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加)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 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1955. 2)
수영은 1955년 10월에 쓴 <무제(無題)>라는 제목의 산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고독이나 절망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고독이나 절망이 용납되지 않는 생활이라도 그것이 오늘의 내가 처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순수하고 남자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위도(緯度)에서 나는 나의 생활을 향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31쪽)
앞서 본 <나비의 무덤>(1955년 1월)에서 수영은 "더욱 뜨거운 너의 입김에/ 나의 고독한 정신을 녹이면서 우마"라며 울부짖었습니다. 이는 곧 고독에 대한, 또는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겠지요.
위 글은 <나비의 무덤>으로부터 9개월이 지난 뒤에 쓰였습니다. '고독'과 '절망'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영의 모습이 그려지시나요. 심지어 그는 그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을 "순수하고 남자다운 일"로 보고 있습니다.
'고독'과 '절망'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영의 모습
<나비의 무덤>과 위 글 사이에는 9개월 정도의 시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 수영에게는 작지 않은 변화가 찾아온 듯합니다. 마침 그러한 변화의 첫 지점에 이 시 <긍지의 날>이 있습니다. 이 시는 1955년 2월에 쓰였습니다. <나비의 무덤>에서 한 달 정도 지난 후이지요.
<나비의 무덤>은 전체적으로 죽음과도 같은 현실 속에서 새 생명의 부활을 꿈꾼 수영의 몸부림으로 보입니다. 그 끝나지 않는 몸부림 때문이었을까요. 이 시에서 수영은 거듭 '피로'를 말합니다.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1연 1~3행)하였다는 화자의 진술이 그것이지요. 더군다나 그 '피로'는 '영원'(1연 5행)하기까지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피로'가 다른 누가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3연 2행)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그 "영원한 피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냥 모른 체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운명처럼 받아들일까요, 아니면 무언가 다른 시선을 주어야 할까요.
수영은 시선을 바꾸는 방법을 취합니다.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1연 7, 8행)가 그것이지요. 이 시의 화자에게 '긍지'는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2연 6, 7행)입니다.
수영은 이 시를 쓰면서 분명히 마음이 한껏 부풀어오른 듯합니다. 이는 자신의 몸을 "한 치를 더 자라는 꽃"(3연 5행)으로 말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지요. 그 "긍지의 날"에는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3연 8행)갑니다. 그리고 그날은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3연 10, 11행)이 됩니다.
'긍지(矜持)'는 "자신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가지는 당당함"을 뜻합니다. 속된 말로 "난 할 수 있어"의 태도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는 당시 설움과 절망에 빠져서 몸부림치던 수영에게서는 쉬이 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수영을 이렇게 한껏 부풀게 했을까요.
무엇이 수영을 '긍지'로 한껏 부풀게 했을까
저는 수영 부부의 재결합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최하림 시인이 <김수영 평전>에서 그 재결합 시점을 1954년 말이나 1955년 초쯤으로 기록한 것과 자연스럽게 부합합니다. 이 시는 1955년 2월에 쓰였습니다.
또한 아내 김현경 여사의 회고록인 <김수영의 연인>을 보면 수영이 아내와의 재결합에 매우 큰 기대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영에게서 도장을 받아간 김현경은 친구의 친구 집에 기거하면서 소설을 씁니다. 이종구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지요.
그 얼마 후 김현경은 수영에게 만나자는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그녀는 약속 장소인 삼선교 근방의 다방으로 나갑니다. 그녀는 일부러 늦게 나갔지요. 수영에게 여전히 귀하고 당당한 여자이고 싶은 마음으로 말이지요.
그렇게 떨리는 가슴을 안고 문을 열자 먼저 와 기다리는 수영이 보였습니다. 수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현경의 손을 잡고 다방을 나왔습니다. 그들은 늘 하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근처 거리를 돌아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자존심 강한 수영이 다방에 먼저 가 있었던 것이 예사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내를 다시 만났을 때 아무런 말도 없이 현경을 자신의 품 안으로 받아들인 것도 마찬가지지요. 아내와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이나 희망 같은 것을 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것들이어서지요.
친구의 동거녀가 된 아내를 이렇게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남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하지만 우리는 전쟁이라는 격변의 시대를 산 이들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옹졸한' 수영이 현경을 넉넉하게 받아들인 배경에도 분명 이런 점들이 깔려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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