지 않든.
개인적으로 문재인 후보의 당선을 바라긴 했지만, 박근혜 후보가 당선이 된 지금, 마음이 그리 번잡스럽지는 않습니다. 내심 국민정부와 참여정부를 겪었던 경험이 체화된 까닭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정 개인이 대통령으로 당선 된다고 해서 국가의 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오기란 실로 산을 옮기는 것 만큼 어렵다는 불편한 진실.
정치학자 David A. Welch(2005)가 외교정책을 다룬 그의 저서 Painful Choice 에서 "The ship of state is ordinarily ponderous, not nimble(p. 244)"라는 말을 했습니다. 국가들의 행태를 연구하면 할 수록 그의 생각에 깊이 공감하게 되는데, 국가는 실로 거대한 군함과도 같아서 캡틴이 바뀐다고 항로가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그들이 행하는 관습, 행동을 규제하는 규례에 변화가 있지 않고서는 개인은 이미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사회구조의 부속품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회구조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층에 의해 견고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변화를 꾀하는 의식과 행동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국가 (state) 라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엘리트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까닭에 우리가 흔히 기득권 (vested rights)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소수의 엘리트 집단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 기득권이 다수 시민들에게 돌아가 있는 북유럽 국가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네델란드의 정치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는 모습을, 수준 높은 공교육을 받고 있는 덴마크의 아이들을, 풍요롭게 복지정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스웨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면서 늘 '대통령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정치에 임해왔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특정 정당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느냐 보다 (물론 사회구조에 변화를 주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그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어떻게 해야 전체적인 사회구조에 변화를 꾀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는게 우선입니다.
혹시라도 야권정당 후보가 낙선한 것을 두고, "이래서 한국은 안돼!"라는 마음이 들고, 5년 후 대선을 기약하고 있다면, 그대도 이미 사회구조의 부속품이 되어버린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의식이 팽배해 있는 한 어떤 정당의 후보가 당선이 되더라도 대한민국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 걸음을 할 게 분명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국가정책은 쉽게 방향이 틀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대한민국은 다시 유신체제를 견디기엔 이미 상당한 거리의 바다를 헤쳐 왔기 때문에 박근혜 정권이 당신들 뜻대로 대한민국을 통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문재인씨가 당선이 됐어도 마찬가지. 시민의 과반이 변화 보다는 현상유지를 원하는 이상 딱 노무현 정권만큼 진보할 수 있었을 거라는 게 제 추측입니다.
다만, 대한민국은 분명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단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시기인 지난 5년을 돌아보면, 민주화에 획을 그을만한 여러 사건들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유다가 없었다면 예수가 '하늘의 뜻'을 이루지 못했을 거라는 식으로, 이명박 정권의 탄압이 없었다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지금처럼 뜨겁지는 못했을 거라는 전후가 뒤 바뀐 해석은 지양해야겠지만, 지난 5년 동안 이뤄 낸 민주화의 열매는 실로 크고 답니다.
현재 지구 반대편 케냐에서도 대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케냐 라고 하면 외부원조에 의존해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정도로만 인식되지만, 사실 국토면적은 대한민국에 세 배에 달할 뿐만 아니라 1970년대만 해도 대한민국 보다 나은 GDP를 가지고 있던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케냐에선 문자 그대로 선거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케냐 시민들은 여전히 '유신'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절반이 넘는 지구상의 인구가 여전히 그런 억압과 탄압의 시대를 살고 있다면 믿어지십니까?
대한민국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정말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나라이며 대단한 역량을 가진 민족입니다. 다만, 그 역량이 경쟁과 증오를 재생산하는 사회구조 속에 갇혀 있음을 인지하고, 좀 더 건설적인 방법으로 사회가 진화해 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시민이면 누구나 바라는 청렴하고 겸손한 정치인, 창의적인 공교육 시스템, 보람되고 즐거운 사회생활, 잔잔한 기쁨이 있는 노후, 소위 '숨 통이 트이는 대한민국'이 되기 위한 작은 첫 발걸음은 상대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믿습니다. '묻지마 보수'는 우리의 아버지이며, 보수 정당의 지지층으로 운집한 50대는 우리의 삼촌, 이모님들입니다. 그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들과 함께 사는 대한민국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대한민국이 새롭게 나아가야 할 '창'이 열릴 거라고 확신합니다.
앞으로의 대한민국의 미래는 결코 '여왕 박근혜'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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