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을 찾아 떠난 길에서 나를 다시 만나다

[포토에세이] 봄꽃들 피어나는 숲을 걷다

등록 2013.03.23 21:14수정 2013.03.2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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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겨우내 얼었던 계곡물이 녹아 힘차게 흐르고, 봄은 그 소리따라 이만치 왔다. ⓒ 김민수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 중 한 구절이 머리를 맴돈다. 급기야 그 구절은 나를 밖으로 이끈다. 이렇게 좋은 봄날, 자연으로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죄짓는 것이다. 더군다나 메리 올리버의 그 구절을 읽고서도 봄을 맞이하러 가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 싶어 오랜만에 카메라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선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난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세상에 주어야 할 선물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시인은 세상이 아름답다고 했다. 세상사에 회의를 느끼며 살아가는 내게 다시금 세상을 대하는 내 삶의 자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터였기에 이 말은 더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여기에 살아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그래, 나는 살아있음으로 하고 싶은 말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세상이 듣지 않는다면 그 하고 싶은 말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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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지 산행에서 첫 번쩨 만난 꽃, 얼레지는 단 한 송이만 피어있었다. ⓒ 김민수


숲의 초입에 들어서자 계곡물 소리가 우렁차다. 건강한 아가의 울음소리가 우렁차듯, 어린 봄 계곡물 소리도 우렁차고, 아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햇살을 머금은 물의 눈빛도 눈부시게 빛난다.


봄바람과 계곡물 소리와 산사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와 봄 햇살이 어우러져 빈 산을 충만하게 한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이가 아직은 덜피어난 생강나무 사이로 보인다. 그가 내 곁을 스치며 말한다.

"조기, 계곡 옆으로 가시면 핀 꽃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말한 꽃은 무슨 꽃일까? 새순과 꽃대를 올린 얼레지들이 한창이다. 출산을 앞둔 산모의 둥그런 배처럼 둥근 꽃 몽우리가 나른한 봄 햇살을 맞으며 쉬고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서너 시간이면 피어날 꽃도 있지만 이미 피웠을 꽃을 찾아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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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바람꽃 너도바람꽃은 이제 서서히 봄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 김민수


지금쯤 피웠을 꽃의 이름을 되뇌어본다. 얼레지, 꿩의바람꽃, 너도바람꽃, 노루귀. 또 뭐가 있을까 하다 '얼레지'라는 이름을 생각해 본다. 얼레지는 내게 여러 의미로 다가온다. '얼레지하면 엘리제가 떠오르고 엘레나가 떠오른다. 엘레지(Elegy)는 죽은 사람을 그리는 애도의 시요, 엘레나는 순전히 내 상상력에 의해 붙여진 이름으로 얼레지의 꽃말 '바람난 여인'을 떠올리다, 대학 시절 만났던 어느 여인, 그 익명의 여인 이름이다.

엘레나는 젊은 시절 미군기지 근처의 술집에서 일하며 미군과 연애를 했다. 제대한 애인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꼭 부르리라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삼십 년이 지나도록 지켜지지 않았다. 내가 이십 대 중반이었을 적에 그는 50대 중반이었으니 이제는 80대 노인네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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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의 삭 계곡 돌멩이에 피어난 이끼의 삭과 계곡물에 빛나는 봄햇살의 조화로움을 본다. ⓒ 김민수


숲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마이크로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를 들고 숲을 누빈다. 너도나도 피어난 꽃만 찾는다. 꽃망울은 볼 줄도 모르고 오로지 피어난 꽃만 찾는다. 이렇게 피어난 꽃을 찾다가도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면 무관심해지겠지?

사랑한다는 사람들에 의해 짓밟히고, 뽑히고, 벌거벗김을 당하는 풀꽃. 이것이 인간이 풀꽃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것마저도 없었더라면 풀꽃들은 더 슬펐을까? 짓밟힐지언정 사랑 한번 원 없이 받아보았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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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바람꽃 화려한 때를 다하고 시들어가는 꽃잎, 그가 가장 예쁜 모습이었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김민수


모든 것이 완벽한 곳이었다. 시든 꽃이 아니었더라면 모든 것이 완벽할 뻔했다. 맑은 햇살과 계곡물이 만들어내는 보케와 어우러진 꽃, 그러나 그 순간은 지나갔다. 너무 오랜만인가? 잘 보이지 않다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보여도 제대로 담질 못한다. 들꽃과 혼연일체가 되었던 시간을 회복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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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바람꽃 한동안 굳었던 손가락과 카메라와 그들과의 어색한 조우들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풀렸다. ⓒ 김민수


숲에 안기고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에서야 계곡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계곡에서 멀리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제야 집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그렇게 숲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내 몸에 남아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그랬다. 숲에 들어선 이후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부터 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는 장님이었던 것이다. 눈뜬 장님, 그 눈이 뜨이자 비로소 귀는 계곡물 소리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자 혀가 풀린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고, 비로소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카메라도 기꺼이 그들을 포착한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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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의바람꽃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꿩의바람꽃 가족을 만났다. ⓒ 김민수


다음을 기약할 줄 알았는데, 꿩의바람꽃 가족이 반겨준다. 그들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숲에는 저마다 자기의 때가 있으므로, 너도바람꽃이 하나 둘 봄을 떠날 준비를 하는 시간이 꿩의바람꽃과 바통을 넘겨받는 때이다.

잠시 숨을 고르며 쉬다 계곡물로 손을 씻고, 계곡물을 마신다. 오랜만에 마시는 살아있는 물이다. 죽은 물만 먹던 내 몸에 세뇌된 뇌가 "탈이 나면 어떡하지?" 걱정을 양산해 낸다. 이렇게 허약해 졌구나 싶다.

서서히 잃어버린 나를 자각하기 시작한다. 회복해야 할 나, 내가 원하는 내가 어떤 모습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살지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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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귀 청노루귀와 분홍노루귀와 그 사이에서 막 피어나는 아기꽃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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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노루귀 작디 작은 청노루귀, 오늘 아침에 피어난 듯하다. ⓒ 김민수


참 이상한 일이다. 보이지도 않던 꽃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꽃마다 이미 누군가의 모델이 되면서 시달렸던 꽃들이 아니라 갓 피어난 꽃들이다. 나는 그들을 담을 때 주변정리를 하지 않는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설령 사진으로 담기가 어려워도 그들을 위해서도 주변정리를 해서는 안 된다.

올라가는 길에 서너 명이 모여 꿩의바람꽃을 담았던 곳을 봐두었다. 내려오는 길에 그곳을 들렀지만,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의 사랑하는 방식이란 이런 식일 수밖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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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의 포자 계곡 바위에서 자라는 이끼들이 푸르디 푸른 봄날을 노래한다. ⓒ 김민수


누군가는 이끼의 삭이나 포자도 담아주었겠지만, 어쩌면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끼를 바라보면서 계곡물 소리에 귀를 연다. 그리고 따스한 봄 햇살이 눈부셔 엉성한 나무그늘에 들어가 책을 읽는다.

오랜만에 느끼는 해방, 자연과의 합일, 잃어버린 나를 만난 날이다. 숲을 내려와 시간을 보니 4시간 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니까 한 시간이 일년 치 병든 내 마음을 고친 것이다. 지난 4년의 시간, 나는 정말 무엇을 하며 살았던 것일까?
덧붙이는 글 위의 사진들은 경기북부 지역의 산에서 3월 23일 담은 것들입니다.
#얼레지 #너도바람꽃 #꿩의바람꽃 #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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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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