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카드빚" 타령이지만, 내 맘대로 썼습니다

아들이 알바해서 준 용돈으로 고향 사람들에 점심 대접하던 날

등록 2013.01.10 20:58수정 2013.01.10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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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댓돌 고향집 댓돌에 놓인 고무신에도 눈은 쌓여만 가고. ⓒ 김도수


지난해 대학에 들어간 아들은 올 겨울방학 동안 학교에서 실시하는 교육봉사를 이수해야 해서 집에 오지 못하고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난 연말 새해 새 아침은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며 집에 왔다. 집에 도착하는 날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뜬금없이 돈 봉투를 내민다.


"나 지금 아르바이트 해요. 초등학교 4학년 가르치는데 일주일에 세 번씩 가기로 하고 40만원 받았어요. 학교 인근이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돼서 할 만해요."
"사람이 살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보는 게 좋지. 네 삶이 풍요로워져서 좋기는 허다만은 공부 열심히 히서 장학금을 타오는 게 나는 더 좋다."
"아빠! 괜찮아요. 열심히 공부해서 임용고시 붙을 자신 있으니까 넘 염려하지 마세요."

아들은 돈을 꺼내 아빠, 엄마, 누나에게 각 10만 원씩 나누어준다. 그리고 자기도 용돈으로 쓴다며 10만 원을 지갑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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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료포대 썰매 이웃 새몰마을에 전주에 사는 아이들이 할머니 댁에 놀러와 비료포대를 이용 썰매를 타고 있다. ⓒ 김도수


"마냥 어린애 같기만 하던 아들이 다 커서 돈을 벌어다 내 손에 쥐어주니 고맙기만 하구나. 잘 쓸게."

아들이 아르바이트로 벌어온 '첫 돈'을 쥐고 어디에 쓸까 고민했다. 잃어버린 목도리를 살까? 아님 추운데 내의를 한 벌 사 입을까? 돈을 만지작거리다 첫 봉급 타서 어머니께 옷 한 벌 사드려니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셔 한없이 울던 생각이 났다.

아, 그래. 이 돈은 나를 키워주고 길러주신 우리 부모님과 고향 사람들을 위해 써야지. 나와 내 자식들 세끼 밥 편히 먹고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뒷바라지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들을 위해 쓰는 게 맞아.


부모님께 '효도'하려 해도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 주말에 집에 오면 어머니 수중에 돈 한 푼 없어 맨발로 이 집 저 집 돈 꾸러 다닐 때 선뜻 빌려주신 마을 사람들이 계시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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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와 동태 마을 사람들에게 드릴 찬거리를 아내와 함께 사가지고 갔다. ⓒ 김도수


"가애 엄마! 항상 애기로만 보이던 아들이 고생히서 처음으로 벌어온 돈을 이렇게 쥐고봉게 기분이 참 묘허고만. 의미 있게 써야 헌디 어디다 쓸까 고민허다 결정힜네. 자네는 그 돈 어따 쓸랑가?"
"어따 쓰기는 뭐설 어따 써! 봉급 타먼 일주일도 못가 맨날 마이너슨디. 돈 이리 내놔! 아들이 애쓰게 벌어온 돈을 진짜로 쓸라고 힜소? 등록금 낼 때 보태 써야지 쓰기는 어따 쓸라고 혀! 지금 카드빚이 얼마나 된지 알기나 허요?"
"음마! 아들 뒷바라지 히서 처음으로 벌어온 돈잉게 나도 내 맘대로 한번 써봐야제 시방 뭔 소리여!"
"도대체 어디다 쓸라고 그러요?"
"고향 사람들에게 찬거리나 좀 사다 드릴라고 허고만. 눈이 몽땅 니리서 어디 장에나 한번 갔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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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뫼마을 '윗골'에 있는 소 막사에 쇠죽 주러가는 동환이 어르신. ⓒ 김도수


"아이고 지금까지 그만큼 사다드렸으먼 됐어. 넘 오바허지 말고 돈 이리 내놔! 마이너스 카드 내역서 볼 때마다 한숨 나와 죽겄는디 어따 쓸라고 난리여. 하여간 그 돈 쓰기만 허먼 알아서 혀. 좋지 못헐 텅게."

그날 밤 결혼해서 수십 번도 더 들었을 두메산골 어린 시절 가난했던 이야기가 실타래 풀리듯 또 이어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육성회비를 기한 내 못 낸다고 집으로 돌려보내면 어머니는 집집마다 돈 빌리려 다녔는데 당장 비료 사와 농사지을 돈까지 기꺼이 빌려주던 고향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계신다고. 나와 함께 어깨를 맞대고 모를 심던 사람들, 이제 거의 다 돌아가시고 몇 분만 남아 겨우내 마을 회관방에 모여 밥상 두 개면 충분한 지금 사가지 않으면 난 두고두고 후회 한다고.

1월 6일 일요일 아침. 아내와 나는 오일장이 열리는 광양시장으로 발길 옮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가고 오늘, 고향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생각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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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회관 겨우내 함께 모여 사는 마을 회관 ⓒ 김도수


"가애 아빠! 조기 한 상자만 사야 돼! 더 이상 뭐 사자고 힜다 허먼 나 도로 집으로 들어가불 텅게 그리 알아."
"알았어. 걱정허지 마!"

지금 시골에는 눈이 많이 내려 분명 찬거리가 부족할 게 뻔하다. 마을 사람들 하루 종일  마을회관에 모여 점심과 저녁까지 해 드시고 헤어지니 지난해 겨울처럼 김치 하나에 드시고 계신지 모를 일이다. 그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나는 비교적 양이 많고 저렴한 콩나물 가게부터 들어섰다.

"콩나물 같은 싼 거 좀 사가세. 이왕이먼 두부도 한 판 사가고."

내 예상은 적중해 아내는 콩나물과 두부 한 판을 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두부와 콩나물을 나눠 들고 다니면 혹시 아내가 힘들어 신경질 낼까봐 가게에다 맡겨두고 조기를 사러 돌아다녔다. 조기를 골라 놓고는 "이왕이면 저기 저 동태도 좀 사가세. 조기를 많이 사니까 싸게 줄턴디…" 하고 말을 건네자 "아예 장을 봐서 가지 그러요!" 면박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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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등 마을 앞 꽃밭등과 섬진강 ⓒ 김도수


눈을 흘기면서도 아내는 "저기 저 동태는 얼매요? 좀 싸게 줏쇼. 우리 묵을라고 사는 게 아니라 우리도 마을 어르신들 갖다 줄라고 헝게 젊은 아저씨도 봉사헌다 생각허고 좀 싸게 줏쇼" 하며 동태도 산다. 시장을 나오려 하니 맨 끝에 과일 좌판들이 죽 늘어서 있다. 나는 침을 꼴딱 생키며 말했다.
"가애 엄마! 이왕이먼 귤도 좀 사가세. 오랫동안 눈 속에 갇혀 있응게 얼매나 과일이 묵고잡겄는가. 귤 한 박스만 사가세!" "환장허겄네. 조기만 사간다고 허더니 이것저것 다 사네." "나도 아들이 준 돈 일부 헐어서 썼응게 그리 알아!" "잘 힜어. 장바구니 들먼 돈 뭐 쓸 것 있가디. 남에게 복을 주는 사람은 복도 대물림으로 도로 받는 법이여! 남에게 베풀먼 다 자식들한테 돌아가." "글먼 술은 안 사갈라요?" "당신 모르게 젠작 트렁크 속에 사다 넣어 놨제. 내가 누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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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저리소산 아래 섬진강이 산에 막혀 휘돌아 나가고 있다. ⓒ 김도수


마을에 도착하니 회관 지붕은 아직 리모델링 공사가 안 끝났고, 내부 시설은 다 끝났는지 현관에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허허! 뭔 놈의 것을 요로케도 많이 사왔데아, 응. 제삿장 봐온 것맹키로 몽땅도 사와부렀네. 반찬 다 떨어져서 그라니도 내일 순창 나가서 찬꺼리 좀 사올라고 힜는디 자네가 장베기(장보기) 다 봐와불었네."
"저 학교 댕길 때 돈도 빌려 주고, 우리 부모님 농사지을 때 동네 사람들이 도움 많이 줬는디 내가 그 고마운 마음 잊고 살먼 되겄어라우. 그냥 뭐 이것저것 쬐끔 사왔고만이라우."
"공짜로 돈 빌려주고, 공짜로 일 힜가디 그런가. 사와도 너무 많이 사와부렀고만. 자네도 자식들 둘 다 대학 댕긴 게 힘들 턴디 앞으로 요로케 많이 사오지마! 술이나 한두 병 사오먼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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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바위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면 이불을 가지고 나와 별을 벗삼아 잤던 벼락바위에도 눈이 소복이 내렸다. ⓒ 김도수


작년까지만 해도 회관 방은 단열이 잘 안 되어 곰팡이가 피고 찬바람 솔솔 파고 들어와 썰렁하기만 했는데 정부에서 리모델링을 해주니 방에 훈기가 돌며 따스했다. 화장실도 내부에 하나 새로 설치되어 겨우내 편하게 지낼 수 있어 마을 사람들 얼굴마다 웃음꽃이 만발해 있었다.

"다 잘 되았는디 저그 씽크대허고 들어오는 문짝이 영 엉성혀. 문짝은 잘 안 맞아 손 좀 봐야 헐랑가비어. 글고 제섭이네 집 창고에 넣어둔 텔레비만 가져다 놓으먼 참 좋겄는디 제섭이네 어메가 열쇠를 가꼬 서울 자식들 집으로 가부러서 오늘이나 내일 쯤 니론당게 지달려봐야제."

집에 가니 모두 꽁꽁 얼어붙었다. 화장실 좌변기 저장물통에 담긴 물도, 보일러실에 얼지 말라고 부동액을 넣어둔 물통도, 땅 속에 묻어둔 싱건지도, 지붕에서 눈 녹아 흐르는 홈통도, 하수구 내려가는 파이프 관도 모두 꽁꽁 얼어붙어 그야말로 얼음집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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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통과 먹감 연통에서는 연기가 퐁퐁 솟고, 먹감은 홍시가 되어 꽁꽁 얼고. ⓒ 김도수


이 얼음이 녹으려면 아마 따스한 봄이 와야 가능할 것 같다. 지난해 겨울에는 보일러가 얼지 않도록 전기코드를 뽑지 않고 '외출'로 해 놓아 영하로 내려가면 보일러가 자동으로 돌아가면서 방과 보일러실을 지켜줬다.

그런데 주말마다 가던 나도 농한기인 겨울철이면 발걸음 멈추니 맥없이 보일러만 펑펑 돌아가는 게 기름 값 아까워 아예 전기코드를 뽑고 보일러실 호스와 밸브를 이중 보온재로 감싸고 헌 이불로 겹겹이 쌓아 덮어놓았다. 그런데 올 겨울은 유난히 강추위가 계속되어 각 방으로 들어가는 보일러 호스나 보일러실 밸브 관이 터져버릴까 걱정이다.

콩나물 무치고, 멸치 넣어 두부 지지고, 무 썰어 넣고 자박자박 지진 조기찌개와 시원한 동태 국에 먹는 점심. 거기에 곁들여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어찌나 밥맛이 좋더니 고봉밥 한 그릇 눈 깜짝할 사이에 뚝딱 해치우고 나자 '더 묵어라'고 밥그릇 달라 하시는 어머니들 손길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도수! 밥 더 묵소. 여럿이 묵는 밥이라 참 마싯제. 그나저나 오늘 낮에 도수 덕분에 마싯게 잘 묵네. 월국떡이나 월국양반 살았으먼 얼매나 좋아라고 힜겄어."

사는 게 뭐 특별한 거 있겠는가. 행복한 삶, 어디 멀리 가 있겠는가. 나와 부모님 도와주시던 마을사람들 잊지 않고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밥상 마주하며 막걸리 한 사발 따라드리며 함께 웃고 기쁨 만끽하며 누리며 사는 게 행복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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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마을 앞에 놓인 징검다리에도 얼음이 잡히고. ⓒ 김도수


덧붙이는 글 김도수 기자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고향마을로 돌아가 밭농사를 짓고 있고 전라도닷컴(http://www.jeonlado.com/v2/)에서 고향 이야기를 모은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란 산문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김도수 #섬진강 #진뫼마을 #덕치 #장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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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정겹고 즐거워 가입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염증나는 정치 소식부터 시골에 염소새끼 몇 마리 낳았다는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다뤄줘 어떤 매체보다 매력이 철철 넘칩니다. 살아가는 제 주변 사람들 이야기 쓰려고 가입하게 되었고 앞으로 가슴 적시는 따스한 기사 띄우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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