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하는 사당은 안돼... 백남준이 오래 살 집이어야"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할 때③] 백남준아트센터 박만우 관장

등록 2013.03.12 14:18수정 2013.03.1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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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라는 타이틀로 1년간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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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실에서 인터뷰에 응하는 백남준아트센터 박만우관장 ⓒ 김형순


백남준은 첫 전시 제목이 왜 '음악의 전시'이며 첫 전시에서 피아노, TV, 비디오, 소머리가 걸리는지. 왜 욕조에 뮤즈를 훼손시켰고 음악의 가시화, 시각화가 정말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먹통의 상징 같은 TV가 어떻게 소통을 대변하는 예술매체가 됐는지 등을 박만우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을 그의 관장실에서 지난 2월 25일 인터뷰했다.


- 백남준 선생은 언제 처음 만나셨는지요?
"제가 무슨 인연으로 백남준아트센터에 와서 일하고 있나 싶죠. 저는 백 선생을 비교적 일찍 뵌 편이지요. 1983년 '굿모닝 미스터오웰' 프로젝트 때문에 30여 년 만에 처음 한국에 오셨잖습니까. 전 당시 대학원을 졸업하고 KBS 교육제작국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거기 로비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죠.

그때는 제가 '전통문화강좌', 'TV미술관' 등을 만들며 구성작가 비슷한 역할을 했어요.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오웰' 할 때 그걸 생생하게 지켜봤었죠. 그럼에도 내가 저분을 위해서 뭘 하겠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고 그저 흥분에 휩싸였죠.

제가 1985년 12월 파리에 갔을 때, 눈이 오는 어느 추운 날이었어요. 세미나를 같이 듣는, 전에 영상 원장 하시던 최민 선생이 '아르데코(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백남준 특강이 있다고 하면서 같이 듣자고 해 갔었어요. 영어로 하는데 영어도 영어지만 '분자생물학' 뭐 이런 이야기가 튀어나오니까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근데 당시 동유럽 유고아티스트들도 쫓아왔었어요. 크림치즈, 무스 같은 것을 얼굴에 뿌리고 해프닝 아트하고…. 그때 파리에서 또 뵈었죠. 대학, 대학원 시절 은사인 임명방 교수와 이우환 선생도 그랬지만, 백남준에 대해 많이 언급해 얘기는 많이 들었죠. 당시 저는 아직 젊은 학생이니까 백남준에 대한 강한 인상을 받았어요."

- 2006년에도 그와 어떤 인연이 있었다고요?
"백남준 선생이 2006년 초 돌아가셨잖아요. 당시 제가 부산비엔날레 총감독할 때였는데 파리 출장을 갔다가 바스티유 '메종 로즈(Maison Rose)'에서 비디오 아트 컬렉터 전을 하고 있더라고요. 오프닝 하는 날, 영국 큐레이터 소개로 페스티벌과 아트페어를 절충하는 방식으로 비디오 아트를 기획하는 '바르셀로나 루프(Loop)' 팀을 만났어요.


이 팀은 바르셀로나 시 주최로 2006년 봄, 비디오 페스티벌 차원에서 최초로 백남준 추모 국제 세미나를 발 빠르게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날 보고 미디어 아트 관련 글도 쓰고 연구도 많이 했으니 한국인으로서 아시아를 대표해 한 분야를 발표하라고 해 얼떨결에 승낙했지요. 나중에 보니 발표자들의 면면이 대단했어요.

서울로 오면서 뭘 발표해야지 고민이 많았어요. 귀국해보니 마침 백남준 아트센터 기공식이 있었죠. 고궁박물관에선 백남준의 뉴욕스튜디오를 재현한 '메모라빌리아'를 만들어놓고, 미국국립미술관이 소장한 작품도 소개됐어요. 그중 백남준 유작 '엄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백남준 후반기 비디오 작업에 있어 모국 또는 모성이미지의 매트릭스'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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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음악전시회_전자텔레비전' 흑백사진 24×30cm 1963. 사진: 만프레드 레베. 국립현대미술관소장.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에 TV를 도입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을 찍은 만프레드 레베 박사는 1997년 과천전시 때 한국에도 왔었다 ⓒ 국립현대미술관


- 올해가 '비디오 아트 50주년'이죠. 독일 첫 전시인 음악, 피아노, TV, 소머리도 들어가는 '음악의 전시', 이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사실 백남준 비디오 아트 50주년을 맞아 올 4월 26일 백남준아트센터 주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리는데 바로 그 주제로 하게 되지요. 미술사적으로 비디오 아트의 발아를 보여준 태동의 잠재력이 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백남준이 참여와 소통을 강조했지만, 각론으로 들어가 보면 1963년이라는 시점이 굉장히 많은 걸 암시해요.

그가 왜 동시대 미술의 획을 긋고, 정말 미술사에 새 장을 연 사람인지, 왜냐하면 백남준은 이미 초기에 동시대 작가와는 또 다른 의제와 핵심적 이슈를 건드렸거든요. 첫 전시회에 TV를 도입한 것은 물론이고요. 백남준 21세기 전개될 새로운 사회구조와 문화의 방향성을 다 예견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 정말 그 직관력이 뛰어났죠.

이에 대한 답변으로 4월 26일 국제학술대회 구성과 참여인사의 면모와 세부적 주제들 설명 하는 것이 낫겠네요. 구성 멤버가 잘 짜였어요. '사이먼 밀러' 교수는 누구보다도 음악과 미술 관계에서 전문가고요. 또 미국 워싱턴 대 '루츠 쾨프닉' 교수는 중요한 문화연구가예요. 이 분은 최근 저서인 'TV의 문화사'에 가장 중요한 챕터가 '플럭서스 TV'인데요 TV아트를 이런 문화이론의 큰 틀에서 짝 조명해주실 거예요.

첫 전시 제목이 '음악의 전시'인데요. 독일어 'Ausstellung'가 아닌 영어 'exposition' 쓴 게 의미심장해요. 이 단어는 노출시키거나 가시화한다는 뜻도 담겨 있잖아요. "태양광선의 소통이 와서 닿는다"라고도 해석이 되고요. 그러니까 이건 결국 '음악의 가시화나 시각화'를 함의한다고 볼 수 있어요.

백남준은 아무리 '존 케이지' 류의 실험적 전위 음악을 할지라도 그보다 더 급진적 제스처를 쓰지 않았다면 외국에서 생존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백남준이 고민한 것 중 하나가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허물고, 그것을 극단적으로 해체하는 작업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건 선불교 말하는 극단적 깨달음과도 통하는 것이지요.

저도 대학 다닐 때 선방 많이 쫓아다니고 한때 '성찰' 스님 계도도 받아봤지만, 그때보면 공안을 주고 기존사유의 범주를 완전히 깨부수잖아요. '동자가 소를 타고 폭포수를 지나가는데 폭포수소리가 보이느냐?' 시각과 청각의 혼용을 넘다드는 그래서 일상적 사유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런 자극을 주는 원리와 같은 것이죠."

'음악의 전시' 시각과 청각의 경계 넘기

- 이런 극단의 선불교적 예술이 서구 미술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그의 예술에 액션이 들어가게 된 배경은 본격적으로 2차 대전이후에 미술시장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그걸 넘어서려고 했는데 작가들의 고민은 1963년이 되었지만, 예술의 상품화는 더 심화되고 그래서 시장에서 내다팔 수 없는 작업을 하다 보니 결국 '비물질화'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 대표적 예술이 바로 '액션음악, 퍼포먼스, 해프닝'입니다. 백남준은 바로 그런 요소를 공유한 거죠.

그 다음에 하나가 음악의 미래는 전자음악이라고 봤고 그래서 전자공학도 중요하게 생각했죠. 독학으로 혹은 베를린공대 드나들면서 배웠어요. 바로 그때 음악과 미술을 뒤섞는 아트가 되는데 가장 강력한 시청각매체는 TV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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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스마트폰에 담은 2010년 3월에 <백남준_랜덤 액세스전> 홍보게시물 ⓒ 김형순


- 이런 것이 다 백남준의 '랜덤액세스'와도 관련이 있지요?
"그렇죠. 백남준에게 있어 '랜덤액세스'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1963년 첫 전시에서 나온 건데요. 랜덤액세스 즉 '임의접속' 언제 어디에서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시공간 넘어서잖아요. 지금 다 어디에서 와이파이가 터지면 다 접속이 되는 '유비쿼터스' 세상이잖아요. 커뮤니케이션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게 가능해진 겁니다.

과학적 측면만 아니라 인문적, 문화사적 차원이나 현대소통이론에서도 그렇고 모든 아트 커뮤니케이션의 분기점이 되는 건 바로 정보에 있어 '제공자'만이 아니라 오늘날 당연히 여기지만 '수용자'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거죠.

수용자의 공간 참여, 신체개입이 현대미술을 전환시키는 축이잖아요. 더 이상 미술이 객관적 관조의 대상 아닌 거예요. 이건 결국 환경미술이나 설치미술과도 연결되는데, 환경미술은 여기서 '감상자의 신체를 에워싼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뜻합니다.

문화사로 보면 비디오아트도 백남준 천재가 그냥 태어나는 것 어디 있어요. 주변 지적토양을 빨리 흡수할 수 있었고, 1963년 당시 <누벨바그> 영화가 나오면서 '장 뤽 고다르'의 '카메라의 만년필화' 그래서 결국 수용자가 'UCC'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와야 영화가 돈과 자본과 권력이 조작되지 않는 진정한 인간 해방적 소통매체가 된다는 것. 이게 다 백남준과 같은 문맥입니다. 결국은 수용자의 참여가 관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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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북구 비엔날레로 111(용봉동)에 있는 광주비엔날레 주전시장 입구 ⓒ 위키페디아


- 백남준 글로벌 작가로 '정보사회'에 큰 아이디어를 주었지만, 90년대 이후 '광주비엔날레' 등 우리문화예술계에도 큰 선물 보따리를 주셨다고요?
"백남준은 예술가 측면에서 보면 20세기에서 21세까지 걸쳐간 사람으로 삶과 예술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일치한 사람이죠.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람 중 한 분이죠.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그의 삶의 족적을 알면 알수록 고국에 대한 사랑 굉장했구나 싶어요. 애국심의 발로만 아니라 인간이란 결국 자신의 뿌리와 기원이 이게 결국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증명해 보인 게 바로 백남준의 저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삼 정권 때 광주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를 모아놓고 5·18 보상을 뭘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할 때 한 분이 "비엔날레요" 그래서 광주에서 아시아 최초로 비엔날레가 생겼죠. 광주비엔날레가 그 아이디어로 그렇고 '인포아트'도 다 백 선생이 직접 섭외하고, 아는 외국작가를 섭외했잖아요. 어떤 파장이 올지 결국 고국의 미래를 다 내다보고 이를 기획하여 구체적 플랜까지 생각하며 실현한 거예요.

이보다 2002년에 미국 휘트니비엔날레에 참여한 백남준이 미국에서 받은 상금 (요즘 돈으로 약 3억 원 해당)을 휘트니 관장 찾아가서 "한국은 아직도 동시대 미술을 모르고 유화로 꽃, 나비를 그리고 있으니, 내가 그 돈을 다 낼 테니까 한국에 꼭 가져가 달라"고 부탁한 거잖아요. 그렇게 그 전시를 한국에 그대로 옮겨온 거죠.

2003년 처음 보는 낯선 형태의 전시인데도 전 파리에 있었고, 아내가 보고 와서 그러는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젊은 20대, 30대 부부 등 25만 명 참가해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하더군요. 백남준은 이렇게 우리나라에 세계현대미술의 흐름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그가 직접 코디네이션 한 것입니다. 그 은공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만큼 보답 못 드리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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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전시포스터. 백남준이 말한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 김형순


- "세계 게임에서 이길 수 없으면 우리 스스로 룰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정신적 바탕의 배경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런 방식의 말은 백남준의 자신감과 자긍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정말 백남준 사유가 독특한 하나는 어떤 방식이든 이분법이나 대립적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현실까지도 끌어들이면서 그게 문화예술이지만 제3의 영역을 만들어 내었죠.

서구의 테크놀로지가 엄청난 진화와 진보를 보였지만 사실 동양사회는 전통적으로 자연과 문화의 공존과 친화적 가능성이 있었잖아요. 바로 이런 걸 동시에 결합시켜 서구인에게는 충격을 준 거죠. 백남준 세계관 자체가 조명돼야 할 것이 많은데요. 이런 면에서 동서양 미학과 철학이 접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 백남준 연구와 그에게 접근하는데 유의할 점이 있다면요?
"조금은 필요한 게 아직까지는 잘 알다시피 서구에서도 소수의 사람이 아니면 백남준의 예술적 정신적 유산을 깊이 있게 해석해낼 만큼 전문연구인력 형성과 이에 대한 관심촉발이 아직 덜 되어 있고요. 또 하나는 특히 국내환경에 적용돼야 하는데 백남준의 '신화화'에서 탈피해야 하고 전설적인 인물로만 접근하는 걸 경계해야 합니다. 감정 섞인 개인적 숭배에서 벗어나 연구중심을 일단 미술사에 근거해야지요.

서양의 '발터 벤야민'의 경우도 그의 전기적 삶과 그의 철학적 사상을 혼돈한 나머지 그가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어떻게 21세기 예술과 미학적 사유를 위해서 어떤 긍정적인 요소를 배태했는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잖아요. 그렇게 되려면 다 '비판적 이해(critical understanding)'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서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판적 견해를 취해는 거죠. 여기가 인간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 돼야지 그를 추모하는 사당이 되어서는 안 되죠."

백남준 편집기술에 대한 연구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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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I 'TV침대' 1972. 백남준아트센터 2013년 전반기 상설전 <부드러운 교란_백남준을 말하다(6월 30일까지)>에서 소개된 'TV침대'. 모니터에 담긴 내용과 그 독특한 리듬감, 템포감 등에 대해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 백남준아트센터


- 백남준 선생도 내 작업은 '음악기반의 예술'이라 하셨지요?
"중요한 부분을 지적하셨어요. 백남준 예술은 흔히 '시간예술(time based art)'라고 하죠. 해프닝, 기존미술에서 탈피한 퍼포먼스 심지어 내러티브가 포함된 영상예술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추상적 시간철학이 아니라 백남준의 시간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서 접근이 필요하죠. 그런데 아쉬운 건 백남준의 시간예술에서 몽타주 편집기술이 핵심인데 이에 관심을 둔 연구소가 한 군데도 없어요.

잘 아시다시피 엄청나게 많은 '기존영상(footage)'이나 방송필름 재활용하면서 본인이 다 편집을 했잖아요. 1930-1940년대 '레비-스트로스'가 16mm로 찍은 아마존에 원시부족의 춤추는 모습 등 인류학자의 아카이브도 활용하고, 일본 닛산 차, 펩시광고 때로 험프리 보가드가 나오는 영화 등을 샘플링, 재조합, 재편집했지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편집이 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작업을 미술사적으로 디테일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50대 미디어작가들이 요즘 하는 걸 백남준은 이미 오래 전에 시도했으니 놀랍죠.

백남준의 예술을 연구하는데 있어 그의 텍스트에만 너무 의존하지는 말고 콘텍스트 분석이 꼭 필요하다고 봐요. 칸딘스키 '점선면' 이론도 그 사람의 저술일 뿐 작품과는 분리해 봐야하듯 백남준의 미술사도 내재적 분석이 훨씬 많이 필요합니다.

'글로벌 그루브'에서 부채춤이 왜 나오고 비디오아트에서 탭댄스, 왜 중요하고 그게 무슨 의도인지 알아야하죠. 그게 단순히 문화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백남준은 설치 비디오아트에서 '공간과 신체와 관계'를 다루고 있는 거죠.

백남준에 보기에 인간의 만든 가장 중요한 문명의 이기가운데 인간의 삶을 스스로 황폐하게 하지 않는데 기여한 악기라고 본 거죠. 첨단공학이 들어간 과학적 산물인 악기, '샬럿 무어먼(백남준 예술파트너)'의 첼로 같은 것을 신체의 영장으로 TV나 비디오와 같은 맥락으로 봤어요. 이를 이해 못하면 비디오아트를 알 수 없습니다.

악기의 연장으로 소리를 시각화한 백남준의 TV아트, 이것은 결국 영상, 리듬감, 소리의 시각화하면서 사운드와 비주얼 통합하는 것인데 기존의 영화방식이나 영상과는 전혀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제3의 탁월한 리듬감과 템포감을 발굴한 거죠. 그런 면에서 비디오아트는 음악전공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장르입니다."

디아스포라 예술가로서의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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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 카비-린케 I '아니오' 2012. 위 작품은 지금 백남준아트센터 2층에서 2013년 6월 16일까지 열리는 기획전 <끈질긴 후렴>에 소개되는 튀니지 작가 '나디아 카비-린케'의 영상작품 중 한 장면. 그는 백남준의 후예답게 약자의 힘이 세계를 구원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 김형순


- 백남준은 "한국이 20세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 크게 성공할 것이며 다만 유태인처럼 한국인도 이제 인류 문화사에 기여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것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인간 백남준, 한국인 백남준이 바로 근현대사회에서 이런 모든 갈등을 다 겪고 그것을 처절하게 실천한 롤 모델이 아닌가요. 그걸 보면서 제가 깨닫는 건 바로 '약한 자의 힘(La force des faibles)'이에요.

백남준도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서구에서 많은 설움을 받으면서 백남준이 봤을 때 한국인을 유태인과 비교하는 것은 당연하죠. 뿌리 뽑힌 삶이 역으로 21세기에 엄청난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해체되고 분열될 정도의 슬픔과 고통에도 그걸 신명으로 승화시켰잖아요. 한국인만이 가진 유전인자로 본 거죠.

인도인, 유태인, 우리나라 안산 외국이주민 등 이런 떠돌이들, 그들은 집을 언제라도 떠나 아프리카에 가서도 말뚝을 박고 살 수 있는 자세, 이런 것이 바로 21세기에 소프트파워가 됩니다. 유태인들은 이런 디아스포라의 삶에서도 세계문화사에 크게 기여한 거죠. 백남준이야말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 백남준아트센터가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끝으로 한마디 더 하신다면?
"무엇보다도 아트센터이면서 미술관이기 때문에 가장 큰 얼이자 정체성이 되는 게 바로 컬렉션인데요.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멈췄기 때문에 인간에 비유하면 유아기에서 성장기로 넘어가는데 부양이 잘 안 되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여건만 탓할 수 없고 좀 더 장기적 안목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국내외 개인소장자로부터 주요작품을 가져와서 수준 높은 연구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고 그런 네트워크도 넓히고 신뢰도도 높여야죠. 경쟁력 있는 학예연구를 통해 진전된 재해석과 훌륭한 전시도 내놓아야 합니다.

국제학술대회와 NJP 학술서적을 지속 간행하여 전문역량을 키우고 이와 동시에 멀티미디어 환경 등을 통해 대중화에도 힘을 써야죠. 백남준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범국가적 프로젝트를 개발해야 하고 후원받기 위해서 다양한 접촉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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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우관장 ⓒ 김형순

박만우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서울대학교 미학과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를 나와 파리1대학교 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내외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해왔으며, 2001년 광주 비엔날레전시부장을 거쳐 2005년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을 지냈다.

2008년에는 '독일 하노버 엑스포 문화행사 현대미술전' 큐레이터로 2010년에는 '프랑스 팔레 드 도쿄 국제교류' 초빙 디렉터로 활동했다.

그해 1월부터는 '아뜰리에 에르메스' 디렉터로 일해 왔고, 지난 2010년 3월부터는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으로 부임해 3년째 일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관련전시_하나] 백남준아트센터 2013년 전반기 상설전 : '부드러운 교란_백남준을 말하다' 2013년 6월 30일까지 장소 : 백남준아트센터 1층 참가작가 : 백남준, 저드 얄커트, 만프레드 레베, 샬럿 무어먼. 이 전시는 백남준과 맑스, 쇤베르크 그리고 성(Sexuality)이 주제다.
[관련전시_둘] 서울시립미술관 상설전 [New & Now_서울시립미술관 2012 신소장작품] 2013년 3월17일까지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본관1층에서 백남준-보이스 사진 전시 중
#백남준 #비디오아트 #광주비엔날레 #인포아트 #박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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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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