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짝없이 먹히는 어미는 웃는다, 그리고 나도...

[서평] 사십대 중년의 삶이 전해지는 김주대 시인의 <그리움의 넓이>

등록 2012.12.27 18:21수정 2012.12.2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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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끝나고 새벽에 들어오는 아이의
추운 발소리를 듣는 애비는 잠결에
귀로 운다
- '부녀' 전문

40대 중년의 애비가 다 큰 딸의 발소리를 들으며 '귀로 운다.' 이유는 다름 아닌 생활고. 가슴이 아릿하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하룻밤 사이에 어른이 되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아이였던 딸은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되어 있었다. (중략) 연극영화과에 합격했지만 밀린 학원비 내달라고 화를 내고 말대꾸할 때 기회를 잡은 나는 딸을 때리며 집 망한 사실을 고백하다 울었다. 눈물을 본 딸은 이튿날 바로 다시 아이가 되었다. - '딸' 중

대선 전날 펴 든 시집 <그림움의 넓이>,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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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넓이>. 막걸리 한 잔, 시집 한 장. 대선 전날 그렇게 읽었다. ⓒ 창비


지난 대선 전날 저녁, 가끔씩 들르던 서점에서 김주대 시인의 <그리움의 넓이>(창비)를 집어 들었다. 대학 동기들과의 송년 모임. 약속 시간보다 한참 앞서 자리를 잡았다. 시집을 펼치자 첫 장부터 묵직하다. '시간의 사건', 첫 시를 보고 잠시 접어놓는다. 막걸리 한 잔, 심호흡을 가다듬는다. 한 장, 한 잔 넘어가는 그만큼씩 사람이 그리워진다.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나에게 어머니는 늘 잠깐 다녀가는 아모레 화장품 냄새였다. (중략) 외할머니가 죽은 뒤 어머니 곁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이미 고교생 주정뱅이가 되어 있었고 주색에 빠졌으므로 달덩어리 어머니를 사랑하지 못했다. (중략) 어머니의 아모레 화장품 냄새가 지겨울 무렵 무작정 상경하여 재수생이 되었다. 그런데 객지의 어느 쓸쓸한 날 서울역 역사 지붕 위로 어머니의 얼굴이 달처럼 솟아오르는 게 다시 보였다. 어머니는 어머니, 어머니는 언제나 어머니. - '어머니' 중

옛날부터 우리 엄마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 나도 이제 꽤 나이가 들었다 생각하며 찾아갔는데 / 홀로 사는 엄마는 어느새 또 나보다 나이가 많아 있었다 / 흰머리 이고 저만큼 가신 당신을 / 서둘러 따라가 동무해주지 못하는 그것이 오늘 슬펐다 - '엄마' 전문


어릴 적 '어머니'는 시인이 중년의 나이가 되자 거꾸로 '엄마'가 되었다. 주정뱅이로 방황하며 동무해 주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엄마에 묻어난다. 시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제목 그대로 그리움이다. 삶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시선은 애틋하면서도 따뜻하다.

아이가 머리보다 크게 입을 벌리고 운다
목 위에, 터널처럼 뚫린 입만 보인다
몸이 빨려들어갈 것 같다
제 울음 속으로 아기가 사라지기 전에
어미는 사방을 한번 둘러보고는 얼른 젖을 물린다
어미가 아기의 입속으로 빠르게 빨려들어간다
아기의 모가지가 꿀떡꿀떡 어미를 삼킨다
꼼짝없이 먹히는 어미는 포식자를 내려다보며
웃는다
어미의 웃음까지 한참 먹어치운 아기가
먹다 남은 어미를 올려다보며
웃는다
- '노약자석 웃음 두 개' 전문

사내가 턱에 거린 휠체어를 밀어주자
휠체어에 앉은 여자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덜컥, 웃는다
휠체어를 밀어준다는 것이 그만
여자의 이마 안에 감춰진 미소를 민 모양이다
휠체어에 앉은 여자의
안면 쪽으로 밀려나온 미소가 들어가지 않는다
미소가 앞장서 간다
휠체어를 미는 사내가
여자의 미소에 웃으며 끌려간다
미소가 웃음을 끌고 가는 언덕길 오후
- '웃음을 끌고 가는' 전문

내게 김주대 시인은 우상 같은 존재

1990년대,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며 나는 한때 문학청년을 꿈꾸었다. 그러나,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흔한 노래 대신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외우던 친구, 여름 방학 동안 무려 100권의 책을 독파하던 친구, 입만 열면 문학 작품을 줄줄 내뿜던 선배, 가을 잎 처량하게 목숨을 다하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 감수성 예민하던 친구 등을 보면서 문학은 내 갈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런 내게, 학과 선배인 김주대 시인은 우상 같은 존재였다. 김주대 선배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90년 <도화동 사십계단>을 처음 선보인 뒤 1991년 <그대가 정말 이별을 원한다면 이토록 오래 수화기를 붙들고 울 리가 없다>를 연이어 펴냈다. 첫 시집이 민중시라면 두 번째 시집은 연애시라고 할 수 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20대에 김주대 선배는 성격이 사뭇 다른 시집을 펴낸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이 모든 학문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시대.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 만약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의 길을 가겠다고 하면 많은 부모들이 반대할 것이다. 오죽하면 국문과를 '굶는 과'라고 했을까.

그러나 삶이 힘들고 고달플 때 누군가는 위로의 시를 읊어주고 누군가는 미술 작품과 음악 공연을 보여줘야 하는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무한 경쟁 속에 피 말리는 전쟁을 벌이는 현실에서는 가슴을 울리는 예술 작품은 때론 위험하게 느껴진다. 자칫, 이 생존경쟁의 정글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산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야 하며 감상에 빠뜨리기 쉬우니까.

그럼에도 김주대 선배의 시를 다시 만난 건 큰 기쁨이다. '아, 선배. 배고프고 힘들어도 이렇게 시인의 삶을 살고 계시네요. 사람들 대신 그리워해주고 울어줘서 고마워요.'

먹물을 잔뜩 묻힌 굵은 붓이 화선지에 한일자를 쓰듯 /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쓸며 지나간다 (중략) 농담을 조절하며 수묵화를 그린다 / 여럿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울음의 귀로 듣는 수묵화 / 아, 있는 대로 입을 벌리고 / 누군가를 저토록 까맣게 운 적이 내게도 있을까 - '귀로 듣는 수묵화' 중

무쇠 같은 어둠을 때려 / 멍멍하게 피멍이 운다 / 아랫도리가 벗겨진 채 시퍼렇게 언 맨살로 / 울음을 하혈한다 / 이마로 밤의 정면을 들이받으며 울음이 간다 / 먼 곳까지 온통 울려놓고 / 너는 / 허공의 이쪽에서 조용히 목을 맨다 - '동종' 전문

"세계는 꼼짝없이 그리움의 안이다"

김주대 선배의 시에는 그리움과 소멸이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짐작컨대 가슴 가득 뜨거운 애정이 샘솟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 대한 치열하고 무한한 성찰이 없다면 그리움과 소멸이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빗방울 하나가 / 차 앞유리에 와서 몸을 내려놓고 / 속도를 마감한다 / 심장을 유리에 대고 납작하게 떨다가 / 충격에서 벗어난 뱀처럼 꿈틀거리더니 / 목탁 같은 눈망울로 / 차 안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 어떠한 사족(蛇足)도 없이 미끄러져, 문득 / 사라진다 - '가차 없이 아름답다' 전문

영혼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 그리운 곳을 간다 / 세계는 꼼짝없이 그리움의 안이다 - '호모 싸피엔스 싸피엔스' 전문

김주대 선배, 영혼의 맑은 울림을 계속 들려주길 바랄게요. 선배가 적은 시구 그대로 '꿈을 가진 사람'으로 그렇게 남아주길 기원 드릴게요. 덧붙여 그동안 선배의 글을 오마이블로그에서 몰래 엿보다가 이렇게 감히 시집 소개라는 글을 쓰게 된 것을 용서해 주시길.

공격의 1차원 선의 세계이다. (중략) 그리움은 2차원 면의 세계이다. (중략) 슬픔은 3차원 입체의 세계이다. (중략) 꿈을 가진 사람은 / 시간과 공간 이동이 가능한 4차원의 세계로 갈 수 있다. / 나열된 3차원의 세계들을 연속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 꿈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  최종적으로 인간의 삶은 꿈을 통해 과거든 미래든 /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 그리고 이동에는 반드시 영혼이 동행하게 된다. - '영혼의 인간' 중
덧붙이는 글 <그리움의 넓이> 김주대 시 / 창비 / 143쪽 / 2012년 11월 26일 초판 / 8,000원

그리움의 넓이

김주대 지음,
창비, 2012


#김주대 #그리움의 넓이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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