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세대... 대한민국은 빨간 알약을 먹었을까?

[서평] <88만원세대> 그 후 5년 6개월, 어떤 일이

등록 2013.05.19 17:52수정 2013.05.19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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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88만원 세대> 표지

<88만원 세대> 표지


우석훈과 박권일의 공동 저작인 <88만원세대>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면서, 경제성장의 그늘에 머물러있던 2007년 전후 20대가 '88만원세대'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차원에서 다뤄지게 된다. 5년 6개월이 지난 지금, "절망의 시대의 쓰인 희망의 경제학"은 희망의 경제학이 되었는가?

승자독식 게임의 시작


'한국경제 영광의 30년'이 지나고,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의 포디즘(포드주의)에서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의 포스트포디즘(후기 포드주의)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노동자들에게 안정된 직장과 높은 월급을 제공하는 것으로 노동자들의 협력을 얻고, 소비시장을 개척했던 포디즘에 균열이 가면서, 입사한 사람들은 무덤까지 책임지겠다는 연공서열의 질서와 정규직체제는 무너진다.

또한 IMF경제위기가 닥치면서, 기업 간의 지나친 생산·판매 경쟁이 각 기업의 경영을 압박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재벌 기업들은 서로 사업이나 계열사를 교환하여 경쟁력 있는 분야에 주력할 수 있는 산업구조로 전환한다. 이를 통해 기업의 이익은 극대화되지만 상품별, 부문별 독과점화가 강력하게 진행된다. 이렇게 한국경제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승자독식'의 룰에 따라 상황은 매우 가혹하게 변한다.

영광의 30년 동안 전 계층에 걸쳐 열려있던 가능성의 문은 유신세대와 386세대를 지나, 거의 마지막으로 안전지대를 넘어온 X세대를 끝으로 닫히게 된다. 전체 일자리의 10%정도에 불과한 대기업과 정부조직에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것 외에, 88만원세대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는 언젠가는 잡아먹힐 개미지옥에 몸을 던지는 것뿐이다. 2~3개의 주요 생산업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남은 변두리에서 치열하게 다투는 중소기업에 불안정한 취직을 하든지, 아니면 대형 프랜차이즈업체가 장악한 시장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자영업을 하든지.

여전히 깊어만 가는 개미지옥, 승자독식의 룰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을 표방하는 <88만원세대>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감춰지고 전도되었던 진실을 새로이 조명한다고 하더라도 승자독식의 게임은 멈출 줄을 모른다. 청년실업률과 정규직·비정규직의 비율은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비정규직의 근로조건이 개선되었다는 소리도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2012년 노동부의 자료에 의하면, 비정규직 한 달 노동시간의 정규직 대비 비율이 76.0%임에도. 시간당 임금총액 수준은 63.6%, 한 달 초과근로수당은 31.3%, 1년 특별급여는 7.1%밖에 되지 않는다. 일하는 시간만큼 수당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비정규직의 복리후생을 바라는 것은 사치가 되었다. 지난 18일 임신 8개월의 직원이 근무 중에 양수가 터져 조산하는 일이 발생했다. 조산 위험을 알리며 회사 측에 무급휴직을 쓰겠다고 요청했지만, 회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중재하고,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고르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장치를 마련해야하는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88만원세대>의 경고는 소용없었다. 지난 이명박 정부는 승자독식 게임을 완화하기는커녕, 22조원 규모의 4대강 정비사업을 벌였다.


<88만원세대>의 내용 그대로 20대는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 하에 정부가 주도하는 토목사업 공약의 장식물로 전락하였고, 시민의 세금은 사회로 재분배되지 못하고 건설사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대가를 치른 끝에 군인과 외국인의 몫을 제외하고 1만 명 이하의 질낮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등록금이나 일자리 지원 등, 개미지옥을 메울 귀중한 혈세를 강바닥에 박음으로서 정부 스스로 이 나라 "청년들의 삶을 강바닥에 박은" 것이다.

개미지옥 속 청년들의 삶

IMF경제위기부터 정부는 '선택과 집중 전략' 아래 10만 명의 국민을 부양할 하나의 경제주체를 성장가능성의 여부에 따라 선정하고 지원한다. 선택을 받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승자독식의 게임에서 기업들은 정부가 제시한 '원형'에 가까워지고자 동일유전자를 대량 복사하며, 획일성의 경쟁을 치르게 된다. 이러한 마당에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대기업에 입사하고자 할 때, 우리나라 10대와 20대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미래가 다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승자독식의 게임 안에서 이들은 평생소득과 안정성이 높은 순서대로 획일적인 경쟁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 10대들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10대들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를 사회가 요구하는 첫 번째 바늘구멍인 수능(수학능력검정시험)을 위해 바친다. 상위 4%만이 받을 수 있는 '1등급'을 위해 시간이 갈수록 경쟁이 과열되고 있는 현실은 팽창하는 사교육시장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능을 온 몸으로 겪어내고 난 뒤, 20대가 되어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충분한 사회적 교육을 받거나 경험을 쌓지 않은 채 급작스럽게 성인이 된 이들에게 주어진 길은 곧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거나, 혹은 몇 년의 유예기간을 더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 위한 '스펙'을 쌓는데 보내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 10대를 보낼 때와 마찬가지로 남들과 같은 일을 하지만 그래서 더 고통스럽게 고독을 감내한다.

10대와 20대는 하나의 구멍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집단이지만, 교류와 협력이 없으므로 집단의 힘을 갖지 못한다. 대부분의 세대원들에겐 여전히 88만원세대의 이야기가 없고, 88만원세대의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대표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몇몇의 별종은 그야말로 별종으로 남아 세대의 주류가 되지 못한다. 88만원세대는 다만 부모세대와 기존 사회의 질서에 종속된 채 끊임없이 어른으로서의 독립을 유예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미래, 88만원세대를 탓할 수만은 없다.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않으면 패자부활전이 아닌 죽음이 기다리는 사회에서 금액으로 환산될 수 없는, 돈 이외의 가치들에 대한 관심은 사치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언제 개미귀신에게 던져질지 모르는 과열된 세대 내 경쟁 속에서, 먼저 혁명을 외칠 수 없기에 10대와 20대는 점점 더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

그리고 승자독식 게임의 끝

승자독점의 게임을 통해 중소기업이 쇠퇴하여 대기업만이 살아남고, 소수의 10대와 20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한국경제를 이끌어가는 것은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엄격한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 개개의 주체가 하나의 원형으로 획일화될수록, 다품종 소량생산의 포스트포디즘으로 넘어간 산업구조에서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돌연변이, 뮤턴트의 등장은 어렵게 된다. 결과적으로 국제적인 경쟁력을 약화시켜 힘세고 강한 종만이 살아남은, 공룡 세계의 멸망을 부르는 것이다.

한편 세계에서 이례적으로 활성화된 한국의 사교육시장은 10대의 미래를 인질로 잡은 인질경제라고 할 수 있다. 인질경제는 한국 경제 부조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데, 좋은 학군을 선점하기위한 부모의 열성이 만들어낸 부동산 폭등, 월 50만원에서 수백만 원까지 이르는 사교육비는 중산층의 붕괴를 도왔다.

지금의 10대와 20대들의 부모는 영광의 30년 동안 윤택한 부를 구가했던 유신세대들인데, 이들이라 할지라도 인질경제를 감당하면서 IMF이후 침체된 경제를 회복하고, 세계화의 충격을 흡수하는 동시에 불합리한 승자독식의 독과점화 구조를 전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같은 맥락으로 88만원 세대의 독립이 유예될수록 부모인 이들에게 부담이 지워지게 될 것을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모순적인 체제로 돌아가는 불안한 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 <88만원세대>는 이러한 사회에서 파시즘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고 지적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예측은 현재에 와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는 유머게시판 '일베(일간베스트)'를 중심으로 과거 독재를 행했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전두환 전 대통령에 열광하고, 특정 지역민과 여자를 비하하며 척결을 주장하는 네티즌을 쉽사리 만날 수 있다. 또한 이들 외에도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사람들을 '일조일석'에 쓸어버리는 바람을 담은 글 또한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다. 이러한 학살의 사고는 언제나 불안한 사회에서의 불만을 그릇되게 분출하는 시발점이자 파시즘의 핵심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경제학

희망의 경제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희망의 경제학이 된다. 앞서 말했듯 자신들, 88만원세대의 이야기를 하는 몇몇의 별종은 그야말로 별종으로 남아 세대의 주류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별종들이 개미지옥의 구석에나마 건설한 바리케이드는 88만원세대를 모으는 집단적 힘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가진다.

대표적인 개미지옥인 아르바이트시장에서 '알바연대'는 최저생활수준의 보장을 외치며 최저임금 인상을 목표로 다양한 캠페인, 서명운동, 총파업 등을 진행한다. 15세~39세의 청년공동체인 '청년유니온'은 청년층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그리고 지난 4월 30일, 청년유니온은 6번의 노동조합 설립신고 끝에 '법내노동조합'으로 인정받게 된다.

<88만원세대>의 에필로그가 말하듯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행동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이 행동은 실현시키기 어려운 희망을 되뇌며 바늘구멍으로, 사실은 개미지옥으로 88만원세대를 내모는 희망고문이 아니다. 오히려 함께 손을 잡고 개미귀신의 퇴치를 도모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가 쌓이고 쌓여 집단적 힘으로 변모할 때, 88만원세대는 스스로와 한국의 미래를 보호하는 거대한 바리케이드와 짱돌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용한 혁명'은 88만원세대의 힘만으로 이루어낼 수 없다. 원인과 결과가 다원화된 세계에서 해결책 역시도 다양한 곳에서 잉태되어 상호작용을 이루어야 한다.

<88만원세대>의 저자들이 강조하듯 앞선 세대의 역할, 기득권층이 나누어야할 몫이 존재하는 것이다. 청년주택협동조합 '민달팽이유니온'과 서울시가 대학생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추진위를 결성한 것이 예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을 '특정 계층을 위한'이 아닌, 세대간 경쟁에서 경험과 자산이 부족한 사회초년생에 대한 배려와 한국의 미래를 살찌우는 안배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넓은 시야가 필요한 시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기 직전 앤더슨은 모피어스를 통해 "네가 노예라는 진실"을 알고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다. "평온한 매트릭스 세계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무슨 일이 펼쳐질지 상상조차 안 되는 매트릭스 바깥으로 나갈 것인가" 파란 알약을 먹으면 진실을 잊고, 빨간 알약을 먹으면 매트릭스를 벗어나 '현실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우리 또한 앤더슨과 마찬가지로 승자독식의 게임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게임의 룰을 무너뜨릴 것인가의 기로에 서있다. 앤더슨은 빨간 알약을 선택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박권일 지음,
레디앙,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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