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 근처에서 만난 무지개(왼쪽)와 대학원에 들어가고서 꼭 신고 싶었던 단화(오른쪽). 바닥이 땅에 착착 붙는 민바닥 운동화.
박태신
저는 서울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40여 년을 서울에서 지낸 서울 촌놈입니다. 그래서 향수병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살았습니다. 가족과 친척들이 대부분 서울에 있어 명절 때의 귀성 풍경 또한 저하고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만 2년을 경부선의 끝자락 부산에서 지내다 왔습니다. 작은 월셋방을 구하고, 조금은 모진 마음에 주소지를 옮기며 주민등록증도 갱신했습니다. 외관상 온전한 부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난해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 때 모두 부산에서 투표했습니다. 대학원 학업 관계로 때 늦은 나이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어서 제겐 별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부산에서의 삶은 큰 모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중한 하나의 원 모양으로 제 삶의 나이테에 덧붙여질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학업 관계로 내려간 것이지만, 2~3년 전의 솔직한 제 심정은 '서울이 싫어졌고 서울을 떠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시각각 새로운 문명으로 탈바꿈하는 것에 염증이 났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과시욕이 많았다고 할 수 있는 두 명의 전 서울시장이 1990년대까지 호젓했던 서울 풍경을 너무 많이 바꿔놨기 때문입니다.
부산에 있으면서 2011년 8월 서울의 '무상급식 지원범위에 관한 서울특별시 주민투표'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또 같은 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에는 제게 투표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일, 저는 부산 사직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습니다. 경기가 끝날 무렵, 경기장 밖으로 나온 저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노점상 아저씨에게 투표 결과를 물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2G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투표와 선거 결과를 알고 나서 내 일처럼 기뻐했고, 그 이후로 조금씩 생채기가 나아가는 서울을 멀리서 지켜봤습니다.
그렇게 두 번의 남녘 겨울을 보내고서 올해 2월에 상경했습니다. 학업이 끝났기도 했고, 서울에서 새 일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1년여 전부터 권유받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시민운동을 여러 모로 지속해 왔던 인생 선배의 사무실 업무를 맡게됐습니다. 이 일은 무엇보다도 서울이라는 도시에 많은 방점을 두는 일입니다. 지금 그 일을 업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