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나라 전쟁 날 거라며? 두렵지 않아?"

[말라가 교환학생 적응분투기 ⑤] 교환학생, 우리에게 대북위기란

등록 2013.04.15 09:26수정 2013.04.15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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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제 저녁 8시 믿기지 않을 만큼 밝은데 저녁 8시라는 게 함정

이제 저녁 8시 믿기지 않을 만큼 밝은데 저녁 8시라는 게 함정 ⓒ 김정현


서머타임(Summer time, 일광 절약 시간제)이 시작돼서 그런가. 시계는 늦은 7시 반을 가리켰지만,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다. 교환학생 친구들과 센트로(Centro, 말라가 시 중심)를 걷고 있었다. 성별도 다르고 서로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서 두 달의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 의지하면서, 한편으론 즐거움을 함께 나누면서 속없는 사이로 나아갔다. 그날도 함께 시내 조용한 카페를 찾아 함께 공부하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아, 나 돈 떨어졌는데."
"빨리 돈 뽑아! 환율 엄청 올랐던데? 곧 1500원 찍지 않을까?"

"허데르~(Joder : 대략 '아이구'라는 뜻)"
"아! 여행 가고 싶은데 어쩔..."
"유로화는 약세긴 한데 우리나라 정세가 너무 안 좋아서 그렇대!"

"근데 진짜 전쟁 나는 겨? 만일 나면 어쩔 거?"
"에이 설마! 안 나겠지~ ^^"

우리도 한국인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전쟁이 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전 세계 언론의 '1면' 거리가 된 고국 땅의 위기가 우리에게 영향을 아예 안 줄 수는 없다. 스페인어권 정론지 <엘 파이스(El Pais, '국가'라는 뜻)>는 한반도의 위기를 사설로 다룬다. TV 뉴스에선 행진하는 북한 군인과 평양의 모습이 나타난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곳 친구들도 한 번씩은 물어온다.

"두렵지 않아? 전쟁이 날 거라고 들었어."
"북한은 미친 나라야. 자기들이 미국을 어떻게 이긴다고..."
"미안해, 안 좋은 이야기를 들어서. 너희 나라가 지금..."


한반도의 일을 한국 사람인 내가 아닌, 외국 사람이 더 걱정하고 있는 상황에 할 말을 잃곤 했다. 얼마 전 한 외신이 '한국 시민이 너무 고요하다'는 내용의 보도를 낸 적이 있다. 나도, 다른 친구들도 질문을 받으면 "문제없어". "괜찮아, 북한은 항상 그래. 정치적인 문제야"라고 답한다. 그 답을 들은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만 내 생각엔 그 친구들은, 외신기자가 한국인을 독특하게 본 것처럼 우리를 신기하게 생각하진 않았을까.

"Pray For Corea(한국을 위해 기도합니다)" - 한 스페인 친구의 페이스북 글
"두려워하지 마요. 모든 서방세계는 남한의 편입니다" - 택시기사


걱정하지 않는데도 이렇게 말해주는 당신들에게 감사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느껴지는 감정은 부끄럽다는 것 그리고 화가 난다는 것이다. 한국에 오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많은데, 한국 자랑 좀 할 수 없는 걸까.

a  형, 동생, 친구들과의 한 때. 그래도 걱정해주는 외국 친구들이 고맙다.

형, 동생, 친구들과의 한 때. 그래도 걱정해주는 외국 친구들이 고맙다. ⓒ 박정규


a 문 닫힌 시티은행 영업시간 외에는 인출이 안되는 것도 힘든데, 환율이 올라서 더 답답하다

문 닫힌 시티은행 영업시간 외에는 인출이 안되는 것도 힘든데, 환율이 올라서 더 답답하다 ⓒ 김정현


북한이 미사일을 쏜다던 10일, 돈을 다 써서 시티은행에 갔다. 시티은행 현금 인출기는 외국 땅에서 한글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공장소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100유로 인출을 선택했다. 항상 떨리는 순간이다. 계좌에서 한국 원으로 얼마가 빠져나가는지 나온다. 오늘은 얼마가 나올까.

'한화 151,000원이 계좌에서 인출됩니다'

'아 이런... 만 원이나 올랐네.' 그냥 취소버튼을 누를까. 저번 달에는 14만 원이었는데.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돈을 더 아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더 오르는 건 아닐까.

이미 우리는 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4월 9일 기준 1유로화는 약 1490원까지 치솟았다. 다행히 상승세가 주춤한 덕에 오늘인 11일 1475원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고향의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곧 1500원을 찍을 것이라는 우려가 지워진 건 아니다.

a 재앙급 기울기 북한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한 4월 초, 유로화 환율은 정말 무섭게 올랐다.

재앙급 기울기 북한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한 4월 초, 유로화 환율은 정말 무섭게 올랐다. ⓒ 네이버 금융정보


모든 유학생에게 환율은 정말 민감한 문제다. 예를 들어보자. 집에서 100만 원을 보내주면 3월, 환율이 최저치(1414원)로 떨어졌을 때는 700유로 가까이 인출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계산하면 약 670유로. 거의 30유로가 빠진다.

30유로. 숫자가 적어서 감이 잘 안 오는 숫자다. 하지만 30유로면 자취하는 유학생의 삶의 질을 바꿀 수 있는 숫자다.

요즘 살이 빠진 걸 느낀다. 정확히 몇 Kg이 빠졌느냐? 그건 묻지 말도록 하자. (사실, 체중계 살 돈이 아깝기도 하다) 한국에 있을 때보단 몸이 가벼워진 건 사실이니까. 운동을 좀 했다곤 했지만, 내 생각에 가장 큰 이유는 식습관의 변화다. 요즘 한국에서 열풍이 불고 있는 1일 1식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실천한 결과다.

a 빠에야에 그리운 김치찌개 이러고 싶은데

빠에야에 그리운 김치찌개 이러고 싶은데 ⓒ 김정현


a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전자레인지가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전자레인지가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다. ⓒ 김정현


아직 어둑한 7시 반, 서머타임이라서 6시 반 같이 어둡다. 아침에 일어나면 30분 동안 빨래를 돌리고, 씻고 수업 준비를 해서 나간다. 아침 8시 반 수업이라 30분 전에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침은 생략. 간혹 주말에 대량으로 해둔 생 밥이나 빠에야(Paella, 스페인식 볶음밥)를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딱 한 숟갈 뜨고 가기도 한다.

수업이 끝나면 11시 반이나 12시 반 사이. 고민이 된다. 저녁 약속이 있으면 과감하게 배를 비우고 집이나 도서관을 가겠지만, 없다면 지갑을 들여다 본다. 난 얼마 전 부활절 휴가 때 영국에서 돈을 너무 많이 써 버린 탓에 돈을 아끼는 데 혈안이 돼 있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 여행도 가고 싶고 급격히 변하는 기후에 맞춰서 옷도 사고 싶으니까.

'저번 주에는 먹는 데만 10유로(약 15000원)를 썼어. 집에 재료가 있는데 그냥 집에 가서 먹자'
'그래도 스페인 학식(학생식당 음식) 언제 먹겠어. 어제도 굶었는데 오늘은 먹고 갈까 그냥.'

a 자연과학대학 구내식당 점심 때면 종업원들은 보까디죠 준비에 정신이 없다.

자연과학대학 구내식당 점심 때면 종업원들은 보까디죠 준비에 정신이 없다. ⓒ 김정현


a 단과대 구내식당 보까디죠 한입 하는 스페인 대학생들

단과대 구내식당 보까디죠 한입 하는 스페인 대학생들 ⓒ 김정현


말라가대학의 몇몇 단과대에는 구내식당(Cafeteria)이 있다. 내가 다니는 자연과학대학도 있는데, 유학생 중엔 여기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소문이 잘 안 났다. 맛있다. 소문엔 법대가 최고라는데 난 여기가 더 마음에 든다. 특히 시간이 없을 때 1.5유로(약 2000원)면 보까디죠(Bocadillo, 직역하면 '한입거리' 바게트 사이에 고기나 야채를 끼워서 만든 샌드위치의 일종) 하나 포장해서 갈 수 있다. 좀 여유가 있다면 2유로면 커피까지 곁들일 수 있다.

a 보까디죠 한 입 하실레예 카페 꼰 쏠로(Cafe con solo) 1잔, 햄(York) 보까디죠. 도합 2 유로

보까디죠 한 입 하실레예 카페 꼰 쏠로(Cafe con solo) 1잔, 햄(York) 보까디죠. 도합 2 유로 ⓒ 김정현


그래서 저번 달에는 한 주에 두세 번 이상은 식당에 갔는데, 요즘은 잘 못 간다. 머릿속에서 욕망과 절제의 두 자아가 싸우면 나는 이제 수전노가 돼 가고 있는 절제의 손을 든다. 그런데 한 달에 30유로면 충분히 점심 거르는 고통을 안 겪어도 된다.

환율 이야기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간 그날, 하루를 마무리하고 페이스북을 보다가 한 번 더 웃었다. 같이 걷던 형이 집에 가서 "대재앙은 대북위기인가 환율인가"라고 글을 쓴 것. 그렇다. '민족의 자주를 위해 미제를 몰아내자'나 '비핵개방 3000', '종북 퇴치' 같은 이념적 수사를 위해 평화를 희생할 필요가 있는지 의심이 든다. 하루빨리 평화가 와서 생활에 애로사항이 없었으면, 외국인들과 그런 주제로 이야기 안하는 게 이곳에 있는 우리의 소원일 게다.

a  "대재앙은 대북위기인가 환율인가" 공감 도장 콱 찍어주고 싶은 글이었다

"대재앙은 대북위기인가 환율인가" 공감 도장 콱 찍어주고 싶은 글이었다 ⓒ 김정현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http://ddobagimedia.tistory.com)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말라가 #교환학생 #스페인 #적응분투기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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