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수첩> 표지
범우
시중에 나와 있는 유머와 관련된 책들은 표지에 소개된 문구만 요란할 뿐 실제 들여다보면 별 소득이 없는 경우가 많다. 마치 그 책 한 권만 읽으면 어디 가서나 남을 웃길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유혹하지만 대개의 경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를 한데 묶어서 낸 종이뭉치에 불과하다. 이런 함량미달의 유머집이 판치는 출판시장에서 삶의 신산한 체험에서 우러난 진국의 유머를 담은 책을 만나는 일은 행운에 속하고, 그런 만남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산민(山民)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수첩>은 정말 제대로 된 유머집을 찾기 어려운 한국에서 매우 드물게 나온 훌륭한 작품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독재정권 치하에서 무수히 많은 양심수를 변호하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권 변호사다. 두 번 옥고를 치른 적이 있는데 그중 한 번은,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조연급으로 스카우트"된 것이라 한다. 이 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저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을 지속해왔고, 국민의 정부에서는 감사원장으로 직무를 수행한 바도 있다.
한국에서는 저명한 사회적 인사가 유머집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신 웃음거리가 되는 경우는 아주 많다. 내곡동으로 가려다 논현동으로 돌아간 MB라든가 보온병을 들고 포탄이라고 했던 안상수 같은 인물은 본인이 유머를 구사한다기보다는 유머의 대상이 되는 경우라 하겠다. 이에 비해서 한승헌 변호사가 구사하는 유머는 매우 격조 있으면서도 현실의 핵심을 짚는 것이어서 '유머의 정석'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유머수첩>에 나온 몇 가지 유머를 소개해본다. 70대 중반의 저자가 어느 자리에 초청받아 특강을 해야 하는데 감기 때문에 목소리가 이상하자 이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자 한 농담이 이렇다.
"제 감기는 주한미군입니다. 한번 들어오더니 나갈 줄을 모르니까요." (줄임) "그렇다고 저를 무슨 반미나 미군철수론자로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차를 주문할 때에도 반드시 아메리카노만 시킵니다." ― '주한미군과 아메리카노'(28쪽)2006년 가을, 저자는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을 간행하고, 윤형두 범우사 사장과 함께 지금은 건물과 터만 남은 서울구치소(옛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한다. 방송사에서 출간 기념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그곳을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양심수가 많이 투옥되었던 곳이니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옛날의 그 서울구치소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저자는 매표소 직원에게 이런 농담을 던진다.
"아니, 구치소에서 입장료를 받아요? 옛날에는 무료입장에다가 한번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의식주를 국가가 보장해 주었는데 잠깐 들여다보고 나올 사람들에게 돈을 받다니, 세상 참 나빠졌구먼." ― '구치소 입장료'(75쪽) 저자의 신산했던 투옥 체험이 서려 있는 곳이라 이 농담은 뼈 있는 희극적 아이러니를 담고 있어 최상급의 유머라고 하겠다.
"구치소에서 입장료를 받아? 옛날엔 의식주까지 보장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인 있는 한승헌 변호사는 이 책의 한 장을 'DJ의 추억'이라 제목 짓고 그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김 전 대통령의 농담은 엄청난 고난의 시기를 넘기고 나온 것이어서 이 책에서도 백미에 해당한다.
1985년 2월 8일, 전두환 정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은 귀국을 강행한다. 이때 미국의 국회의원, 고위관리, 학자, 인권운동가 등으로 구성된 22명의 외국인이 동승 입국한다. 아마도 김 전 대통령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김 전 대통령의 입국이 못마땅한 전두환 정권은 그의 귀국을 비난하며 "외국인과 함께 온 것은 사대주의적 망발"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참으로 김 전 대통령다운 재치였다.
"내가 외국 사람들을 따라 다녔으면 몰라도, 외국인들이 나를 따라왔는데 왜 내가 사대주의자란 말인가?" ― '사대주의 논쟁'(192쪽)김 전 대통령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는 삶을 억누르는 죽음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최고급의 유머를 선사한다. 1980년 9월 17일 오전에 열린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선고 공판에서 김 전 대통령은 예상대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 "살벌한 판" 속에서 김 전 대통령은 아주 기막힌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런 회고담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판결 선고 때 재판장의 입이 '사' 하면서 옆으로 째지면 '사형'이고, '무' 하면서 앞으로 나오면 '무기'다. 그러니까 재판장 입이 앞으로 나오기를 바랐는데, 반대로 옆으로 찢어져서 '사'자가 나오는 바람에 '사형'이 떨어지게 되었다." ― '재판장 입이 앞으로 나오면'(194쪽)이 책의 5장은 '대화문화의 새로운 모색'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는데 이는 한 대학의 지성학 강좌의 강의 내용을 손질한 것인데,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매우 뛰어난 '유머론'이다. 진정으로 유머의 달인이 되고 싶다면 이 책부터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또 남는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이 책은 '한승헌 변호사의 산민객담 3'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렇다.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집은 단권이 아니라 현재까지 세 권의 시리즈로 나와 있다. <유머산책>과 <유머기행>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한승헌 변호사의 산민객담' 1권과 2권도 추천한다. 그 책들을 보면 엄혹하던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이 유머 감각도 꽤나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부기하자면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 수필은 범우사에서 발행하는 독서 잡지 <책과 인생>의 인기 연재물이었다. 행복을 바라는 독자로서 이 연재가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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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씁니다. 문피아에 '천재 아기는 전생을 다 기억함'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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