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을 추구하고 전성기를 구가한 시대의 유산

[유럽문명의 원류 이스라엘 이집트 여행기 33] 이집트 박물관 3

등록 2013.04.23 11:18수정 2013.04.2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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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왕국 시대의 유물

 멘투호텝 2세
멘투호텝 2세John Bodsworth

고왕국 시대 유물을 본 나는 중왕국 시대 유물을 보러 좀 더 안으로 들어간다. 중왕국 시대는 고대 이집트 문명 중 기간(기원전 2040-1781)이 짧고 사회문화적으로 침체된 시기였다. 그 때문에 두드러진 유물이나 예술작품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중왕국시대 자주 언급되는 파라오가 멘투호텝(Mentuhotep) 2세, 세누스레트(Senusret) 1세, 아메넴하트(Amenemhat) 3세다. 멘투호텝 2세는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고 테베에 도읍하면서 중왕국을 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왕국은 제12왕조(기원전 1994-1781) 때 번창했는데, 이 왕조를 연 것이 아메넴하트 1세다. 그는 수도를 테베로부터 북쪽 이티 타우이(Itji Tauy: 현재 Fayum으로 추정)로 옮겨 나일 델타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했다. 그리고 측량을 통해 수로를 정비하고 관개를 해 농업생산성을 높였다. 이를 통해 이집트 백성을 굶주림과 갈증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그의 아들인 세누스레트 1세(기원전 1964-1929)가 제12왕조의 번창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메넴하트 3세 무덤에서 나온 검은색 피라미드 모형
아메넴하트 3세 무덤에서 나온 검은색 피라미드 모형Jon Bodsworth

세누스레트 1세는 영토를 확장한 왕으로 유명하다. 북쪽으로 현재 수단지역까지, 서쪽으로 리비아 지역까지 정복했고, 시리아와는 외교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는 중앙집권을 강화했고, 피라미드, 신전, 오벨리스크 등을 건설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정교한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시누헤의 이야기(The Tale of Sinuhe)>에 잘 나타나 있다. 시누헤는 세누스레트 1세가 왕이 되기 전 그를 수행해 리비아를 방문한 관리다.
  
아메넴하트 3세(기원전 1842-1794)는 중왕국 시대의 황금시대를 연 파라오로 유명하다. 그는 아버지 세누스레트 3세와 20년간 공동통치를 하면서 정치를 배웠고, 운하와 수로를 건설하고 댐과 호수를 만들었다. 그도 역시 피라미드를 건설했는데, 다슈르(Dashur)와 하와라(Hawara)의 것이 유명하다. 다슈르의 피라미드는 중간에 건설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하와라의 피라미드 역시 무너진 상태로 존재한다. 이들 무덤에서 나온 유물이 현재 이집트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그 중 검은색 피라미드 모형이 유명하다.
 
개혁이 성공하기는 정말 어렵다

 카르나크 신전에 있는 하쳅수트 오벨리스크
카르나크 신전에 있는 하쳅수트 오벨리스크이상기

중왕국시대 유물을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신왕국시대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신왕국시대(기원전 1550-1075)는 제18왕조부터 제 20왕조까지 약 5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신왕국시대는 고대 이집트 문명이 가장 번창했던 시기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쳅수트, 투트모시스 3세, 아케나톤, 투탕카문 왕이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이다. 카데시 전투로 유명한 람세스 2세는 제19왕조의 파라오다. 그리고 제20왕조는 람세스 3세부터 람세스 11세까지 100여 년간 지속되었다.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이 남긴 유산은 테베와 아마르나를 중심으로 남아 있다. 특히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은 이들 왕의 정치관과 종교관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나일 크루즈 편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이에 비해 다신교를 버리고 유일신 숭배로 돌아선 아케나톤 왕의 이야기는 다루지 않아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아케나톤
아케나톤이상기

그는 원래 아메노피스 4세였는데, 유일신 아톤을 숭배하면서 이름을 아케나톤으로 바꿨다. 아케나톤은 '아톤의 살아있는 정령' 또는 '아톤의 대변자라'는 뜻이다. 그는 즉위 5년째 테베에서 아마르나로 천도하면서 정치와 종교 양면에서 개혁을 추구한다. 아메노피스 4세로 있는 동안  카르나크 신전 동쪽에 태양신 아톤을 숭배하는 신전을 세웠고, 아케나톤이 되고 나서는 태양신 아톤이 아문-라 또는 라-하락티 신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예술에 있어서도 사실주의 시대를 연다. 문학사가이자 예술사회학자인 하우저(Arnold Hauser)는 아케나톤의 시대를 자연주의 또는 인상주의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자연주의, 인상주의는 의고전주의, 형식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추구한 진보적인 예술 사조를 말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시도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술의 상당부분에서 궁정적이고 의례적이며 인습적인 요소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에 있는 아케나톤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에 있는 아케나톤이상기

"중제국시대 보였던 형식주의는 종교영역에서나 예술분야에서나 이 왕의 영향 아래 생생하고 자연주의적이며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로 변했다. 새로운 제재가 선택되고, 새로운 표상(表象: Vorstellung)이 탐구되고,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구도의 작품이 연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줄임) 단지 하나 의외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 시대의 예술이 그 온갖 혁신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철두철미 궁정적이고 의례적이며 형식 위주였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17년간 새로운 시도를 했던 아케나톤이 죽자 모든 개혁은 중단되고 다시 인습적인 사회로 돌아가고 말았다. 수도는 다시 테베로 옮겨지고, 어린 투탕카문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파라오의 힘이 약해지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히타이트왕국이 소아시아의 페니키아, 가나안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고, 18왕조는 자연스럽게 몰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외적과 대적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세티 1세와 그의 아들 람세스 2세가 제19왕조를 열게 되었다.


신왕국 시대의 유물

 네페르티티 흉상
네페르티티 흉상베를린 신박물관

신왕국 시대의 유물 중 눈에 띄는 것은 대부분 조소상이다. 하쳅수트의 채색 두상과 하쳅수트의 스핑크스가 크기는 작지만 인상적이다. 그리고 아메노피스 3세가 아내인 티이와 나란히 앉아 있는 7m의 거대한 좌상도 인상적이다. 이 조소상을 통해  우리는 남녀평등과 가정을 중시하던 당시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이곳에는 또한 아케나톤과 관련된 유물이 가장 많이 눈에 띈다. 239㎝의 아케나톤 조소상이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마르나로 수도를 옮기기 전 아메노피스 4세라는 이름을 가진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외 아마르나 시대 유물들도 여럿 보인다. 그중 인상적인 것이 아케나톤의 부인 네페르티티의 조소상이다. 그녀는 고대 이집트 최고의 미녀로 알려져 있는데, 아케나톤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길고 광대뼈가 나온 모습이다. 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흉상은 이곳 이집트 박물관에 있지 않고, 독일 베를린 신박물관 이집트관에 있다.

 태양신 아톤에게 기도하는 아케나톤과 그 기족들
태양신 아톤에게 기도하는 아케나톤과 그 기족들이상기

제19왕조시대 작품으로는 람세스 2세 흉상, 메렌프타 흉상, 람세스 3세 입상 등이 있다. 이들 작품은 테베와 타니스 등에서 가져온 것으로,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에서 본 것에 비하면 규모가 작고 감동이 훨씬 덜한 편이다. 이들 신왕국 전성기 시대 파라오의 유물들은 현장에서 보는 것이 훨씬 더 사실적이고 인상적이다. 또 2층에서 투탕카문의 화려한 유물을 보아서인지, 이들 유물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이들을 보고 우리는 그리스 로마시대 이집트 지역 유물을 대충 대충 살펴본다. 대리석, 석회석, 현무암, 화강석 등으로 조각한 인물상이 대부분이다. 이들 중에는 좀 더 이집트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그리스 로마적인 것도 있다. 이들 유물을 통해 우리는 이집트 문화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리스 로마 시대가 도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카이로 대학교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하다

 불에 그을린 민주국민당사
불에 그을린 민주국민당사이상기

후문을 통해 박물관을 나오니 박물관 옆 정원에도 수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석관이 특히 많다. 석관의 외벽에는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망자의 삶을 기록하고 영생을 비는 뜻이 담겨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을 보고 나오면서 나는 박물관 레스토랑 밖으로 불에 그을린 고층빌딩을 하나 볼 수 있었다. 이 건물은 2011년 1월 25일 이집트 민주화 혁명 때 공격을 받은 민주국민당(National Democratic Party) 당사다.

민주국민당은 1978년 당시 대통령이던 안와르 사다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81년부터는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 여당이 되면서, 최고의 권력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호스니 무바라크의 실각과 함께 민주국민당은 2011년 4월 법원의 명령으로 해산되었고, 당사는 국유재산이 되었다. 이집트 민주화 혁명의 여진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인지, 이 건물은 누구도 아직 손을 댈 수 없어 검게 그을린 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카이로대학교 정문 앞 오벨리스크
카이로대학교 정문 앞 오벨리스크이상기

박물관을 나오니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이제 이집트 시내를 구경할 차례다. 계획에 의하면 칸 칼릴리 바자르와 구시가지 문화유산을 보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타흐리르 광장에 이집트 혁명 2주년을 기념하는 시민들이 모여 구시가지 전체가 불안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차를 돌려 카이로대학교로 향한다. 나일강에 놓인 알 가마 다리를 건넌 다음 카이로대학교 오벨리스크 앞에 차를 세운다.

그런데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 정문에서 검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집트 혁명 2주년이라 그런 줄 알았더니 학생을 제외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카이로대학 출신이라는 이름으로 정수일 한국 문명교류연구소장의 입장만 허용되었다. 우리는 문밖에서 대학교 안을 들여다볼 수 밖에 없었다.

 카이로대학교 어문학부
카이로대학교 어문학부이상기

카이로대학은 1908년 설립되었고, 1925년 국립화되었다. 그래서인지 건물이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으로 되어 있다. 정문 오른쪽으로 시계탑이 있는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 언어학부이고, 정문 앞 바로크 양식 건물이 대학 본부이다. 현재 20만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으며, 이집트에서 아자르(Azhar)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로 학생수가 많다. 이 대학 출신으로는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부트로스-갈리, 팔레스타인 대통령을 지낸 야세르 아라파트 등이 유명하다. 사실 정수일 소장도 카이로대학교 출신으로 문명교류사에서 탁월한 인물인데, 국내에서 너무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

정수일 소장이 안으로 들어간 다음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가까운 곳에 동물원이 있고, 나일강 쪽으로는 쇼핑몰이 보인다. 마침 하늘 위로는 집으로 돌아가는 두루미가 날아가고 있다. 정수일 소장은 가까운 학생회관에도 들르느라 우리는 한 시간 정도 카이로대학교 주변을 서성였다. 사실 학교 안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한 꼴이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집트 대학가 분위기를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중왕국시대 #신왕국시대 #아케나톤 #네페르티티 #카이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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