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귀걸이 한 짝 같은 존재"

[서평] 생은 상실을 수반한다 <에메랄드 궁>

등록 2013.05.20 11:20수정 2013.05.2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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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상실을 경험한다. 그것이 사랑이라 이름 붙인 한 사람일 수도 있겠고, 오랜 시간 공들인 하나의 사물일 수도 있겠다. 또 형언하기 힘든 어떤 한 가지 마음일 수도 있다. 그것의 소멸로, 누군가는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 안에서 영원히 갇혀버린 채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고난으로 뭉쳐진 무거운 몸을 힘겹게 끌어올리고서 진흙탕길이라도 비틀거리며 어기적 어기적 걸어 나가기도 한다. 분명 다시 살아가는 삶이 곧바로 행복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게다가 또 다시, 고통은 삶의 어딘가에 희미하게 붙어 있다가 언제 어디서건 발밑 구덩이를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모텔 방 청소를 하다 우연히 발견한 귀걸이 한 짝에, <에메랄드 궁>의 연희와 한씨 아줌마는 침대 맡에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전 부인이 귀를 뚫었을 때부터 미워지기 시작했다는 남편 상만의 말에, 연희는 그렇게 귀걸이를 하고 싶어 귀를 뚫었지만 차마 끝까지 귀걸이를 하겠다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고. 한씨 아줌마는 사별한 남편을 과거 자신이 일하던 식당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때 그가 선물한 귀걸이 한 쌍에 그길로 가서 귀를 뚫었단다. 귀의 상처는 낫지 않고 급기야 고름까지 고였지만 꾹 참고 진물이 고이는 걸 살짝 가리면서까지 그 앞에 섰을 때, 자기 귀를 본 남자는 입 찢어지게 좋아했다고. 그런데 그놈의 망할 귀걸이 하는 걸 포기했더라면 여기까지 안 왔고 이렇게 살지도 않았을 거라 말한다.


그렇다고 이를 미리 짐작하고서 어둠의 사슬을 끊어낼 재량이 그들에겐 없다. 결국 모든 불행의 근원은 송두리째 뽑아버릴 수 없는 일이다. 왜 우리는 이토록 영원함도 없이, 반복되는 사라짐에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 힘은 무엇인가. 상실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생의 일부이다. 그것은 생을 생답게 만드는 고유한 특성이다. 우리는 숨기고 싶은 자신의 결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나의 결핍은 곧 네가 겪었던, 더 나아가 또 다른 이가 겪을 결핍이다. 그 고통의 경험으로 공감의 삶을 다시 열어간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 고유의 삶인지도 모른다. <에메랄드 궁>에서 만난 그들의 삶은 저마다 닮아 있다. 픽션 속 등장인물은 우리들의 현실이다.

짝을 이루며 존재하는 귀걸이 한 짝을 빌려, 작가 박향은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비극의 씨앗이 여기에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귀걸이 한 짝은 이들이 정말로 찾고 싶었던, 그랬기에 그들의 삶을 비극으로 낙담케 만들었던 '한 짝'이었음을 보여 준다. 만약 짝에서 그중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 의문을 품는다. A 잃어버린 것과 똑같은 다른 하나를 찾기 위해, 그것에만 목매며 고군분투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B 쓸모없게 된 하나이지만, 전에 함께 했던 기억을 그대로 추억하며 동시에 함께 살아간다. C 영영 그 존재자체를 지워버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과거를 망각한 채 살아간다. D 상실의 아픔에서 벗어나오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하나를 상상하며 희망의 끈은 놓지 않고 살아간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귀걸이 한 짝은 에메랄드 궁에서 인물들이 소망했지만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새로운 삶'이며 그것은, 곧 '새 생명'이었다고 짐작해본다.

주인공 연희는 만명슈퍼 유부남 상만의 아기를 임신하고 둘은 야반도주한다. 상만부부의 가정은 위태롭진 않았지만. 상만의 아내 명옥이는 아기를 못 낳는 결점이 있었다. 도망쳐온 연희와 상만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아기를 끝내 영아원에 보낸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다시 그곳을 찾지만, 이미 아기는 입양되어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던 어느 날, 명옥이 용케도 알아내고 그들이 운영하던 조그만 여인숙으로 찾아온다. 그곳에서 5일을 보낸 명옥이는 만명슈퍼를 처분한 돈을 상만에게 남긴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 돈에 은행대출금을 얻어 마련한 모텔이 '에메랄드 궁'이다. 연희는 가슴에 잃어버린 자식을 묻고 살아가며 남편 상만을 혐오스러워한다. 남편 상만 역시도 명옥과 만명슈퍼를 꾸리며 살던 날을 추억하며 이 모두가 아기 때문이었음을 한탄한다. 이 가운데 어린나이에 아기를 낳고 들어와 사는 혜미와 경석이네, 자식을 찾는다는 일념 하에 모텔에서 매춘을 하다가, 상만과도 관계를 맺는 선정이, 지금은 사라진 아내지만 그녀가 아기를 꼭 낳길 희망했던 벙어리 총각, 남편이 다른 곳에서 낳아온 자식을 거두고 살아가는 모텔 청소부 한씨 아줌마까지.

덧없이 이어지는 상실은, 그들을 닮아가게 한다. 명옥이에겐 연희가 가해자이지만, 선정에게 있어 연희는 피해자다. 이쯤에서 저자의 또 다른 소설집 <즐거운 게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주인공 여자는 바람난 남편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그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남편을 죽음으로 내몬 교통사고가 외곽의 모텔 근처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여자는 상실과 배신감, 더 나아가 또 다른 욕망의 마음을 품는다. 시간이 지나고 여자는, 맞바람 피우는 남녀가 살고 있는  어느 집의 가정부로 일하게 된다. 그녀는 그 집 남편을 유혹하기 위한 '즐거운 게임'을 펼치려 한다. 그러다 집 안방 화장대 위에서, 아무렇게나 놓여진 여자의 작은 귀걸이를 발견한다. 역시  그것은 한 짝뿐이다. <에메랄드 궁>에서 못다 한 작가의 '한 짝 인생'에 대한 응집된 생각들이  이곳 한 문단에 박혀있다.

"귀걸이는 한 짝뿐이다. 나는 귀걸이 한 짝을 손에 움켜쥔다. 두 개가 있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물건들은 하나만 남았을 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무리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던 양말 한 짝, 젓가락 한 짝도 있다. 혼자 남은 것들은 외롭다. 나는 남편의 짝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서야 나는 내가 남은 양말 한 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남은 장갑도 남은 젓가락 한 짝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원래부터 그렇게 혼자였던 것을 나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박향, <즐거운 게임>,산지니,2012)


태어날 때 혼자였던 우리의 인생은, 누군가 혹은 자신이 스스로 파놓은 환상의 함정에 빠져 그 이상을 꿈꾸며 살아간다. 아라비아 궁전을 본뜬 황금색 돔 지붕을 가진 '에메랄드 궁'은 모델 특유 상 꿈틀대는 욕망과 발설될까 두려운 비밀이 숨어든 장소다. 저마다의 사연을 한 움큼씩 안고 방문한 그들 삶이, 언제쯤 에메랄드처럼 찬란하게 빛날 수 있을까. 확실하게 장담할 순 없지만, 곧 그렇게 대면하게 될 것이다.

소설 속 연희와 명옥이, 한씨 아줌마, 혜미, 포장마차 정란씨가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을 떠올렸듯 그네들 역시 우리와 닮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끝 차이라 했던가. 불행과 마주하며 인생을 살아내듯, 행복 또한 그렇게 불현듯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에메랄드 궁으로 얼굴을 들이밀던 그들처럼, 귀걸이 한 짝 가슴에 품고 사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하고서 말이다. 그런 희망으로 우리는 오늘을 살아낸다.


"아이가 발을 까불며 연희의 엉덩이를 찬다.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아야 할 나뭇가지처럼 절박하게 잡고 있어야 할 연희의 등을 아이는 깨득깨득 웃음을 풀어놓으며 투닥투닥 차고 있다. 정란씨가 다현이 이름을 부르자 더욱 큰소리로 아이는 빠이빠이를 외친다. 번쩍 높이 쳐든 정란씨의 손이 마치 산선의 깃발처럼 힘차게 흔들린다." (박향, <에메랄드 궁>,나무옆의자,2013)

에메랄드 궁 -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향 지음,
나무옆의자, 2013


#에메랄드 궁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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