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100년사>표지
북스토리
책에 의하면 <애국혼>은 중국 영화사는 물론 우리 영화사와 독립운동사에도 무척 중요한 영화다. 상하이에서 한국인들의 주도로 기획 제작된 첫 영화로, 민족영화인 <아리랑>의 맥을 잇는 동시에 유일한 항일영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는 중국 상하이로 간 영화인들이 상하이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영화계에게는 항일영화의 모범이, 한국영화계에는 항일영화의 효시로 모범이 되는 등 여러 의미가 함축된 영화라고 한다.
<애국혼>은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리던 중국 상하이에서 만들어져 중국인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영화는 중국인들에게 우리의 항일의지를 알리는 동시에, 중국에 있던 독립 운동가들을 비롯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고 항일의지를 불태우게 했다.
여러모로 의미가 남다른, 때문에 우리 영화사에 무척 중요한 영화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영화 프린트는 소실되었고, 중국 베이징 영화자료관에 16장의 스틸(위 영화 화면도 그중 하나)만 남아있을 뿐,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더불어 아쉬운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애국혼>과 같은 영화를 만드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던 이른바 '상하이파 한국영화인'들이 우리에게 거의 잊혔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국에서 만들 수 없었기에 상하이에서 제작되어야 했던 이들의 영화를 한국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촬영 장소가 중국이고, 관객들이 중국인이며 제작사의 국적이 중국이기 때문에 상하이파 영화를 한국영화사의 연구대상에서 뺄 수는 없다고 사료된다. 상하이파 영화들이 갖는 영화사적 의의는 초창기 영화사의 복원이며 영화사의 공백기를 채우는 의미가 있다. 민족영화의 맥을 이으며 최초의 항일영화로 후대에 끼친 영향과 의의가 적어도 한국영화사의 큰 연결고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영화사에도 기록된 상하이파 영화인들의 활동은 이제 한국영화사의 한 부분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영화 100년사>에서상하이파 한국영화인들은 우리에겐 낯설다. 우리 영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제까지 이들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면.
상하이파 한국영화인들은 우리에겐 낯설다나운규에 의해 1926년에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상영된다. 그러나 일본의 간섭으로 많은 부분들이 삭제된 상태로 개봉된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에선 일본의 통제 때문에 온전한 민족혼이 깃든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판단으로 일부 영화인들이 당시 동양의 할리우드라 불릴 정도로 영화 산업이 발달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다. 대표적인 인물은 정기탁, 전창근, 이경손, 정일손, 한창섭 등이다.
이들이 상하이로 간 1920년대 말은 일제의 영화 검열이 강화된 시기다. 이들 상하이파 영화인들은 상하이에 먼저 건너가 거주하던 김명수, 김광주 등과 함께 본격적인 영화작업을 한다. 이들에 의해 당시 만들어진 영화는 정기탁의 <애국혼>을 시작으로 우리 민족혼과 항일의지, 사회모순비판과 변혁의지 등을 주제로 한 영화 13편이다. 그러나 현재 상하이파 영화인들과 그들이 만든 영화는 우리 영화사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