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실천과 실천이 이어져 새로운 사회가 열린다

[서평] <크랙 캐피탈리즘>, 남미 좌파의 경험과 이론에서 미래 읽기

등록 2013.03.03 09:50수정 2013.03.03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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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 캐피탈리즘 - 균열 혁명의 멜로디 멕시코 뿌에블라 자유대학 교수인 존 홀러웨이가 쓰고,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가 번역 ( 갈무리 출판사) ⓒ 김재형

나는 삶  자체를 저항으로 구성하고 싶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부엌에서 세상을 바꾼다>라는 책이 있었다.

일본 생협 운동을 소개한 책인데 20년도 더 된 책인데 그때부터 한 살림과 같은 생활 협동 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농민 운동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했다.
우리쌀을 지키기 위해 거리 시위를 하면서 잠깐 쉬는 시간에 주위에 있는 대기업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서 마시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던 적이 많았다.

내가 오늘 주장하는 거대하고 원칙적인 이야기를 삶에 까지 이어가지 못하면 오늘 나의 주장을 나 스스로 무너 뜨린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늘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크랙 케피탈리즘>은 원칙적인 주장과 개인의 삶 사이에서 작은 실처럼 이어진 미세한 균열(크랙)의 의미를 찾아간다.

균열이라는 개념으로 자본주의에 저항한다고 생각하고 그 실천에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면 지금 우리가 직면한 여러 가지 다양한 판단과 실천을 조금 더 너그러운 눈으로 볼 수 있다.

강정마을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강정마을 평화 활동가들에 대한 법원의 벌금 폭탄은 거의 잔인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법원 자체가 폭력 집단이라는 느낌이다.


앞으로도 자본, 법원, 해군으로 이어지는 폭력 구조는 더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는 강정마을회와 여러 단체들의 다양한 모금 활동으로 벌금을 내고 있었지만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벌금을 못낼 상황이 오게될거고, 그러면 정문을 막아서는 건 쉽지 않다. 이럴 때 어떻게 할까?

<크랙 케피탈리즘>은 이런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을 준다. 일단 순수성에 대한 도그마적인 접근을 피하는 게 좋다. 운동가들이 빠지는 함정 중의 하나가 내가 하는 활동이 전부이고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벌금을 모금하는 것과 벌금을 안내는 것도 운동이다. 당연히 저항의 강도는 약해지고 공사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우리가 하는 운동이 공사 속도를 줄이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큰 맥락을 놓치지 않고 저항의 흐름을 이어갈 수만 있으면 우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신용목 시인이 <한겨레> 신문에 '강정에 평화도서관을 짓자'는 제안은 생각할 것이 많은 글이다.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모인 '작가행동1219'가 제주 '강정마을 평화도서관 만들기' 사업을 제안한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해군기지 건설에 맞서 문학으로 강정을 무장시키겠다는 것. 그 방법 또한 부수고 세우는 식의 개발 논리와 달리, 오래된 가옥을 수리하고 돌담을 이용하여 마을 전체를 도서관으로 만들겠다는 것. 그것은 한반도와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얼룩진 세계의 평화가 체험되고 기획되는 곳이 제주였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된 것이다. 문학이야말로 양보할 수 없는 평화의 바리케이드이며, 도서관이야말로 새로운 희망의 기지이기 때문이다. (한겨레 2012. 11. 25 강정에 희망의 기지 도서관을 짓자' 중에서)

우린 그동안 여러 저항 현장에서 저항하고 다치고, 손해배상 소송당하고, 벌금 모금하고, 구속자 석방 요구하는 방식에 주로 의존한 점이 있다. 이런 흐름과 함께 이어지는 새로운 흐름은 쌍용차 투쟁에 대해 '쌍용차 퇴사노동자를 위한 심리치료센터 와락', 콜트 콜텍 노동자 투쟁에 이어지는 '예술가 행동', 용산참사 운동에 이어지는 구속자 김재호님이 아빠의 구속으로 우울증을 앓아 말을 잃어버린 딸을 위해 그린 만화편지 '꽃피는 용산' 등은 투쟁의 큰 방향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투쟁의 깊이와 폭을 넓혀준다. 작은 균열과 균열이 이어져 결국 큰 구멍을 뚫어 버리는 힘이다.

그리고 이런 운동 대부분이 경험하는 것은 저항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인세를 받아 생활을 하기도 하고, 중요한 재단의 공모 지원금을 받기도 한다. 돈을 벌면서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사람은 순수함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모든 성공한 운동가들은 순수성을 교조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둘기처럼 순결했지만 뱀처럼 지혜로웠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어떤 일을 겪을 지 알고 있었고, 순수함과 지혜를 동시에 가질 것을 권했다.)

자본은 구조적으로 분리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담으로 나누고 결정짓고 위계를 설정하고 학벌, 지역, 계급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분리한다. 이렇게 분리한 담장을 넘어서 저항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구조적인 노력을 통해 흐름을 크게 바꾸는 것이 효율이 높을 것 같지만 실제 해보면 개인의 작은 노력없이 흐름이 바뀌지는 않는다. 효율에서도 개인의 작은 실천에서 시작되는 균열이 훨씬 경제적이다.

나의 경우는 아이들의 교육을 공교육 학교 밖에서 하는 걸 꾸준히 실험하고 있다. 집에서 공부하거나, 도서관을 이용하거나, 다양한 관계와 관계를 맺는 과정 자체가 공부였다. 이런 노력을 하다보면 마음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고, 그럴 경우 제법 큰 구멍을 하나 내기도 한다. 현재 하고 있는 선애학교는 정말 꿈처럼 꾸어왔던 교육적 실험 대부분을 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작은 균열과 균열이 이어져 빈 공간을 만들어 내었고, 그 공간에서 새로운 가치가 현실이 되고 있다. 아이들은 협력과 우정을 익히고, 동아시아 공간 속에서 역사와 문화를 경험하며, 협력 학습을 통해 탁월한 지적 성취를 올리고 있다. 강력한 반자본주의 활동이지만 이 일을 하는 돈은 이 일 속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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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애학교 학생들과 지구 여행 중 오서산 정상에서 공교육에 저항하는 작은 균열과 균열이 모여 하나의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 김재형


사회적 변화는 아무리 활동가들의 활동이 중요해 보이고 언론의 조명을 받더라도 활동가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변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활동이 간신히 보일 정도 변형된 결과이다. (41P)

결국 생각이다. 사회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 급진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간신히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이다. 결국 오래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살아 생전에 내가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누군가 혹은 우리 아이들이 기억하고 그 의미를 찾아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지금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데도 나에게서 시작된 일이 성공하기도 하고, 인정받기도 한다.

나는 10여 년 전에 전기 에너지와 핵발전에 대해 깊이 공부했고, 핵발전소 사고가 확률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음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한국 혹은 중국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안전 관리 능력이 우리보다 뛰어났고, 한국과 중국이 핵발전소를 관리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전 의식이 높은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0년 전에는 핵발전소 사고가 확률이라는 말을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이 말은 이제 누구나 아는 상식일 뿐이다. 일본은 정말 운이 없었다고 봐야 하지 않나, 다음이 한국 아니면 중국이라는 건 정해진 일 아닌가? (확률이고 국가의 안전 의식을 감안할 때.)

그런데, 핵발전소 사고가 확률이라는 생각은 시민들의 자각이라기 보다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 따른 충격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지만, 단순하게 그런 충격만이라고 볼 수 없는지점이 많이 있다. 그 이전부터 나 같은 사람도 핵발전소의 위험을 자각하고 전기를 쓰지 않는 생활을 할 정도로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확대되었다고 봐야 한다.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고자 노력한 사람들의 노력은 이제 상당하다. 자본주의 자체가 그런 균열 노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까지 왔다. 페이스북과 인터넷 커뮤니티 등 다양한 온라인 활동은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는 효율적 도구이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이런 도구가 짧은 시간에 균열과 균열을 이어서 공간을 만든다. 나의 경우도 인터넷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없었을 것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농사일에 쓰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네트워킹이 우리에게 준 선물은 불확실성의 확장이다. 꿈꾸면 현실이 되는 것이 빨라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그 동안 국가와 기업을 통해 자신들만 가진 정보를 통해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한 이익을 얻어 왔다. 그러나, 이제 자본주의가 확대되는 건 쉽지 않다. 생각한다고 이익이 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힘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

내가 저항하는 삶을 살면 누군가는 공감하는 사회이다. 나 자신이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이기에 결국 공부하는 것외에는 방법이 없다. 묻고 공부하고 실천하고 다시 물으며 걸어가는 길을 걸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해답도 없다 단지 수많은 실험들만 있을 뿐이다. 특별한 사람이 하는 일도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곧 사회적 의제이다. 의제 설정에서 뒤지면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6시간 노동 같은 혁신적 의제를 우리 스스로 찾아내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무너진다. 거대한 혁명은 스펙터클한 한 장면일 뿐이다. 자본주의가 무너질 때는 대부분의 벽이 균열로 금이 간 상태에서 누군가 한번 툭 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 자본주의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이 일어난다면 <크랙 캐피탈리즘>을 읽고 생각해 보면 될 것 같다.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 대해 우리가 지금 자세히 봐야 할 지역이 라틴아메리카 사회이다. 유럽 모델은 식민지와 착취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미래 모델로 적합하지 않다.

이 책을 쓴 존 홀러웨이는 남미 좌파 운동의 중요한 이론가이다. 멕시코 '뿌에블라 자율대학'의 인문사회과학연구원 교수이며 사빠띠스타 운동을 연구하고 있다. 남미 좌파의 경험이 이 책 곳곳에서 사례로 제시된다. 다양한 실험과 가능성을 의제처럼 다루고 있지만 중요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의제이다.

크랙 캐피털리즘 - 균열혁명의 멜로디

존 홀러웨이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13


#크랙 캐피탈리즘 #작은 변화 #선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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