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이혼 당한 젊은 임금, 재결합 기회 왔지만...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드라마 <전우치>, 세 번째 이야기

등록 2013.02.09 20:11수정 2013.02.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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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전우치>의 임금(가운데, 안용준 분). ⓒ KBS


KBS <전우치>는, 주인공 전우치가 실존인물이라는 점만 빼면 거의 다 창작의 산물이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이나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기록된 전우치의 삶과는 무관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서 그나마 실제 사실과 가까운 것은 젊은 임금의 강제 이혼에 관한 이야기다. 임금과 왕비는 보수파의 협박 속에서 억지로 이혼했다. 왕비의 아버지가 보수파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임금 부부는 이따금 보수파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곤 했다.

드라마 속의 왕은 연산군이 폐위된 뒤 19세의 나이에 신하들의 추대로 왕이 됐다.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왕은 조선 제11대 주상인 중종(재위 1506~1544년)뿐이다. 드라마 속 왕의 이름은 '이거'이고 중종의 이름은 '이역'이지만, 이 점은 중요하지 않다. 위의 조건을 구비하는 왕은 중종뿐이며, 무엇보다도 전우치가 살던 시대의 임금이 중종이었다. 

중종과 억지로 이혼한 여성은 신씨다. 신씨의 아버지인 신수근은 폐위된 연산군의 매부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중종반정(이하 '반정')의 주역들은 거사 전에 신수근에게 동참을 요청했다. 하지만 신수근은 제안을 거절했다. 이 때문에 반정 주역들은 거사 직후에 중종과 신씨의 이혼을 요구했다. 연산군을 지지한 사람의 딸을 왕비로 모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씨는 왕후에 책봉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그가 단경왕후로 추증된 것은 먼 훗날인 1739년의 일이다.

강제로 이혼당한 신씨는 남편과 소통할 길이 전혀 없었다. 반정 주역들의 세상이 됐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산 신씨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신씨는 남편이 자기를 잊어버릴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서울 인왕산 동편의 치마바위다.

전우치가 살던 시대의 임금 중종, 강제 이혼당한 신씨와 애틋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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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전우치>의 왕비(고주연 분). ⓒ KBS


인왕산은 경복궁 광화문의 왼쪽에 있는 산이다. 이 산에는 꽤 너른 바위가 있다. 신씨는 그 바위에 자기의 치마를 널어놓았다. 남편에게 자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런 사연 때문에 이 바위는 치마바위라 불리게 됐다. 이 바위의 존재는 서유영이 편찬한 민담집인 <금계필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바위가 불세출의 개혁가인 조광조의 등장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이 점은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


중종도 신씨와의 이혼이 서러웠을 것이다. 서슬 퍼런 반정 주역들에 둘러싸여 왕이 되고 또 이혼까지 당했으니, 그들에 대한 분노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인왕산 치마바위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저 바위를 보면서 자기를 흉보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그냥 마음뿐이었다. 그는 '좋은 남편' 혹은 '용감한 남편'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신씨와 재결합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기회는 이혼으로부터 9년 뒤에 찾아왔다. 신씨와 이혼한 이듬해에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제12대 인종의 어머니)와 혼인했다. 그런데 중종반정 9년 뒤인 중종 10년 3월 2일(양력 1515년 3월 16일)에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개혁파 선비 그룹인 사림파 쪽에서 신씨 복귀 운동을 벌였다.

구세력인 반정 주역들에게 불만을 품은 사림파는, 구세력이 쫓아낸 신씨를 복귀시킴으로써 그들에게 타격을 입히고자 했다. 사림파가 신씨를 잊지 않고 지지한 데는 인왕산 치마바위도 한몫했다고 봐야 한다. 

이혼 9년 만에 재결합 기회 찾아왔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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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광화문. 서쪽으로 인왕산이 보인다. ⓒ 김종성


신씨 복귀운동의 총대를 멘 사람들은 전라도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었다. 이들은 중종과 신씨의 재결합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자기들의 상소가 왕의 마음을 움직일 거로 예측한 것이다.

반정 주역들은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중종이 아무리 전처를 그리워할지라도 재결합을 시도하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신씨와 재결합하는 것은 반정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반정 덕분에 왕이 된 중종이 그런 행위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반정 주역들이 사람을 제대로 보긴 본 것이다.

그런데 구세력 내의 강경파가 실수를 범했다. 대사간(감사원장) 이행과 대사헌(검찰총장) 권민수가 문제의 장본인이었다. 박상과 김정을 그냥 둬도 되는데, 이들은 두 사람을 탄핵하고 유배지로 보내는 과잉 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가 내려진 것은 중종 10년 8월 24일(1515년 10월 1일)이었다. 이것은 얼마 안 가서 화근의 씨앗이 되고 만다. 

유배 조치가 내려지기 이틀 전인 중종 10년 8월 22일(1515년 9월 29일)에 34세의 나이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유배 조치에 분노를 품었다. 임금 부부의 재결합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귀양까지 보내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청년은 2개월 뒤인 중종 10년 11월 20일(1515년 12월 24일)에 사간원 종6품 벼슬인 정언에 임명됐다. 정언(正言)은 말 그대로 바른 말을 해야 하는 자리였다. 청년은 이틀 뒤인 11월 22일부터 진짜로 바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유배 조치를 성토하고 나선 것이다. 그가 바로, 16세기가 낳은 걸출한 개혁가인 조광조다. 

사림파의 일원인 조광조는 "정당한 언로를 막는 사헌부와 사간원 전체를 해임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사간원에 들어간 지 이틀밖에 안 되는 신참 관료가 사간원은 물론이고 사헌부 전체의 교체를 요구한 것이다.

너무나 황당하고 당돌한 요구였다. 더 놀라운 것은 중종이 그 상소를 수용했다는 점이다. 중종은 조광조를 제외한 사간원·사헌부 관료들을 전부 다 해임했다. 청년 조광조가 정국의 핵심으로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조광조의 개혁파 정권은 이렇게 중종의 신임 속에서 출범했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영향받은 사림파 관료들이 신씨 복귀운동을 벌이고 그에 대해 보수파가 역공을 펴는 상황에서 조광조 정권은 등장했다. 앞에서, 인왕산 치마바위가 조광조의 등장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신씨와의 재결합 추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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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애틋한 임금 부부. ⓒ KBS


구세력이 포진한 사간원·사헌부 관료들을 해임하고 젊은 사림파인 조광조에게 힘을 실어준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당시의 중종은 즉위 당시와 달리 비교적 강력했다. 구세력에 타격을 입힐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중종은 신씨와의 재결합을 추진하지 않았다. 장경왕후가 죽고 2년 뒤에 그는 장경왕후의 7촌 조카인 문정왕후 윤씨와 재혼했다. 반정의 정당성이 훼손될까봐 신씨와는 절대로 재결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조광조의 요구를 수용한 것은, 그 김에 반정 주역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조광조도 그에게 이용을 당한 셈이다. 

종종은 하루에도 몇 번씩 치마바위를 쳐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치마바위를 보고 눈물을 흘렸을 수는 있지만, 그는 마음이 약해지지는 않았다. '좋은 남편'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강한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인생철학이었다. <전우치> 속의 임금은 보수파의 눈을 피해 부인을 만나는 위험을 감수하지만, 실제의 중종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중종과 같은 시기의 잉글랜드 왕은 헨리 8세(재위 1509~1547년)다. 중종보다 3년 늦게 즉위하고 3년 늦게 죽은 왕이다. 헨리 8세는 왕비의 시녀와 결혼하기 위해 왕비와의 이혼을 추진했다. 로마교황청이 이혼을 불승인하자, 그는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고 성공회를 새로 설립했다.

헨리 8세는 '나쁜 남편'이었지만, '좋은 왕'이라는 평가는 받았다. 국민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고 정복지를 잘 단속했으며 왕권을 강화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저명한 역사가인 에드워드 카아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헨리 8세는 나쁜 남편이었지만 훌륭한 왕이었다"고 평가했다.

중종의 업적을 헨리 8세의 업적과 비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중종도 헨리 8세처럼 '좋은 남편'보다는 '강한 임금'이 되는 편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인왕산 치마바위보다도 왕궁의 보좌가 훨씬 더 중요했다.
#전우치 #중종 #단경왕후 신씨 #중종반정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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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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