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권력자 총리에게 이제 경쟁자는 없다

시하누크 국왕 사후 최고 권좌에 오른 훈센 캄보디아 총리

등록 2013.02.23 17:23수정 2013.02.23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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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명의 시민들이 시하누크 왕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왕궁 주변에 몰려든 가운데 캄보디아 최고 권력자 훈센 총리가 영부인 분 라니와 함께 왕궁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동남아 현대사의 풍운아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의 공식 장례식 행사가 지난 2월 4일 끝났다. 캄보디아 독립의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던 전 국왕은 지난해 10월 15일 중국 베이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89세였다. 전 국민들의 애도의 물결이 그의 서거 이후 거의 120여 일간 이어졌고, 불교식 장례절차인 다비식이 거행된 다음날, 메콩강에 그의 부 유골 일부가 뿌려지고, 나머지는 왕궁내 에메랄드사원에 안치된 가운데, 그렇게 시하누크 국왕은 역사속 인물로 사라져버렸다.

이번 국왕장례식의 최대 수혜자는 훈센총리

이번 국상기간 동안 캄보디아 최고 권력자 훈센총리는 시하모니 국왕을 대신해 상주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정치인답게 비록 시하누크 국왕의 전왕비와 아들인 시하모니국왕 앞에 나서는 행동을 극도로 자제하는 인내력을 보여줌으로서 군주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와 존경심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번 장례기간 중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사람은 훈센총리 그 자신이었다. 이번 국왕의 장례식 이벤트의 '최대수혜자'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군주제를 신봉하는 국민들에게도 은연중에 정치적 후계자는 시하모니 현 국왕이 아닌 훈센 자신임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해외언론들도 바로 그 점에 주목하고 있다.

국왕의 장례식을 앞두고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400여명의 재소자 앞에서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던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이 연설할 때도 "여러분이 자유를 얻게 된 것에 대해 캄보디아정부와 훈센총리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현재 이 나라의 이름뿐인 국왕이 처한 상황과 현재 훈센총리의 정치적 위상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시하누크 국왕은 자신의 아들 시하모니 국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지만, 죽는 날까지 중재와 협상의 달인으로, 훈센총리의 독주를 어느 정도 견제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왔었다.

시하누크 전 국왕은 생전 자신에게는 자식이 셋이 있다는 표현을 자주 애용하곤 했다. 큰 아들은 실제 혈육인 라나리드 왕자, 둘째는 훈센총리, 셋째는 삼랑시 전 야당총재를 가르킨다. (실제 나이순과는 상관없이). 이들 세 사람이 정치적으로 갈등을 겪을 때마다 시하누크 국왕은 항상 그들 사이 중재와 조정에 나서 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약 15년간 캄보디아를 평화와 안녕의 시대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 때 황태자의 대접을 받던 라나리드 왕자는 1997년 7월 촉발된 훈센측 군대와의 수여일간의 무력충돌 끝에 결국 패배했고, 그후 왕립무용수와의 사이에 불륜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이 실제 사실로 드러나 현재는 정치생명이 거의 끊어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국왕으로부터 훈센총리에 이어 셋째 아들로 인정받았던 최대 야당 삼랑시 총재 역시 베트남 국경임시표석 제거 사건 등 크고 작은 정치적 갈등 속에 결국 훈센에게 미움을 사 궐석재판으로 10년형을 언도받은 상태에서 현재 프랑스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떠돌고 있다.


최근 삼랑시는 국왕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훈센총리에 직접 서한을 보냈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그의 이름을 따 만든 삼랑시당(SRP)은 최근 '인권당'이라 불리는 다른 군소야당과 합당, 결국 최대야당지도자로서, 그의 반정부 투쟁 이미지는 많이 희석되고 말았다.

영구집권을 위한 준비 작업은 이미 시작됐다

이제 캄보디아에서는 훈센총리, 그에게 대항할 만한 정치적 라이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2003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덕에 전체 국회 의석 123석 중 야당들이 차지하는 총 의석수는 불과 33석에 불과하다. 70%가 넘는 의석을 여당인 인민당(CPP)이 쥐고 있다. 연립정부의 한축을 차지하는 왕당파당인 푼신펙당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할 정도이며, 이 당의 대표적인 사무총장인 닉 분 차이(Nhek Bun Chhay) 같은 인물은 소속만 왕당파로 분류될 뿐, 실제로는 훈센의 앞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최근 현지신문에 훈센총리의 막내아들과 큰 사위인 디 위찌아(Dy Vichea)가 이번 7월에 치러질 총선에서 국회위원직에 출마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자신의 가장 큰 정치적 라이벌이 사라짐에 따라 절대 독재 권력을 이어나가기 위한 정지작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셈이다.

속안 부총리와 실제적인 권력 2인자인 사켕 내무부장관의 아들들도 총선을 준비중이다. 그 외에도 최소 4~5명 이상의 친 훈센 성향의 고위정치인들 자식들이 총선에 출마할 것으로 알려졌다. 초창기부터 훈센정부를 함께 이끌었던 정치인들이 대부분 나이 7~80 이상이 된 상황인 만큼 이때를 놓치지 않고, 측근들의 자식들을 정치무대에 올려, 대를 이어 충성할 심복들을 기르겠다는 훈센총리의 계산이 숨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훈센, 그의 후계자는 과연 누구?

훈센총리의 장남 훈 마넷(Hun Manet) 육군중장 훈센 총리의 후계자 중 한 명인 큰 아들 훈 마넷 최근 모습. 미국 육사인 웨스트 포인트에서 공부한 그는 미국식 합리주의가 배인 인물로 점잖고 말을 아끼는 신중한 인물이다. 아버지와는 성향이나 성격이 달라 부자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평도 있다.


현재 훈센총리에겐 현재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있다. 입양한 딸이 하나 있었는데, 동성연애 등 사회적 문제를 자주 일으켜 파양된 바 있다.

이번 7월 총선 국회의원직에 출마할 예정인 막내아들인 훈 마니(Hun Many.30세)은 현재 총리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최근에는 '조국의 대의를 위한 젊은이들'(Youth in course of Motherland)라는 현 정부 지지를 위한 인민당 사조직을 결성했다. 그는 또한 2만여 명의 젊은이들을 올림픽스타디움에 모아 대규모집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의 조직은 7월 총선을 앞둔 아버지 훈센을 돕기 위한 친위조직으로 활동할 공산이 매우 크다. 그는 미국 국방 대학에서 연수를 받은 바 있으며, 두 개의 석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자식들 중 훈센이 가장 총애하는 아들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현지신문보도에 따르면 막내아들 훈 마니와 사위는 캄퐁 스프 주와 스와이 리엥 주에서 각각 출마할 예정이라고 한다.

함께 출마할 예정인 큰 사위 디 위찌아는 훈센총리의 큰 딸인 훈 마나(Hun Mana)의 남편으로 부정부패와 마약거래 등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가, 의문의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2008년 사망한 캄보디아 경찰청장 혹 렁디(Hok Lundy)의 아들이다. 훈센의 형인 훈 넹 캄퐁참 주지사의 딸과 결혼했으나 그 후 이혼, 훈 마나와 재혼을 했다.

훈센의 큰 아들 훈 마넷(Hun Manet.35세)은 미국 육사 웨스트 포인트 출신이다. 매년 10명의 외국인 특별전형에 정부 추천을 받아 입학했다. 졸업 후엔 영국의 브리스톨 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다. 현재 육군중장이며 왕립 캄보디아 육국 부사령관, 총리직할 경호부대 부사령관, 국방부 대테러국장 등을 맡고 있다. 야전 게릴라군 출신인 아버지와 달리 정규교육을 받은 인물로 서구적 합리주의가 몸에 밴 인물이다.

집안의 장남이지만, 아버지 훈센총리와 코드(?)가 맞지 않아 관계가 썩 좋은 편은 아니라는 소문도 있다. 2년 전 프레아 비히어 국경지역을 둘러싼 태국과의 무력분쟁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작전사령관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으며, 최근에는 아버지 훈센을 대신 아세안정상회의 등 정치무대에도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가난한 농촌지역 기부사업행사에도 얼굴을 내밀어, TV에도 자주 나오는 편이다. 그의 여동생 훈마나(Hun Mana.33세)가 사주로 있는 바이욘TV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은 더욱 두드러진다.

둘째 아들 훈 마닛(Hun Manith.31세)은 현재, 육군대령으로 국방부소속 정보부 부국장직과 국가토지분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다가올 7월 총선의 최대 이슈 중에 하나가 된 국가 내 사유지 토지분쟁과 보상문제를 조정하는 데 앞장 서, 야당의 공세를 막고, 사회적 약자와 반대세력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아버지 훈센의 7월 총선을 측면지원하고 있다.

이렇듯, 불과 수년 사이에 훈센총리의 세 아들 모두 정부 핵심요직을 전부 차지해버렸다.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해외정치평론가들은 훈센이 만약 훗날 자신의 권력을 이양한다면 이 세 아들 중에 한명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있다. 그중에서도 훈센총리가 가장 선호하는 막내아들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친다. 그 이유는 이번 7월 총선에서 장자인 훈 마넷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장자인 양녕대군을 배제하고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태종 이방원처럼 과거 조선의 역사가 이 나라에서 재현될 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정적에겐 언제나 냉혹한 정치인

60대 초반의 팔팔한 기운이 넘치는 지금의 훈센총리는 2인자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속안 부총리 및 관방부 장관은 공식적인 2인자로 얼굴마담일 뿐이다. 인민당(CPP) 당수로 서열 1위이자 자신의 정치적인 후견인 역할을 해온 찌아 심 (Chea Sim)상원의장, 역시 훈센의 감시와 견제에서 벗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찌어 심 상원의원장의 최측근들이 상원위원장의 직인과 싸인을 날조, 뇌물수뢰 등 부정부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명을 씌어 모조리 감옥에 보내버렸다. 자신의 최측근들이나 최근 종신형을 선고받은 모엑 다라 마약퇴치국장처럼 같은 계파내 사람들이 감옥에 줄줄이 엮여 들어갔지만, 정작 찌아 심 상원위원장은 이에 대한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훈센총리는 60여년의 평생을 살아오며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세계의 비정함을 몸소 체험했고, 스스로도 그런 일들을 수 없이 많이 저질렀다. 더욱이, 그는 70년대 초 인도네시아 수카르노대통령이 측근이자 2인자였던 수하르토에게 쫒겨 낸 선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비록 제대로 된 정규교육은 많이 받지 못한 그이지만, 그의 정치적인 촉각과 술수는 감히 따라올 자가 없다.

종신형 총리를 꿈꾸는 장기 집권 독재자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재미있는 농담을 잘 하는 편이었다고 그의 어릴 적 고향친구들은 회고한다. 그래서 고향인 캄폼참 주 작은 시골마을에서도 꽤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런 그의 천부적인 입심(?)은 전체 인구의 약 8~90%가 사는 캄보디아 농촌지역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대중연설은 기본이 2시간이다. 현지 9개 주요 방송 채널들은 종종 훈센총리의 지방연설을 생중계하며 밤 늦은 시간에 앞 다투어 녹화방송까지 한다. 마지못해 뒷자리에 배석한 장관들을 비롯한 정치수뇌부는 훈센이 던지는 농담에 크게 웃거나 박수를 치며 권력에 아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입담이 최고 정점에 다다른 적이 있다, 작년 국회에서 무려 5시간 20분이나 연설을 했다. 가히 기네스북감이다. 그 날 연설을 두고 "사실 더 할 수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배가 고플 것 같아 연설을 중단했다" 고 말해 아연질색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이 연설내용을 DVD와 자료로 만들어 공무원들이 숙지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프놈펜 시내 러시안 대로에 위치한 오늘날 영문 공식명칭으로 'The Peace Palace(평화의 궁전)'라고 불리는 왕궁의 위엄에 버금가는 화려한 전용 공관에서 집무를 보는 그이지만, 그의 서민적인 연설은 가난한 농촌 지역에서는 언제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피폐한 농촌경제이며, 대부분 농민들의 월 소득이 고작 1백 여 불도 채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지 몰표가 지방선거 때 마다 농촌지역에서 주로 나온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훈센은 1985년 베트남 괴뢰정권하에서 총리가 된 후 벌써 28년째 장기 집권중이다. 하지만 1952년 8월생으로 우리나라 나이로 62세, 건강상태 또한 양호하기 때문에 최소 10년 이상 정권을 더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반영하듯 그는 한 지방에서 가진 연설에서 '종신형 총리'에 대해 슬쩍 언급한 적도 있다.

시하누크 국왕의 서거를 애도하는 연설을 하던 중 "만약 자신이 죽거나 유고상태가 발생하면, 캄보디아에는 상상하기 힘든 큰 혼란과 재앙이 다가올 수도 있다"는 엄포까지 놓아가면서 말이다.

누구나 한번 맛들인 권력의 맛은 쉽게 뿌리치기 힘들기 마련이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순수히 정권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 동안의 역사로 볼 때 후임자들이 은퇴한 그들의 정치선배들을 그대로 놓아두는 전례는 거의 없었다.

'과거청산'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어떤 식으로든 전임자를 탄압하거나, 전정권이 저지른 잘못을 따져드는 게 후진국 정치판의 '속성'이라는 사실 역시, 프로 정치인 훈센은 너무나 잘 간파하고 있다.

훈센 총리와 시하누크 전 국왕의 오랜 애증 관계

과거 훈센은 시하누크 국왕과는 애정과 증오가 교차하는 관계였다. 그는 어린 시절 그는 시하누크 국왕을 정말로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학교도 제대로 못 마친 어린 훈센이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크메르루즈 게릴라 군대에 가입하고 총대를 맨 절대 이유가 크메르루즈 가입을 유도하는 시하누크국왕의 단파 라디오방송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그 두 사람은 80년대는 상호 대립과 갈등의 양상 속에 10여년을 보냈다. 가까스로 1991년 10월 파리평화협정을 거쳐 협상과 타협을 통해 캄보디아의 안녕과 평화를 도모하는 가운데 화해했다. 자신의 군사적, 정치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베트남이 1989년 말 철수하고,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후원자 역할을 하던 러시아마저 혼란스런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좁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훈센총리는 다시 시하누크국왕과 손을 잡는다.

이 협정은 물론 외형상 이해관계가 상충, 대립하던 4개정파간의 정치적 타협물로 캄보디아를 평화시대로 이끈,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부차적으로는 시하누크 국왕과 훈센총리 두 사람이 속내는 숨긴 채 서로에게 가졌던 표면적 앙금과 갈등 만큼은 확실히 털어내는 중요한 이벤트성 사건이기도 했다.

1993년 입헌군주제 국왕으로 복귀하면서도 시하누크 국왕은 자신의 화려한 정치적 재기를 꿈꾸었다. 93년 유엔과도정부체제(UNTAC)하에서 열린 총선에서 큰아들 라나리드왕자를 내세워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면서 어느 정도 정치적 교두보를 확보했고, 나름의 강한 자신감속에 자신의 전성기였던 60년대 대중사회주의공동체(Sangkum Reastr Niyum)시대로 다시 되돌릴 꿈을 꾸었다.

하지만, 가만히 이를 지켜보고만 있는 훈센이 아니었다. 국회의원 2/3이상 의석확보를 해야 단독정부수립이 가능한 헙법을 적절히 활용, 밀고 당기기 끝에 왕당파와의 연정을 이끌어냄으로서, 리나리드 왕자와 함께 권력을 양분하게 된다. 역대 유례가 없는 제2총리라는 타이틀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시하누크 국왕은 훈센총리와 한판 대신 타협을 선택했다. 이 시기 그는 정말로 캄보디아의 평화를 마음속 깊이 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타협과 화해는 몇 년 지나자 않아 훈센총리의 배신으로 또 한번의 최대위기를 맞게 된다. 1997년 훈센군대의 공격으로 시작된 무력충돌로 왕당파인 푼신펙당(Funcinfec party)이 괴멸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복원이 힘들 정도로 다시 깨지고 말았다.

크메르루즈 대위출신 훈센을 너무 얕본 것이 패착이었다. 아버지 말을 종종 거역하고, 별로 미덥지 못한 큰아들 라나리드 왕자의 끊임없는 실정과 더불어 훈센총리의 권력이 눈에 띄게 강화되는 모습을 목격하며, 자신은 더 이상 과거 자신의 전성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을 것으로 보인다.

시하누크 국왕은 결국 스스로에게 정치인으로서 사망진단을 내렸다. 2004년 10월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인 큰 아들 라나리드 왕자를 배제하고, 지금의 왕비인 모니크 왕비의 소생인 현 시하모니 국왕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동시에, 공식적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마지막 최대 업적으로 왕위계승 1위였던 라나리드 왕자가 아닌 시하모니 국왕에게 왕위를 물려줬던 사건을 꼽는 정치평론가들도 많다. 정치권력에 맛을 들인 라나리드가 왕위에 오를 경우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한 훈센과의 갈등은 불 보듯 뻔 했고, 결국 40여년 만에 되찾은 평화와 안정을 다시 깨질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에 내린 중대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무소불위의 캄보디아 권력자 훈센

훈센 입장에서도 현 시하모니 국왕은 입맛대로 다루기 쉬운 인물이다. 체코 프라하에서 어린 시절부터 발레를 전공, 프랑스에서 발레교습소를 운영하기 까지 했던 인물이다, 정치경력이고 해보았자, 파리 주재 유네스코대사로 근무한 경력이 전부인 시하모니 국왕은 훈센정부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입헌군주제 국가 왕의 모습이다.

현 시하모니 국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외신기자의 표현처럼 왕궁에 유폐되어 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정치와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까지 훈센에게 보고되고 있다는 외신의 논평기사도 있다. 왕실 살림을 맡고 있는 궁내청 대신 겸 부총리인 꽁 삼올(Kong Sam Ol) 역시 훈센의 측근중 한 명으로 국왕을 감시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해외출장마저 마음대로 못할 만큼 불행한 왕이다.

아직 미혼인 그는 과거 아버지의 정치행적을 잘 알고 있고, 절대 권력의 화려함 뒤에 숨어 있는 비열함과 잔인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또한, 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천만한 일인지도 잘 알고 있다. 훈센총리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정치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죽는 날까지 캄보디아의 상징적인 국왕으로 남기를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던 간에 훈센총리에게는 더 이상 표면적으로 드러난 정치적인 라이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부의 적'이라고 간주되는 자들에 대한 숙청 역시 무자비하고 인정사정 볼 것이 없다. 자신의 사돈이기도 했던 훅 렁디 경찰총장도 의문의 헬기콥터 추락사고로 죽었다. (이 부분의 진실여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다소 논란이 있지만...). 내부의 반대세력이나 음모를 꿈꾸는 자들은 마약사범이나 부정부패 협의 등으로 억지로 구속 수감된 경우도 손으로 꼽기 힘들 만큼 많다.

인권운동가들에 대한 탄압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근 비하이브 라디오 방송국 소유주이자 인권 운동가인 몸 소난도씨(71세)는 사법부로부터 20년형을 언도받았다. 그의 무죄를 주장하는 해외 인권단체들의 강력한 항의와 규탄성명에도 그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발표한 캄보디아 2012년 인권 순위는 157위이다. 사법부 역시 정부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훈센의 말 한마디가 곧 이 나라의 법이다.

그에겐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 중국이 있다

작년 아세안 정상회담 당시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의 면담도 냉소적인 분위기가 오가는 가운데 그야말로 썰렁하게 끝났다. 오바마는 훈센의 '아킬레스건'인 인권문제를 건드렸지만, 훈센은 별로 귀담아 듣지 않는 눈치였다. 캄보디아에 오기 전 미얀마에서 최고의 융숭한 국빈대접을 받은 당대 세계초강대국 지도자이지만, 미국대통령으로서는 처음 방문한 프놈펜에서는 전혀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훈센 역시 어린 학생들을 동원시켜 길가에서 성조기를 흔들게 만드는 이벤트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제스쳐는 그 동안의 국제적 관행상, 별 볼일 없는 약소국 지도자가 세계 초강대국 지도자에게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나 모습은 아니었다. 훈센총리가 이렇게 세게 나온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그의 뒤엔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15억 인구를 자랑하는 신흥 초강국 중국이다.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는 세계은행(World Bank)이 지난 몇 년째 불거진 프놈펜 시내 벙칵호수 강제철거와 각종 인권탄압문제와 맞물려 차관 대출에 제동을 걸은 적이 있다.

하지만, 중국은 캄보디아를 지원하는데 어떠한 주저함이나 거리낌이 없다. 차관제공시 인권 문제같은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조차 없다. 차관은 원하는 만큼 제공하겠다는 메시지도 수시로 전해주고 있다. 훈센총리 입장에선 이만큼 고마운 친구도 없다. (하기야, 중국 역시 자국 내 인권문제로 골치 아픈 상황에서 남의 나라 인권에 대해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 된다.)

최근 중국이 인도차이나반도 주도권 확보에 힘을 쏟고 있고, 그중에서는 캄보디아를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로 삼으려 하고 있다. 최근 쁘레하 비히어주로부터 꼬꽁주까지 국토를 종단하는 산업철도건설과 댐, 발전소 건설 등 굵직한 국가 기간산업급 대형 프로젝트 대부분이 중국과의 사이에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중국 입장에서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미국을 견제하는 한편, 정치적 헤게머니를 잡기 위해서 캄보디아가 최상의 파트너임을 인정하는 추세다.

인도차이나 여러 국가중 태국은 경제력이나 여러 면에서 이미 커질 만큼 커 버린 상태로, 여전히 미국의 영향력이 큰 국가이고, 베트남은 같은 공산계 국가임에도 과거 중월전쟁을 치른 바 있을 만큼 역사적으로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오랫동안 중국 영향권에 있던 미얀마에 최근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가 잔뜩 눈독을 들이는 판국인 만큼,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중국입장에선 고분 고분 말 잘 듣는 훈센이 이끄는 캄보디아 만큼은 내 충복으로 만들고 싶은 게 실제 속마음이다.

최근 남중국해 영유권과 관련하여, 국제적 분쟁이 일어났을 때도 훈센은 같은 아세아 역내권의 필리핀을 지지하는 대신 중국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지난해 프놈펜에서 열린 제 18차 아세안 정상회의 때에는 의장국임을 내세워 이 문제에 대해 논의조차 못하게 중단시키려는 시도마저 보임으로서, 중국의 가려운데 까지 앞장서서 긁어주었다. 중국입장에서 이런 훈센총리가 정말 예뻐 죽을 정도다.

이렇듯, 중국과의 밀월관계가 앞으로도 더욱 공고해질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2012년도 교역상대국 1위로 떠오른 우리나라 역시 장기적으로는 점차 중국에 밀릴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대외차관협상창구를 가급적 중국으로 '일원화'하라는 훈센총리의 내부지침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날 만큼 중국의 투자와 교역규모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 지역에 투자를 늘려온 우리나라와 일본 등이 앞으로는 중국에 밀릴 수 밖에 없다는 다소 비관적인 전문가들의 전망과도 귀결된다.

반면, 과거 '절친'이었던 북한과의 관계는 외교적인 측면에서 예상대로 소원해질 공산이 크다. 북한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했고, 김일성이 지어준 '장수원'이란 으리으리한 별장도 있을 만큼 캄보디아 왕실은 수십 여 년 동안 북한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우리나라가 1997년이 돼서야 재수교를 할 만큼 관계복원이 늦어졌던 이유 중에 사실은 시하누크 국왕과 하오 남홍(Hor Nam Hong) 외무장관 같은 친북성향 정치인들의 반대가 거셌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들려 온다.

하지만, 친북한파 시하누크 국왕의 서거를 전환점으로 북한과 캄보디아가 오래 동안 지속해온 끈끈했던 관계의 끈은 끊어지고 말았다. 양국 우호증진의 한 축을 담당했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지 이미 오래고, 시하누크 국왕을 '삼촌'이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따르던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반세기에 걸쳐 굳건하게 이어 온 양국 우호관계의 틀은 그렇게 허무하게 깨져 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근 달라진 북한과 캄보디아의 관계를 보여주는 작은 에피소드도 있다. 국왕의 다비식에 훈센정부에서는 우리정부에 특사를 요청, 우리측에서는 하금열 대통령실장이 참석했지만, 영원한 우방국이라던 북한에서는 정작 홍기철 북한대사가 특사 대신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를 두고 한국 신문들이 앞 다투어 달라진 한국의 위상까지 거론하며 이 사건을 호들갑스럽게 다룬 바 있다.

하지만, 특별한 정치적 갈등이나 이슈가 없는 상태에서 국제사회에서 국가와 국가간 관계의 틀이라는 것이 마치 무 자르듯, 그렇게 쉽게 깨질 수도 변할 수도 없는 법이다. 다만, 국익이라는 미명아래 실리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국제사회의 냉혹한 메카니즘속에서는 '혈맹'이나 '우방'이라는 단어자체는 양국의 이해와 실리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한같 무용지물인 만큼, 북한과의 관계는 지금상황으로서는 더 나아질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대 혁명을 꿈꾸는가?

아무튼, 지금까지 말해왔던 것처럼 시하누크 국왕 서거 후 훈센총리에게 정치적 라이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부의 적은 항상 뒤에서 칼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내부의 적은 자신에게 있을 수도 있다. '오만'과 '독선'이 바로 그것이다. 스스로 든 칼에 자신이 찔릴 수도 있다. 오랜 인류의 역사가 이미 답을 말해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는 매우 추상적인 단어다.

아직 캄보디아에서는 '쟈스민 혁명' 같은 민주화운동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40년 내전에 지칠 대로 지친 국민들이다. 크메르루즈 붕괴 후 찾아온 20년간의 평화와 안녕의 달콤한 맛을 아직까지는 다른 어떤 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게 이 나라 국민들의 솔직한 마음이다.

더욱이 아직 캄보디아는 사회개혁을 이끌만한 중산층이라고 불릴 만한 계층이 극히 적다. 오직 권력에 등에 업은 극도로 부자인 자들과 소외받고 사는 극도로 가난한 자들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다 할 민주화의 수레바퀴를 이끌만한 정치적 이슈도 미약하고 세력 또한 작다.

독재는 강화되고 사회정의구현과 민주주의는 갈수록 퇴보하고 있지만, 이와 반대로 최근 년 7~8%대의 경제성장률에 힘입어 캄보디아 국가 경제는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피폐한 농촌과 달리 프놈펜 시내의 스카이라인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전 국민의 1/4만이 전기 공급을 받을 정도로 열악한 사회적 인프라가 주요 문제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조만간 시추될 예정인 석유가 이 나라의 경제수준을 단기간 두 세 단계 이상 끌어올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에 따라 900불도 채 되지 않는 국민소득 역시 10년 이내에 2배 이상 오를 전망이다. 이는 중산층을 두껍게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민주화의 열망과 의식을 가진 지식층의 증가를 가져올 확률이 높다. 결국 이 나라 역시 언젠가 대부분의 중진국들의 겪었던 민주화바람의 통과의례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그 시기가 10년 후가 될지 아니면 20년 후가 될지는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힘들다.

하지만 도시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민주화에 대한 욕구가 갈수록 높아지고, 국민들의 의식수준 또한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훈센정권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지는 캄보디아의 경제성장 속도에 달려 있다고 본다.

궤도 끝 나락을 향해 달리는 고속기차

훈센총리는 전 세계 얼마 남지 않은 최장기 집권 통치자라는 타이틀을 갖은 채 이미 자신과 숙명을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초고속 열차에 몸을 실었다, 30년 이상 전세계 장기집권 독재자 중에 말로가 좋았던 사례는 손을 꼽을 정도다.

지금, 캄보디아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정치, 사회, 경제 모든 상황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국민들의 의식수준도 날로 높아지고 있고 내전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는 전쟁없는 평화시대에 살고 있는 사실에만 만족하며 살아온 기성세대에 반발하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우렁찬 기적을 울리며 시속 500킬로 이상 무한 질주하는 캄보디아발 기차는 이제 멈출 수가 없다. 온갖 정치적 풍파를 다 겪고 살아 온 그이기 때문에 그 자신도 이미 중도에 내릴 수 없는 기차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62세의 비교적 젊고 영리한 두뇌를 가진 총리 훈센은 자신이 탄 기차가 그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아무런 사고 없이 영원히 멈추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13년 2월 현재 캄보디아 발 '훈센기차'는 그렇게 언젠간 끝날지 모를 궤도 끝 나락을 향해 무한정 달려가고 있다.
#캄보디아 #박정연 #훈센총리 #프놈펜 #시하누크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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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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