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가족끼리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공모-나의 애마 때문에 생긴 일] 과속에 신호위반 버룻 잡은 사연

등록 2013.03.29 17:31수정 2013.03.2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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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운전석에 앉는 순간 변신을 거듭한다. 똑같은 차라도 컨버터블 뚜껑을 열고 오픈카가 되면 바른생활 사나이가 되지만, 후면에 스티커를 붙이면 드라이빙이 거칠어진다. 또 모델명이나 배기량으로 단순하게 '좋은 차'가 아닌, 또 하나의 '나'로 포장하곤 한다.


요즘 잘 나간다는 세단을 타고 운전석에 앉아보라.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누가 부러우랴. 그 안에 있으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코를 후비거나 방귀도 내 맘대로 뀔 수도 있다. 하지만, '창문 내리라'며 지시하는 유일한 존재가 있었으니, 그 존재는 바로 경찰이었다.

신차 구입 후 '질주본능' 발동... 과속에 신호위반까지

10여 년 전, '뽀대'나는 하얀 외관의 최신 중형차를 뽑았다. 며칠 되지 않아 슬슬 몸이 근질근질 하기 시작했다. 개들이 눈을 보면 뛰고 싶어 안달하듯, 나도 그렇게 달리고 싶었던 거다. 이른 오전 집을 벗어나 국도로 나가자 한적한 시골길이 이어지며 '질주 본능'을 자극한다.

왕복 4차선 도로를 애마에 몸을 맡기고 본능적으로 질주를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도로가 좁아지며 모퉁이를 도니 쏜살같이 달리던 내 차 앞에 느닷없이 신호등이 나타난다. 빨간불, 하지만 오가는 차량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으니 주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슬금슬금 속도를 줄이던 나는 별 죄의식 없이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가하며 그대로 달렸다. 역시 차는 아주 잘 나간다. 거금을 들여 차를 산 보람이 있다. 이번에 나온 신차로 바꾸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 질주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잘 지나갔다 싶었고 조금 꺼림칙하다고 느끼는 순간, 아마도 기쁨은 딱 여기까지였나 보다. 완만한 오른쪽 커브를 막 돌 때쯤 왼쪽 공터에는 경광등 불빛과 함께 순찰차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 뭐지? 경찰관은 수신호로 나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한다.

이미 거기에는 한 운전자가 경찰관에게 "왜 다른 차는 안 잡고 나만 잡느냐. 신호가 바뀐 줄 몰랐으니 한 번만 봐 달라"며 궁색한 변명으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이쯤 되면 나도 우선 '함정단속이 아니냐'며 따져나 보고, '봐 달라'며 밀고 나가야 하나? 경찰과의 해후를 고민하던 찰나 단속 경찰관이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아, 선생님 신호위반 하셨네요? 못 보셨나요?"
"……."
"뭐라고 말을 좀 해 보세요. 신호를 위반한 이유가 타당한지 들어나 봅시다!"


경찰관의 추궁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구차한 변명 대신 일단 강하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운전하는 사람이 신호를 못 봤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바쁘니까 위반한 거지."

나의 대답에 단속경찰관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진다.

"그래요? 운전면허증 좀 제시해주시죠! 선생님께선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단속되셨습니다. 벌점 15점에 범칙금은 6만원입니다!"

이번에는 단속경찰관과 함께 있던 동료 경찰관도 거들었다.

"좀 봐주라고 사정하면 정상참작이나 해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당당하게 위반했다고 시인을 하시네요? 음… 차 바꾼 지도 얼마 안된 거 같은데."

읍지구대 최 순경 들먹였는데도 안 통했다?

아, 지금 본의 아니게 판세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늦지 않았다. 기회는 이때였다. 본질을 흐리게 하는 깜짝쇼로 이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기고만장할 때가 아니었다. 잽싸게 항변이나 궤변을 늘어놓긴 해야 하는데…. 그래, '밑져야 본전' 아니겠는가.

무언가 꺼리는 듯 한 말투로 고개를 숙인 채 목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사실대로 너무 반듯하게 이야기한 점,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같은 경찰 가족끼리 수고가 많으시네요…."
"예? 가족 중에 경찰관이 있어요?"
"네, 실은… 읍지구대 최 순경이 친굽니다"


사실 최 순경은 결코 내 친구가 아니었다. 예전에 잠깐 같은 아파트에 같은 동에 살던 '이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갑자기 최 순경이 나에게 해준 말이 떠올라 그냥 둘러댄 것뿐이었다.

법을 집행하는데 정에 호소하면 집행에 큰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최 순경이 한번은 내게 '경미한 교통법규 위반시 같은 관할에 근무하는 하급직 경찰관 이름을 대면 보통 무마해준다'고 한 말이 순간 떠올랐던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나를 단속하는 당신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당신의 동료와 친분이 있으니, 그 동료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살펴 달라'는 선처성(?) 통첩인 셈이었다. 칼만 안 들었을 뿐, 겨우 이름 정도만 아는 경찰관을 끌어들인 게 조금은 미안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대처였다.

하지만 나의 협박성 대처에도 그러든지 말든지 대수롭지 않게 단속 경찰관은 부지런히 스티커를 발부하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경찰관은 무척 난처한 표정이었다. 내 주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 체면 불구하고 동료를 들먹이는 나의 입장을 무시하기도 그렇고, 무조건 스티커만 끊고 있는 동료 경찰관에게 불법을 선처해 달라고 부추기기는 더욱 어려웠으리라.

범칙금 대신 곱절로 밥 사준 최 순경, 정말 미안했다

결국 법대로 처리됐다. 범칙금 통지서를 받아 들고 다시 내 차로 달려온 나, 혼자말로 그에게 욕을 한 바가지나 안겨주니 조금 후련했다. 순찰차가 후사경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보상심리가 발동하니 나도 모르게 과속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5분을 달려갔을까?

갑자기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발신번호가 '0112'로 끝나는 것을 보니 경찰서나 파출소 전화번호다. 혹시나 해서 받아보니, 바로 그 최 순경 아닌가. 동료를 들먹이며 정에 호소했던 작전의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 잘 지내셨죠? 저, 최 순경입니다. 그런데 단속에 걸려셨다구요… 정말로 죄송하게 됐습니다. 어렵게 제 이름을 말씀하시고 선처까지 부탁했는데 일이 그렇게 되어버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하던 경찰관을 지켜보던 동료 경찰관이 걱정이 되어 최 순경의 근무지까지 전화를 해서 알려 줬다는 것이다. 내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거나 으름장까지는 놓지 않았지만 그런 연락까지 최 순경에게 가게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내가 더 미안했다. 법규를 위반한 상황에 들먹였던 사람이니 더욱 더 그랬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최 순경은 오히려 내 과태료를 대납(?)해 주고 싶은데, 내가 그렇게 까지는 용납하지 않을 것 같으니 당장 오늘 가족들끼리 외식을 하자는 것이다. 결국 범칙금보다 곱절은 더 나온 밥값은 기어코 최 순경이 계산을 하고 말았다.

애먼 최 순경을 들먹이고 그것도 부족해 말단 경찰공무원의 박봉까지 축을 낸 나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한없이 뜨거워진다. 그 사건 이후 단속에 걸릴 일도 안 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 누굴 안다고 과시하지도 않았음은 물론이다.

경찰들의 호각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함정단속과이 난무하던 그때, 그래도 살갑고 정겨웠던 그때의 경찰관들이 그립다. 그러나 저러나 엄정한 단속으로 임무에 충실해 끝까지 스티커를 발부하시던 그 대머리 경찰관은 요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덧붙이는 글 [나의 애마 때문에 생긴일] 공모글입니다.
#애마 #경찰 #신호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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