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대법관 믿지 않는다... 당시 법원은 정권의 시녀"

[取중眞담] '형제복지원사건' 수사한 김용원 전 검사의 후일담

등록 2013.02.10 15:46수정 2013.02.1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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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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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부산형제복지원사건을 수사했던 김용원 전 검사. ⓒ 구영식


타깃이 사라졌을 때 생기는 당혹감 혹은 허탈감이 이런 것일까? 지난 1월 29일 오후에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가 그야말로 '전격' 사퇴했을 때 기자의 심정이 정말 그랬다.

당시 기자는 김용준 후보자가 부산 형제복지원사건의 대법원 판결(정확하게는 '2차 상고심') 때 재판장이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몇 가지 연속기사를 준비했다. 당시 부산형제복지원사건을 수사했던 김용원 전 검사(현 법무법인 한별 대표)와 9살(1984년) 때 복지원에 끌려간 피해자 한종선씨(<살아남은 아이> 공동저자)를 연속으로 인터뷰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먼저 평소 알고 지내던 김용원 전 검사에게 연락했더니 "미국 출장 중"이라고 했다. 낭패였다. 할 수 없이 귀국하는 대로 만나기로 하고 인터뷰 추진을 잠시 중단했다. 지방에 거주하는 한종선씨는 <살아남은 아이>를 펴낸 문주출판사를 통해 1월 30일 서울에서 만나 인터뷰하는 걸로 확정지었다.   

당시 수사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김 전 검사의 인터뷰가 난관에 봉착하자 떠오른 것은 그가 지난 1993년에 쓴 저서 <브레이크 없는 벤츠>였다. 그 책은 첫 장에서 부산형제복지원사건을 자세히 다루고 있었다. 우선 그 책의 내용이라도 보도하기로 하고 기사를 작성해 1월 29일 오후 1시께 출고했다.

그런데 기사를 출고한 날 오후 7시께 김용준 후보자가 사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배치 대기중인 기사를 생각하자 당혹스럽고 허탈했다. 곧바로 기사가 배치되긴 했지만 26년 만에 사회적 현안으로 돌아온 부산 형제복지원사건은 김 후보자의 사퇴와 함께 묻힐 판이었다. 민주통합당은 피해자인 한종선씨를 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내세울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계획'에서 멈춰야 했다. 이런저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지난 5일 강남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김 전 검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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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원 전 검사는 "대법원이 엉터리 전제 아래서 원장의 행위를 적법한 행위라고 판단했다"고 비판했다. ⓒ 오마이뉴스


"부산 형제복지원사건이 '부산판 도가니사건'이라고?"

부산 형제복지원사건은 1987년을 뒤흔든 사건이었지만 아주 빨리도 세인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져갔다.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87년'을 상징하는 정도가 하도 커서였을까? 하지만 오래 전 마르크스가 통찰했듯이 "한 번은 희극으로 또 한 번은 비극"으로 돌아오는 역사처럼, 형제복지원사건은 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자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건이 일어난 지 26년 만이었다.


당시 울산지청에 근무하고 있던 김용원 전 검사는 우연한 기회에 얻은 첩보를 바탕으로 "작은 왕국"이었던 부산형제복지원을 수사했다. 치밀하게 조사한 끝에 박인근 원장이 시설에 수용된 3000여 명의 부랑인들을 "정부의 허가 아래 노예로 부리고 있는" 사실을 밝혀냈다. 게다가 형제복지원 자체기록에만 따르더라도 1975년부터 1986년 사이에 총 513명이 구타나 굶주림 등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됐다. 여기에다 박 원장이 국고지원금 11억여 원을 횡령한 사실도 드러났다(1980년대에 '11억 원'은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일각에서는 부산 형제복지원사건을 '부산판 도가니사건'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김 전 검사는 "심각한 인권침해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코미디"라고 일갈했다.


"형제복지원은 말을 안 들으면 패서 죽이는 동네였다. 거기서는 실제로 맞아서 죽기도 했다. 이렇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도가니사건에 있었던) 성폭행, 성추행이 (형제복지원에서는) 의미가 없다."

김 전 검사는 자신의 저서 <브레이크 없는 벤츠>에다 "수용자들은 툭하면 얻어맞아 죽어갔다"며 "의사들은 얻어맞아 죽은 수용자들이 자연사했다고 진단서를 끊어주었다, 그들의 시체는 의과대학에 실습용으로 팔려간다고들 했다"고 참혹했던 복지원의 실상을 기록했다.

"복지원은 부산의 한 도축장에서 선지피를 가져왔다. 선지피는 산업폐기물이어서 팔 수 없었다. 그 선지피에다 시래기와 말라비틀어진 무를 넣고 시래기선지국을 끓였다. 그것을 매일 먹였다. 또 폐결핵에 걸렸는데도 치료도 안 하고 어둠침침한 숙소동에 모아놓았다. 거기는 난방도 안 되고 햇볕도 안 들어왔다. 폐결핵 환자더러 죽으라는 것이다. 그런 시설이었다."

김 전 검사는 "10명도 아니고, 100명도 아니고, 3000명을 감금했다"며 "어느 문명국가가 3000명을 한 곳에 감금하나, 당시 우리나라는 문명국가라고 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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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한종선씨가 그린 그림들. ⓒ 문주출판사 제공


검찰 지휘부는 '수사 방해'하고, 법원은 감금죄에 '면죄부' 주고

김 전 검사의 집념 어린 수사로 불법감금과 국고보조금 횡령 등 부산형제복지원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를 바탕으로 검찰은 1심 재판에서 박 원장에게 징역 15년과 벌금 6억여 원을 구형했다. 김 전 검사가 염두에 두고 있던 '징역 20년과 벌금 11억여 원'보다 축소된 구형량이었다. 이는 당시 검찰 지휘부의 '명령'에 따른 결과였다. 이미 수사 과정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수사 방해'는 도를 훨씬 넘어선 상태였다.  

"폭행치사, 여성 성추행 등을 조사하기 위해 대규모 수사팀을 꾸렸다. 경찰 인력을 지원받아 30여 명으로 구성된 조사반을 편성한 뒤에 타자기를 하나씩 들려서 복지원에 보냈다. 그리고 나서 부산지검에 허락을 받으러 갔는데 허락해주지 않았다. 대규모 인력을 투입해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인데 지휘부는 조사를 승인해주지 않았다. 당시 부산지검장은 박희태(전 국회의장)였고, 차장검사는 송종의(전 법제처장)이었다."

김 전 검사는 이를 두고 "검찰 상층부는 수사 방해조직이다"라며 "민간인 사찰 의혹 사건의 경우에도 대검 중수부장이 수사 방해의 첨병으로 뛰지 않았나?"라고 꼬집었다.

그런 속에서도 1심재판에서는 징역 10년과 벌금 6억여 원이 선고됐다. 하지만 1차 항소심에서는 벌금형이 사라진 채 '징역 4년'으로 대폭 감형되더니 2차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을, 3차 항소심에서는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렇게 항소심이 세 차례나 열린 것은 두 차례의 상고심(대법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988년 3월에 열린 1차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문제가 된 울주작업장의 기숙사 시설은 부랑인 선도와 보호를 목적으로 야간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마련된 것인 만큼 불법이 아니다"라며 "이는 사회적 비난과는 별개로 정당한 직무수행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항소심 재판부조차 인정했던 '불법감금죄'를 인정하지 않고 사건을 다시 대구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1차 상고심에는 김용준 후보자가 관여하지 않았다. 

이에 대구고등법원은 "울주작업장의 기숙사 시설은 원래 다른 곳에 있었으나 현재의 장소로 불법 이전된 것이라서 감금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거듭 '불법감금죄'를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1988년 11월에 열린 2차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불법감금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보호 목적으로 부랑인들을 울주작업장에 수용한 것은 정당한 직무수행행위이고, 야간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취침중 출입문을 잠근 것은 형사상 감금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당시 재판장이 김용준 후보자였다.

이로써 야만적인 5공 정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부산 형제복지원사건은 허약한 사법부의 정의 앞에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보호한다고 감금? 그것은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

사건이 일어난 지 26년이 지난 지금도 김 전 검사는 두 차례(1·2차 상고심)에 걸쳐 감금죄를 인정하지 않은 대법원에 분노했다. 그는 "나는 대법관을 믿지 않는다"라며 "그들에게 인권은 잠꼬대와 같은 얘기다"라고 비판했다.

"형제복지원의 철문은 공고했다. 출입문 자체가 철옹성이었다. 숙소 안에서 잠그고, 밖에서도 잠갔다. 그리고 개패듯 구타하고 죽이기도 했다. 도대체 이것이 감금죄가 아니란 말인가? 법원은 정권의 시녀였다."

김 전 검사는 "본인의 의사에 반해 시설에 감금할 수 있는 경우는 구속영장에 의한 것과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가두는 것 두 가지뿐이다"라며 "하지만 형제복지원의 수용자들은 본인 의사에 반해 시설에 붙잡혀 있었는데 왜 이것이 감금에 해당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옛날에는 '보호'라는 용어를 많이 썼다. 윤락녀나 부랑인들을 '보호'한다며 유치장이나 시설 등에 가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보호가 아니다.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하다. 후진국일수록 '보호'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감금한다. 그것은 분명히 불법행위인데도 '보호'라고 정당화한다."

그런 점에서 부산 형제복지원사건의 대법원 판결은 "불법구금을 보호라고 법적으로 인정해준 것"이었다. 감금을 통해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중대한 문제인데도 법원은 감금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전 검사는 "형제복지원사건에서 핵심적인 죄는 감금죄와 국고보조금 횡령죄다"라며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감금죄인데 우리 법원은 그것을 합법적이라고 말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형제복지원사건 판결은 사회적 정당성을 잃은 판결이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김용준 후보자가 재판장으로 있던) 2차 상고 때 대법원이 1차 상고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전원합의부에 회부하면 된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1차 상고심을 바로잡지 않았다. 이는 2차 상고심 재판부가 1차 상고심 결과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했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사실은 박인근 원장을 변론한 변호사가 대법관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전상석(2001년 별세) 전 대법관이 변호사를 개업(1986년)한 지 얼마 안 돼 박 원장의 변론을 맡은 것이다.

"원래 검찰과 1심 재판부가 내린 벌금은 6억8000만 원이었는데 1억 원으로 줄었다. 그러면 감금죄를 무죄로 만들어 준 대가로 변호사가 (수임료 등으로) 얼마나 많이 받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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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가 재판장이었던 2차 상고심 판결문. ⓒ 오마이뉴스


"신체의 자유가 무엇인지 관심을 자극한 사건"

민주화운동의 중대 시기였던 '87년'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부산 형제복지원사건으로 출발했다. 전자는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기폭제가 됐지만, 후자는 여전히 역사적 평가를 충분히 받지 못했다. 김 전 검사도 "부산 형제원복지원사건의 역사적 평가는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민주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복지가 아주 잘 돼 있어서 거리에 거지 한 명 없는 사회라고 과시하고 싶어서 부랑인들을 가두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야만적인 정권의 적나라한 치부가 드러났다. 또 사법부의 민낯과 함께 우리 사회의 수준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특히 신체의 자유가 무엇인지와 관련해 우리 사회의 관심을 자극했던 사건이었다."

끝으로 김 전 검사는 당시 조재석 울산지청장에 각별한 고마움을 나타냈다. 조 지청장은 "그분이 수사하도록 밀어주지 않았다면 수사할 수 없었다"고 김 전 검사가 술회할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지원을 해줘서 3000명을 석방시켰다. 우리의 최대 성과는 유죄판결을 받아낸 게 아니다. 유죄판결을 받으면 뭐하나? 2년 6개월만 살다 나오면 되는데…. 3000명을 석방시킨 것이 최대 성과였다."
#김용원 #부산형제복지원 #김용준 #박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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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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