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에서 남북이 자유롭게 오갈 날을 꿈꾸다

[베를린 장벽길 160km를 걷다 6] 마리네타 지르코프스키, 상해군인의 집 그리고 슈톨페 검문소

등록 2013.04.02 19:04수정 2013.04.02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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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네타 지르코프스키

감시탑에서의 교훈을 다시금 새기며 길을 나섰다. 맑게 갠 푸른 하늘아래 좌우에 있는 나무들이 더 싱싱하게 보였다. 길을 좀 더 재촉하면 자갈길로 이루어진 숲길이 계속 나온다. 장벽길에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이 상당히 잘 관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장벽길의 숲길은 다 같은 나무로 이루어진 길이 아니다. 그래서 독일의 삼림에 관심이 많은 학자가 베를린의 자연숲을 장벽붕괴 이후에 어떻게 다시 조성했는지에 대해 연구한다면 학계에 주목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독일의 자생하는 나무와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나무는 분명히 다르다. 이 점을 충분히 숙지한 후, 기후와 지리에 맞는 전통적 산림복원에도 이제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사실 무차별개발로 인해 우리가 공유해왔던 자연들이 파괴되어가는 모습을 보니 매우 안타까웠다. 특히 지난 번 부동산투기로 인한 신도시광풍이 이 거리를 걸으며 생각나는 이유는 왜일까?

사실 비행기를 타고 서울 상공을 바라보게 되면 산악지대를 제외하고는 자연공간이 거의 파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인들의 빡빡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그리고 누구나 쉴 수 있는 자연공간이 충분히 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일부 전문가들이 상권의 확장과 뉴타운을 연연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a 한적한 숲길 좌우의 나무들을 보면 상당히 규칙적으로 심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한적한 숲길 좌우의 나무들을 보면 상당히 규칙적으로 심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 최서우


기나긴 숲길을 지나가다 보면, 북쪽으로 향하는 2차선 도로가 나온다. 여기서 5분 정도 걸으니 특이한 표지판이 나왔다.

"여기는 독일과 유럽이 1990년 2월 17일 10시까지 분할되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위에 동서냉전의 옛 경계선이 그려져 있었다. 사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날은 전에 언급했듯이 1989년 11월 9일이고, 여기에서 끊겨진 도로는 1990년 2월 17일에 다시 연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a 1990년 2월 17일에 다시 연결된 도로 옛 서베를린 지역에서 브란덴부르크 주로 빠져나가면 이 표지판을 흔히 볼 수 있다.

1990년 2월 17일에 다시 연결된 도로 옛 서베를린 지역에서 브란덴부르크 주로 빠져나가면 이 표지판을 흔히 볼 수 있다. ⓒ 최서우


이 표지판을 지나면 작은 마을인 호엔 노이엔도르프(Hohen Neuendorf)가 나온다. 마을 중심 로터리를 지나 막다른 길에 들어서면 또 다른 희생자인 마리네타 지르코프스키(Marinetta Jirkowski)에 대한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지르코프스키의 전시물이 특별히 세워진 이유는 1961년 이후 베를린 장벽을 넘었으려고 했던 몇 안 되는 여성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지르코프스키의 경우 1980년 11월 21일부터 22일 사이 약혼자와 그의 친구와 함께 이곳에서 사다리를 놓은 다음 군사감시를 피해 월담하려고 했지만, 결국 발각되어서 27발의 사격이 가해지게 되고 지르코프스키는 배에 총알을 맞아 사다리 아래로 떨어지며 결국 이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a 마리아 지르도프스키 그녀는 장벽을 넘으려다 희생된 여성이었다. 여성이 장벽을 넘다가 희생된 경우는 매우 드물었지만, 장벽을 탈출하는 사람들에게 가하는 초소병이 총격은 남녀가 따로 없었다.

마리아 지르도프스키 그녀는 장벽을 넘으려다 희생된 여성이었다. 여성이 장벽을 넘다가 희생된 경우는 매우 드물었지만, 장벽을 탈출하는 사람들에게 가하는 초소병이 총격은 남녀가 따로 없었다. ⓒ 최서우


이 사건이 일어난 후 동독국가안보부(Ministerium für Staatsicherheit, 줄여서 슈타지라고도 부름)는 이 사건을 덮기 위해 서베를린 탈출에 성공한 두 친구들과 연결을 시도하여 사건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결국 장벽붕괴 이후 1995년의 재판을 통해 이 사건이 드러나게 되는데, 당시 20세였던 초소장에게 15개월 형을 선고하였다. 하지만 이 실형은 집행되지 않고 보호감호로 집행유예 되었다. 서베를린으로 월담하는 자에게는 당시 남녀 예외 없이 총격이 가해졌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며 이는 장벽이 붕괴된 연도인 1989년까지도 지속되었다.


a 사건 경위를 설명하는 전시물 사건 경위를 설명해주고 있다. 필자가 저술한 그대로이다.

사건 경위를 설명하는 전시물 사건 경위를 설명해주고 있다. 필자가 저술한 그대로이다. ⓒ 최서우


상해군인들의 집과 종묘재배원

무거운 마음을 가라앉힌 후 지르코프스키를 가로막았던 길을 지나가면 특이한 벽돌집들이 나오는데 집 주변도 자연친화적으로 잘 조성되어 있었다. 이 주택가의 이름은 인발리덴지들룽(Invalidensiedlung)인데, 직역하자면 상해군인들을 위한 주거지이다. 상해군인을 위한 주거지는 1748년 프로이센의 군주였던 프리드리히 2세가 베를린 중심가에 퇴역군인들을 위한 주거지를 구성하면서 시작된다.

이는 20세기 초반 지금의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고 현재도 상해퇴역군인 및 중증 장애인을 위한 거주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50여동의 180가구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지르코프스키가 탈출하려고 했던 길과 동쪽으로 향하는 길이 개방되어 있지만, 장벽시대에는 삼면으로 장벽이 둘러싸여 동쪽 출구로만 향할 수 있었기에 주거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한다.

a 상해 군인의 집 집 구조는 이층 벽돌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당 2가구로 이루어져 있다.

상해 군인의 집 집 구조는 이층 벽돌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당 2가구로 이루어져 있다. ⓒ 최서우


상해군인 거주지를 빠져나와 숲길로 향하게 되면 특이한 곳이 나오는데 종묘 재배원(Baumschule)이다. 종묘 재배원은 정원 및 숲 조성을 위한 묘목 생산의 역할을 한다. 여기서 심겨지고 키워진 묘목은 독일의 있는 슈퍼마켓 및 묘목상점으로 가며, 이 두 곳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종묘 재배원은 묘목생산 뿐만 아니라 정원 조성 및 발코니 장식 상담도 도와주는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베를린의 경우 도심부를 벗어나면 단독주택이 많아서 이에 대한 수요가 많은 편이다.

숲에서는 환경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적당히 나무를 베어서 산림자원을 활용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종묘재배원 뿐만 아니라 장벽길을 가다보면 농원들도 많이 분포한다. 특히 딸기나 과일을 직거래하는 농원도 있는데, 일반 슈퍼에서보다 더 싸게 과일을 구입할 수 있으며 신선한 편이다.

a 종묘재배원 직역하면 나무학교이지만 원래 묘목을 생산하는 곳이다. 장벽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종묘재배원 직역하면 나무학교이지만 원래 묘목을 생산하는 곳이다. 장벽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 최서우


슈톨페 국경검문소

종묘 재배원 학교를 지나 기나긴 숲길을 지나가면 다리 아래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차들이 쌩쌩 달리지만 장벽시대에는 이곳 슈톨페(Stolpe)에 국경검문소가 있어서 서베를린 사람들은 서독을 여행하기 위해 우선 임시 베를린 신분증과 통과비자를 가지고 25마르크의 국경통과비를 지불해야 서독으로 차를 타고 갈 수 있었다.

사실 이것을 통해 동독정부가 막대한 돈을 벌었던 것은 사실이며 이는 동독정부가 공산진영에서 그나마 경제사정이 나았던 국가로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 존속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게다가 서베를린 및 서독인들은 여권(서베를린 시민의 경우 임시 베를린 신분증) 및 비자가 있으면 동독의 친지 방문이 가능했다(단 방문일 수는 제한되었다).

반면 동베를린과 동독의 주민들은 서독으로 가는 비자를 받기가 상대적으로 까다로웠는데, 이는 정치적 반발로 인한 동독지역의 인구유출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전시물 중에는 차량을 통해 동독을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차량 트렁크를 감시하는 사진도 있다.

a 슈톨페 검문소 꽉 막혀있는 남북한과는 달리 서독인의 동독방문은 동방정책이후 여권 및 비자를 지참하고 출입료를 지불하면 대체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다.

슈톨페 검문소 꽉 막혀있는 남북한과는 달리 서독인의 동독방문은 동방정책이후 여권 및 비자를 지참하고 출입료를 지불하면 대체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다. ⓒ 최서우


남북이 완전히 꽉 막혀있는 것과는 달리 서독과 서베를린의 경우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인해 비자 및 통행료를 준비한다면 동독방문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일례로 필자가 알고 있는 70년대 당시 파독 노동자였던 할아버지께서 동독통과비자를 받은 후 통과료를 지불해서 값싼 동베를린 담배를 면세점에서 대량으로 사가지고 오셨다는 얘기도 들었었다. 게다가 동서베를린 사람들은 서로의 TV채널을 시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호간 커뮤니케이션이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7·80년대의 국지도발 및 1990년대 중반 북한 핵개발로 인해 북한과의 커뮤니케이션 시도가 통일 전 독일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햇볕정책이 북한의 핵개발을 방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국경협정을 체결하여 통행료를 지불하기도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사정이다. 언제쯤 한반도는 전쟁과 북한의 도발 및 핵개발의 상흔을 극복하고 화해협력의 길로 갈 수가 있을까?

a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 우리는 언제쯤 자동차로 중국대륙과 시베리아를 자유로이 달릴 수 있을까?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 우리는 언제쯤 자동차로 중국대륙과 시베리아를 자유로이 달릴 수 있을까? ⓒ 최서우


#베를린장벽길 #베를린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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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독일에서 통신원 생활하고, 필리핀, 요르단에서 지내다 현재는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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