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픽션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
영화 <러브 픽션>의 한 장면. 구월(하정우)과 희진(공효진)은 구월의 집에서 '러브러브'를 하기 위해, 옷을 벗는다. 희진의 옷을 벗기던 구월이 멈칫한다. 희진의 겨드랑이에 있는 무성한 털을 본 것이다. 멈칫하는 이유를 묻는 희진에게 구월은 "아니,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아서"라며 말을 흐린다. 그는 여성의 '겨털'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여자의 겨드랑이 털은 알래스카에서라면 몰라도,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사회는 여성의 겨털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전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소개팅에 나온 여성이 무성한 겨털을 보이자, 소개팅남은 주선자에게 당혹감과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남성의 불쾌감을 유발하는 겨털! 용서하지 않겠다."한국은 속이 좁은 나라다.
최근 개정된 경범죄 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을 두고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해봤다. 겨드랑이 털을 풍성하게 기른 여성이 끈 민소매 티를 입고, 명동 한복판에서 두 팔을 올리면서 다닌다. 그녀의 겨드랑이 털은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눈을 찌푸리게 했다. "아, 기분 나쁘네"라면서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그녀가 겨드랑이털에 대해서 일반적인 시각(여성의 겨털은 불쾌하다)을 가진 경찰관과 조우하게 된다.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우선 이번에 개정된 경범죄 처벌법 시행령 개정안 제3조 제1항 제33호를 보자. "여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알몸을 지나치게 내놓거나 가려야 할 곳을 내놓아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준 사람"은 범칙금 5만원을 부과한다고 되어 있다.
그녀는 여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명동)에서 가려야 할 곳(겨드랑이 털)을 내어 놓아 다른 사람(행인 및 단속 경찰관)에게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주었다. 범칙금 부과에 필요한 구성 요건을 충족시켰다.
경찰청은 "과다노출로 처벌되는 범위는 사회통념상 일반인들이 수치심을 느끼는 수준으로 알몸의 중요부위를 노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여성들이 착용하는 미니스커트나 배꼽티는 처벌대상도 아니고 그와 같은 행위를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일단 미니스커트와 배꼽티는 열외다. 그래도 모호하다. 사회 통념상 일반인들이 수치심을 느끼는 수준'은 무엇이며, '알몸의 중요부위'는 가슴인지, 팔인지, 겨털인지 명확하지 않다.
경찰서에 전화해서 "여자의 겨드랑이 털은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드러내놓고 다녀도 되나요?", "엉덩이 노출 의상을 입고 싶은데, 어디까지 허용이 되나요?", "쫄쫄이 내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데, 중요 부위가 두드러지게 나오는 거 괜찮나요?"라고 물어보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심지어 노출 의상을 입고 경찰서에 가서 검사를 받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