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트라우마 치유 없인 통일도 없다

[서평] 손석춘이 <박헌영 트라우마>

등록 2013.05.13 18:24수정 2013.05.1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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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씩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발해가 갑자기 멸망하지 않고, 고려와 통합했다'면, '문종이 부왕 세종보다는 못해도 10년만 더 살았다'면, '광해군이 반정으로 폐위되지 않았다'더라면 우리 역사는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독재자' 박정희가 남로당 관련자로 체포되어 살아남지 못했다면 우리 현대사는 달려졌을 것이고, 아니 비록 그때는 살아남았을 지라도 김재규 총탄에 암살당하지 않고 부마항쟁을 시발점으로 온 나라가 민중봉기가 일어나 하야했다면 적어도 '박정희교' 추종자들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신라가 통일했고, 발해는 갑자기 망했고, 문종은 너무 빨리 죽었고, 박정희 살아남아 군사반란을 일으켰다가 심복에게 '시해'(弑害는 봉건시대 용어)당해 '박정희교'라는 한 종파를 만든 이들까지 생겨났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 하늘 아래가 보다 더 나은 땅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은 항상 '~이랬다면'이라는 역사의 가정이 참 부질없는 것임을 익히 알지만 여기에 그런 사람이 또 하나 있다.

미군도 인정한 박헌영이 '대통령'이 됐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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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트라우마> ⓒ 철수와영희

북녘 하늘 아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진 '김일성 왕조'가 아니라 "빨갱이 중 빨갱이" 박헌영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2013년 한반도 역사는 지금과는 조금은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라는 희망어린 질문을 던진 책이 있다.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수와영희 펴냄)에서 "진보의 죽음이 선고된 지금, 정의롭고 깨끗한 꿈인 권력과 자본의 세상을 넘어 진정한 민주주의 통일을 갈망 이들에게 가슴으로 나누자고"했던 손석춘 전 <한겨레> 논설위원 (건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과 교수)이 펴낸 <박헌영 트라우마>(철수와영희 펴냄)이다.


1947년 3월21일 작성된 미군 정보 문서는 '지금 만일 총선거가 실시된다면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을 정도로 "빨갱이 중 빨갱이"이 었던 박헌영은 해방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다.

한반도 하늘 아래에서 거부 당한 박헌영


하지만 지난 60년 동안 한반도 남쪽은 조선노동당을 만든 박헌영 이름 석자를 '당연하'게 지워버렸고, 북쪽 역시 지워져야 할 이름이었다. 김일성이 그를 "미제 간첩"으로 제거했기 때문이다. 손석춘은 "2002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나를 안내하던 김일성대학 철학과 출신 조선로동당원에게 박헌영을 물었지만 대답은 '누군인지 모른다'였다"고 말할 정도로 철저히 거부 당했다.

과연 그래도 될까? 손석춘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박헌영은 "'조선의 민족해방과 정의 실현에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며 혹독한 고문"을 받을 정도로 조국 해방에 투신했고, "해방 직후 조선노동당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는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손석춘은 '김일성 주석'때문에 박헌영을 '미제간첩'으로 몰아가려는 한반도 남쪽 일부 진보세력을 향해서도 "NL(민족해방파)계 운동권에서는 여전히 미제의 간첩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역사를 달리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1980년대 이 땅의 순수한 영혼들을 사로잡았던 '자주'와 '통일' 또한 한 차원 높여 2010년대에 걸맞게 재구성해야 옳다. 바로 여기에 이 책 <박헌영 트라우마>가 남쪽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며 박헌영 '복권'을 촉구한다.

"'박헌영 트라우마' 치유하지 않으면 통일 어려워"

이 책은 박헌영 유일한 혈육인 원경 스님(박병상)과 절집에서 "지식인 다운 외모와 다소 멋쩍어하는 듯한 미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주위를 살피는 태도와 침착하고 과묵함. 왠지 무게가 있어 보이는 모습"을 가졌던 박헌영을 거부했던 한반도 현대사 굴곡을 반추하면서 '박헌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만 더 나은 한반도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21세기, 남과 북이 통일로 가는 길에 박헌영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남과 북 모두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박헌영과 정직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그 소통과 치유 없이 통일은 어렵다."

'트라우마'라는 용어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하다.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럼 '박헌영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앞에서듯 지적했듯이 북한이 먼저 나서야 한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체제에서는 박헌영을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손석춘은 박헌영을 제거한 이가 김일성이었듯이 김일성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김일성은 1945년 평양에 들어와 첫 대중연설에서 '어떠한 당파나 개인만으로 통일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 어떠한 당파나 개인만으로 통일을 이룰 수 없다. 김정일도 언제나 강조한 게 '통 큰 단결'과 '통 큰 결단'이었다. 이 책 <박헌영 트라우마>가 북쪽의 조선로동당 지도부에 보내는 메시지는 깨끗하다. 남쪽에서 탄압을 받아 올라간 사회주의자들을 옹근 60년 전, 미제의 간첩으로 몰아 체포한 큰 과오를 바로잡기 바란다."

이 책이 나올 때(4월 17일)쯤 한반도는 '일촉즉발'이었다. 40년 만에 남북 사이 모든 대화 채널이 끊겼다.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박헌영 복권이다. "남의 체제와 북의 체제가 통일을 위해 서로 한 단계 더 성숙해가야 한다면, '박헌영 트라우마' 치유는 그 시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분석한 박헌영 트라우마는 새로운 임상심리 개념이다. 거짓말로 상대를 크게 해코지한 사람이나 집단에게 남는 깊은 상처를 이른다. 해코지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스스로 거짓임을 잘 알고 있기 있기에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면서 마침내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중증까지 나타난다. 역사적 인물 박헌영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비롯한 이 트라우마는 병명도 모른 채 1953년에서 2013년까지 옹근 60년 동안 남과 북에 만연했다. 이 책은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모든 트라우마의 치료가 그렇듯이 박헌영 트라우마 치유책 또한 박헌영의 진실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박헌영 아들 원경 스님은 "제 아버지를 죽이고 저를 힘들게 한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원한의 원인이라는 게 상대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들이 복수라는 손길을 내려놓았는데, 박헌영 트라우마 치유가 시작된 것이다.

그를 간첩으로 몰아 죽은 후손과 '김일성'때문에 아직도 그이를 '미제간첩'으로 단죄하려는 남쪽 하늘 일부 진보세력들 역시 이 치유에 동참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바라는가? 그럼 박헌영 트라우마 치유에 나서시라.
덧붙이는 글 <박헌영 트라우마>(손석춘 글 ㅣ 철수와영희 펴냄 ㅣ 13000원)

박헌영 트라우마 -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

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2013


#박헌영 #김일성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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