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8일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무엇보다 내가 이번 대선 결과에 절망하는 것은 앞선 5년간의 기억 때문이다. MB와 함께 시작된 나의 30대, 5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나 결혼을 하고 셋째까지 출산할 수 있는 시간.
사실 5년 전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멘붕 상태는 아니었다.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 뻔했던 만큼 박근혜 후보든, 이명박 후보든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10년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통령이 누가 되든 사회는 그리 많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이 있었다. 비록 경제적 민주화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1987년 이후 우리 사회는 제도적 민주화는 이루었으니 과거로의 회귀는 불가능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MB 정부 초기에는 10년 동안 축적된 상식을 바탕으로 많은 이들이 촛불집회 등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냈지만, 이는 시간이 갈수록 힘든 일이 되었다. 미네르바 구속, 불법 민간인 사찰, MBC 'PD수첩'팀 검찰 수사 등 MB 정부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만행들을 저질렀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그만큼 퇴행하기 시작했다.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사람들은 벌금이 무서워 입도 뻥긋 못하는 사회로 어느 순간 흘러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MB의 임기가 5년이란 사실이었다. 그래도 5년이 지나면 대통령이 바뀌고 MB 정부의 실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어쨌든 2010년 지방선거의 결과와 박원순 서울시장의 등장은 그와 같은 희망을 눈앞의 현실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결국 <나는 꼼수다>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희망이 사회 저변에 흐르고 있었기에 가능했었던 일이다.
그리고 맞이한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시대. 문제는 MB시대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쳐있다는 사실이다. MB 정부 때야 이전 10년을 바탕으로 5년만 참으면 된다며 서로 위로하고 저항하고 조소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난 5년 간 우리는 말도 되지 않는 행태를 너무 많이 보아왔고, 너무 많이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대선 이후 5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죽은 이 초유의 사태는 그런 절망이 너무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나간 시간이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다가올 시간의 전주곡 같이 느껴지는 이 불길함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짐작할 수 없는 박근혜 당선자의 모습 내가 멘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박근혜 당선인 본인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보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짐작할 수 없는 박근혜 정부의 성격.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난 박근혜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른다.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과 아버지, 어머니가 비명횡사하여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정치를 시작하면서 그 상징성으로 모든 것을 이미 획득했다는 게 전부이다. 그의 말마따나 15년이나 정치를 했건만 박근혜는 그동안 자신을 온전히 대중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언론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준 이미지가 전부일 뿐이다. 그러니 그의 의중을 짐작함에 있어서 현재 그의 언사보다는 살아온 과거,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력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이번 선거에서 가장 기대했던 장면은 대선 TV토론이었다. 그것은 15년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비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정치인을, 그리고 전혀 준비하지 않은 질의문답 등을 통해 유일하게 박근혜의 '생얼'을 볼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과연 박근혜는 어떤 인물일까? <나는꼼수다> 등에서 씹어대듯이 그리 명석하지 않은 사람일까? 아니면 우리네 부모님의 믿음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리 없는 사람일까?
사실 1, 2차 TV토론 중 박근혜 당선인이 이정희 후보의 공격을 받으며 버벅거렸을 때는 그럴 수도 있으려니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바로 면전에서 그렇게 신랄한 비난을 받는데 어떤 누가 매끄럽게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마도 박근혜 후보는 그와 같은 상황 자체가 생소했던 만큼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후보와의 양자 토론으로 진행된 3차 TV토론은 달랐다. 문재인 후보는 이정희 후보와 달리 가급적이면 인신공격을 피했고 정책적인 문제만을 따졌는데, 그 와중에 박근혜 당선인의 '생얼'이 튀어나왔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마주쳤을 때 보이는 박근혜 당선인의 태도가 드러난 것이다. 한 팔을 의자에 걸치고 뒤로 몸을 약간 젖힌 채 '그래서 내가 대통령이 되려는 것'이라던 그. 그것은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상사의 모습이었으며, 자신이 모르거나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을 접했을 때 공격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나이 60을 살아오면서 '갈등조절'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박근혜 당선인의 민낯 그대로였다.
박근혜 당선인은 MB와 달리 진짜로 국가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국가를 개인의 수익창출 모델로 삼았던 MB와 달리 박근혜 당선인은 국가가 아버지인 이상 국익에 대해 좀 더 고민할 것이며, 서민의 삶 역시 박근혜 당선자가 MB보다는 더 챙길 수도 있겠다. MB에게 서민이란 자신의 부를 늘리는데 있어서 도구의 대상이지만, 박근혜 당선인에게 서민이란 자신이 다스려야할 백성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박근혜 당선인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를 마주치는 경우이다. 과연 박근혜 당선인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난 그 이후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박근혜 당선인은 그와 같은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고, 그가 유일하게 보고 배웠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와 같은 경우 반대하는 자들을 모조리 힘으로 억압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